오롯이 홀로 나를 채우는 법
오롯이 홀로 나를 채우는 법
  • 구혜리 기자
  • 승인 2020.09.14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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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위클리 마음돌봄: 아홉 번째 돌봄-홀로, 서울의 밤

[위클리서울=구혜리 기자] 아프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죽음 이전에 질병과 사고를 완전하게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잘 이겨낼 수는 있다. 도리어 이를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어떤 이의 삶은 더 단단해지기도 한다. 몸이 아프면 온 신경은 아픈 부위에 집중된다. 하물며 감기나 생채기 하나에도 처방을 받거나 적절한 요법을 취하는데 마음에 난 상처에는 유독 무관심하다. 하지만 마음에도 돌봄이 필요하다. 위클리 마음돌봄은 삶에 관한 단편 에세이 모음이다. 과열 경쟁과 불안 사회를 살아가는 당사자로서 스스로와 사회를 돌아보는 글이다. 글쓴이의 마음의 조각을 엿보는 독자에게도 작은 위로를 전할 수 있길 바란다.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아무(A: Mu)

취향이 분명한 음악. 다녀간 이의 흔적이 깃든 잡다한 소품들이 어지럽게 가게를 채우고, 포근한 조명 아래 뽀얗게 쌓인 먼지조차 안락하게 느껴진다. 꾸밈없는 익숙한 말투와 목소리. 그 간의 공백을 메우려는 열정으로, 쉼 없이 오고가는 말로 가게를 채운다. 졸업을 앞두고 발길이 끊긴 대학가. 오랜만에 동창모임으로 신촌을 갔다가 대학 시절을 보낸 단골 가게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나를 반기는 사장님이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거기 있었다. 졸업하기 전 단골가게를 만들어 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자그마치 7년 대학을 다니며 잘한 일 중 하나랄까.

“나 오늘 술 잔뜩 마실 거예요”

“응, 안 돼~”

“여기 업종 바뀌었어요?”

우습게도, 분명 술집인데 아무리 술을 주문해도 받지를 않는다. 안주 하나를 시켜 놓고 사장님과 밥을 먹는다. “나 올해는 연애 안 하려고” “인간관계 너무 어렵다” “연애 세포 다 죽었나봐” 등 가벼운 농담들이 오가고. 전 애인과 헤어진 이야기, 새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최근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순서 없이 섞어낸다.

우리는 어떻게 가까워졌더라. 이 바에 처음 앉은 지 5년이나 지났다는 말에, 바에 앉아 대화를 튼 옆 사람이 놀란다. 이런 식이었다. 우연히 학교 모임 친구를 따라 여기에 왔고,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 어느새 편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도, 그 사람도 굳이 포장하지 않고 향과 음악 속에 자기들의 세계를 꺼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도 ‘트렌디’한 화술을 구사하는 게 멋지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관계에서 ‘트렌디’하려 노력할수록, 나를 감출수록, 내가 만든 허상에 나를 가두고 구속될 뿐이었다. 그저 이 순간 눈앞에 닿은 이들과 축배를 들어 진실함을 다한다면 그걸로 좋다. 멋있지 않아도, 가진 게 없어도, 내가 당신을 해하지 않는 한 나는 당신과 기꺼이 시간을 쌓는 특별한 존재 가운데 하나니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사랑이 많은 사람에게 상실의 성장통은 여운이 길다. 나의 20대는 너무 연애로 점철시켜 와서 홀로였던 적이 없다. 자랑도 부끄러움도 아닌 그저 내가 삶아온 모습이다. 하지만 ‘한결’은 갑자기 혼자가 된 내가 슬퍼할까 걱정했나보다. “온전히 혼자의 시간을 가져, 세틀다운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 조언하며 과제를 줬다. 그리고 본인이 혼자일 때 무엇을 하는지 노하우를 전수한다. 노하우랄 것도 없다. 그냥 살아온, 살아가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우린 처음부터 혼자였고, 혼자라는 게 결핍인 적이 없으니까.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을 듣고, 바라보다 보면 또 평온해져 온다.

요즘 내가 행복해지는 법은 너무 쉽다. 하루가 저문 느지막한 시간 운동을 다녀오고 끈적끈적해진 몸을 뜨거운 물로 씻어낸다. 따뜻한 차 한 잔에 수분을 채우며 깊은 속까지 데운다. 물론 허기가 진다면 소화에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주전부리를 채워도 좋다. 불룩해진 배를 쓸어 만지며 엄마와 유년을 떠올리는 것도 좋으니까. 모든 등을 끄고 노란 빛이 도는 조명과 향초를 킨다. 차분한 노래도 틀어본다. 흔들리는 향초의 불빛을 응시하다 마음껏 퍼져 누워 침대 맡에 놓아둔 책에 손을 댄다. 며칠 전 선물 받아 깨끗하고 빳빳한 책 속지의 촉감을 손끝에 느끼고 작가와 대화를 나눈다. 때마침 비가 오는 길 러닝을 하다 돌아온 친구 한결이 “꽃들도 비 맞는 중ㅎㅎ”라는 메시지와 함께 촉촉한 꽃들 사진을 보내온다.

나는 경쟁형 인간이라서 나를 통제하고 연료를 태워 숨 가쁘게 박차나가는 게 좋다. 하지만 그게 스스로를 벼랑에 몰아 불행 속에 망가지도록 내버려두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 나아가기 위해, 다시 또 누군가의 옆 사람이 되기 위해, 오롯이 홀로 나를 채우는 법을 터득하는 것, 이게 요즘 그렇게 재미지다.

 

홀로인 밤엔 달에 비친 당신과 대화를 나눈다

음유시인과 예술가 향유의 중심에 사랑이 있다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단골 소재로 ‘어머니’의 존재를 뺄 수 없다. 직계존속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낭만주의, 에로티시즘이 만드는 예술적 충족과 다른 차원에서 숭고함과 갈등적 욕망을 충돌시키며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예술 표현의 소재가 되어왔다. 한때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하던 시절, 가난한 청년들이 그들의 욕망과 계급적 한계를 그들의 부모에 투영시켜, 눈물과 침으로 내뱉는 부모의 부르짖음이 너무나 진부하고 촌스럽게 느껴졌다.

독립이 당연하고 익숙했던 나의 20대는 부모의 기준 또는 그들의 행복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온실 속의 화초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 아래, 나의 어머니는 딸이 주체로서의 행복을 삶의 중심으로 삼아 살아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과 나의 주체성은 오롯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것임을 알고 있는 어머니였다. 그녀의 가르침대로 나는 쉽고 빠르게 독립을 결정했고, 하루하루 단단해지는 법을 연습하며 온몸으로 삶을 맞아내고 있다. 20대를 통틀어 내게는 ‘딸’보다 강한 색체의 아이덴티티가 많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수많은 아이덴티티의 색이 섞여 내가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근래 들어 나는 종종 엄마를 비춘다. 방황하는 나그네의 길을 비추는 달처럼, 답을 찾거나 혼자가 되었다고 느낄 때 나는 내 뒤에 당신의 허상을 그리고 나를 지켜보는 당신을 바라본다.

“내가 선택한 행동의 결과에 엄마는 웃을까, 좋아할까, 잘했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멀리 떠나왔다고 생각한 당신에게 다시 돌아가 나는 당신을 준거해 당신을 기쁘게 해줄 나의 모습을 찾는다. 딸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나의 삶을 비추며 나를 바로잡는 영원한 동반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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