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다산 정약용

[위클리서울=박석무]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큰 꿈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나의 큰 꿈(大夢)은 대부분 성호(星湖)선생을 사숙(私淑)하는 가운데 깨달아졌다.”(余之大夢, 多從星湖私淑中, 覺來. : 年譜)라고 말해 요순시대의 복원을 위해 일생동안 학문을 연구했던 성호의 유저를 읽으면서 자신의 큰 꿈이 세워졌노라고 말했습니다. 다산은 16세에 성호의 유저를 읽었노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내 나이 스무 살 때에는 우주간의 모든 일을 다 깨닫고 그 이치를 완전히 정리해내려 했다. 서른, 마흔 살이 되어서도 그런 의지가 쇠약해지지 않았다. 신유옥사(1801)를 당한 뒤에는 백성과 나라에 관계되는 모든 일, 즉 전제(田制)·관제(官制)·군제(軍制)·세제(稅制) 등으로만 생각을 좁히고 경전 연구에 있어서는 혼잡스러운 것들을 모두 파헤쳐 바로잡아 가장 정통의 옛 유교 원리로 돌이키려는 생각이 있었다. (학유에게 준 가계)”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4년째인 1822년 다산은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자찬묘지명」을 짓고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중형(仲兄) 정약전의 일대기를 묘지명이라는 문체를 빌려 기술합니다. “옛날 무술 년(1778년 정약전 21세 다산 17세) 겨울 아버지께서 화순현감으로 계실 때 나와 중형이 동림사(東林寺)에서 책을 읽는데 40일 만에 『맹자』 한질을 모두 읽었다. (중형은 『서경』을 읽었다) 미묘한 말과 뜻에 인정해주심이 많았다. 얼음물로 세수하고 이를 닦으며 눈 내리는 밤 밤잠을 못 이루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요순군민(堯舜君民)에 관한 내용이었다. (정약전 묘지명부록)”라는 이야기에, 17세, 21세의 다산 형제가 온 세상을 개혁하여 요순시대를 만들어보자는 담대한 토론을 밤새우며 했다는 내용입니다. 

고려시대의 포은 정몽주, 조선을 건국한 태조대왕, 그 뒤의 조광조나 이이 같은 정치가들이나 유학자들, 그들의 최종 목표는 요순시대를 복원하여 지상의 유토피아 국가를 이뤄내자는 꿈을 꾸며 살아갔습니다. 『맹자』는 공자를 이어 유학을 발전시킨 맹자의 저술입니다. 맹자의 근본 목표도 요순시대, 인의(仁義)의 세상을 구현해내자는 뜻으로 저술해낸 경전입니다. 『서경』은 3황 5제의 천하 국가를 통치하는 대경대법(大經大法)이 담긴 책으로, 요순정치를 실현할 방법을 가르쳐 준 내용입니다. 

1778년, 그때만 해도 천주교 문제는 거론도 되지 않던 때이고, 아버지가 고을의 원님으로, 사또의 자제들인 두 형제는 귀공자 대접을 받으며 아름답고 고요한 절간에서 학문을 닦던 시절입니다. 음력으로 11월 무렵이니 한창 겨울,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잠을 이루지 못하던 형제는 『맹자』와 『서경』에 대한 경전을 토론하면서 썩고 병든 조선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개혁해서,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나라, 모두가 배고픔 없이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세상, 사회적 약자일수록 국가의 배려로 불편 없이 살아가는 세상, 붕당정치는 멈추고 정쟁을 뛰어넘어 오직 공론만 주장하고 편론(偏論)은 행세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자던 형제의 꿈이 얼마나 아름답던 시절인가요. 

세상은 돌고 돌아, 시파와 벽파의 당쟁이 격화되고, 공서파와 신서파의 당쟁이 살육전으로 치달으며, 끝내 두 형제는 역적죄인으로 전락, 오랜 귀양살이로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두 형제의 저서는 남아, 그 저서를 통한 요순시대 만들기의 꿈은 살아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의 아름다운 꿈을 살리는 의미에서라도 이념갈등, 지역갈등, 분단의 갈등, 정쟁 등을 극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름다운 두 형제의 대담한 꿈들이 그립기만 합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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