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중앙역
[신간] 중앙역
  • 이주리 기자
  • 승인 2020.09.2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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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지음/ 문학동네
ⓒ위클리서울/ 문학동네

[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첫 소설집 『어비』(2016)를 비롯해 장편소설 『딸에 대하여』(2017) 『9번의 일』(2019), 중편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2020)과 두번째 소설집 『너라는 생활』(2020)까지 성실히 자기만의 소설세계를 만들어온 김혜진 작가, 그의 첫 책이자 첫 장편소설이었던 『중앙역』을 새로이 선보인다. 『중앙역』은 2014년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으로, 당시 심사위원들은 “과거도 추억도 없이, 심지어 미래도 없이 남녀가 사랑을 나눈다. 이런 사랑이 가능한가? 불모지에 발가벗은 남녀를 풀어놓고 작가마저 망연히 그 여로를 쫓는 것은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중앙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노숙인의 삶과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권력에서 비켜난 존재들의 노동과 정체성, 주거의 문제를 꾸준히 다뤄온 김혜진 소설세계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서울역 다시서기센터에서 일하던 지인을 통해 노숙인 아웃리치 활동을 취재하며 이 작품을 구상했다. 그만큼 생생하게 거리의 삶을 담아낸 이 작품은, 그간 서사의 세계에서 호명받지 못한 인물들의 내면 깊숙이 독자를 데려간다. 사회적 약자라 뭉뚱그리지 않고 한 개인이 가진 가장 개인적인 것을 파고드는 작가 특유의 방식을 통해 “이래도 쉽게 판단내릴 수 있겠습니까?” 묻는다. 내용과 문장을 다듬고 작품 속 두 남녀를 형상화한 듯한 남학현 화가의 그림으로 새로운 옷을 입혔다. 김혜진 작가의 작품에 신뢰와 지지를 보내는 많은 독자들에게 새로이 읽힐 선물 같은 소설이길 바란다.

낮 동안 시끄럽게 이어지던 공사도 중단된 깊은 밤의 중앙역. 중앙역은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가장 큰 역이다. 캐리어를 끌며 역사(驛舍) 주변을 도는 한 젊은 남성이 있다. 행인들이 요령 있게 그를 피하고, 자연스레 그의 앞엔 길이 열린다. 한참 만에 자리잡은 곳은 열차 선로 위에 걸린 구름다리 한구석. 박스를 깔고 앉아보고 또 누워본다. 박스 아래 깔린 돌멩이를 고르며 가능한 한 편안한 자세를 취해본다. 그는 거리에서 먹고 자고 산다. 거리의 냄새와 소음이 삶의 풍경인 사람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거리의 삶에 편입된 그는, 그러나 다른 노숙인과 자신은 완전히 같지 않다 생각한다. 중앙역 광장에서 벌어지는 일들, 오가는 감정과 관계들을 관찰하며 자신의 삶과 그곳의 거리를 어떻게든 좁히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덜 잃기 위해 애쓰는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거리의 상황은 그가 가진 것을 하나둘 빼앗아가고, 그에게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젊음조차 이제는 서둘러 소진해버리고 싶은 무엇이 된다. 

그런 그에게 ‘여자’가 나타난다. 그의 전부나 다름없는 캐리어를 도둑질해갔던 늙고 병든 여자. 캐리어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여자는 어느새 그에게 새로운, 유일한 삶의 의미가 된다. 

혜진 작가는 현대화가 낳은 불가피한 산물로 여겨지는, 사회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존재에 빛을 비춘 뒤,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의 레이어를 입혀 이야기를 불편하고도 익숙한 것으로 만들었다.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이라면 불행한 삶으로 내몰린 이들의 순애보적 사랑을 짐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첫 장편에서 이미 전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을 내세웠다. 우리가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 역을 찾았을 때, 그곳을 삶의 마지막 공간이라 생각하고 모여든 이들을 멀찍이 떨어져 지나칠 때, 그때 쉽게 판단해버리고 마는 것과는 다른 삶을 말이다. 인물들의 가까이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듣는 귀를 가진 작가. 그 덕분에 우리는 무심히 바라보고 평가하던 삶의 풍경 하나를 새로이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된다. 과거도 미래도 모두 잃거나 포기했지만, 누구보다 생생한 현재를 쥐고 있던 그, 열망으로 넘치던 그 현재마저 잃은 그가 마주할 삶은 과연 어떠한 것일지.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 속에서 먹먹한 마음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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