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 김혜영 기자
  • 승인 2020.09.23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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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탐방기] 부산국제영화제 외전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영화제 탐방기는 유독 재잘재잘 늘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영화제가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었던 나를 떠올리며 많은 정보를 하나씩 친절하게 소개하고 싶었고, 보고 겪은 것들을 자세하게 이야기하며 영화제에 함께 가자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 마음이 서툴렀던 것 같아 아쉬움도 남지만 과정에서의 좌충우돌마저 ‘탐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엔 더 좋은 글로 독자분들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보다 자유로운 글, 시리즈 외전을 준비했다. 앞으로도 영화제 탐방기는 다양한 고민과 시도를 담아 계속될 것이다.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위클리서울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위클리서울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위클리서울

작년 제 24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새롭게 등장한 한국 영화들이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야구소녀’(2019),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초미의 관심사’(2019) 등 코로나 사태에서도 개봉과 관심을 이어가며 화제가 되었던 작품들이다. 그중에서도 폐막작 ‘윤희에게’(2019)는 빠른 속도로 매진되며 영화제 안팎으로 관객들의 많은 호기심과 기대를 이끌어냈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JTBC)로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만들어낸 김희애와 이미 가수로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김소혜, 이제는 아역이 아닌 당당한 주연배우로 자리매김한 성유빈까지. 독립영화라고는 믿기지 않는 라인업 속에서 배우들 간의 케미스트리는 예측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영화 '윤희에게' 포스터 ⓒ위클리서울

그러나 함께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영화 동아리 부원들 모두 치열한 티켓팅에 실패하며 영화제에서 ‘윤희에게’를 미리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필자 역시 저번 호에서 다룬 영화 ‘마리암’(2019)을 마지막으로 부산을 떠나오며 아쉬움과 기대 속에서 ‘윤희에게’의 개봉일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래서 이번 편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제에서 보고 싶었던 폐막작이기에 나름의 외전이다.) 드디어 다가온 개봉 날, 동아리 친구와 함께 극장을 찾은 그 날은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 테다. 눈이 내리는 날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건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이나 다름없음을.

발자국도 없이 새하얀 마을, 흔적만 남은 기찻길, 차가운 향이 나는 눈덩이, 솜이불과 담요와 머플러의 보드라운 감촉, 노란 고양이와 노란 불빛, 기다리던 필름카메라와 담배 한 모금, 편지 한 장, SF 소설 한 권. 영화 ‘윤희에게’에 등장하는 인물과 소재, 배경을 읊으라면 끝도 없이 따스한 단어들이 이어진다. 겨울 특유의 정서와 아름다움이 가득 담긴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본 영화 ‘러브레터’(1995)가 떠오른다며 종종 함께 회자되는데, 줄거리 역시 편지를 주요 소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윤희에게’의 주인공 윤희(김희애)는 딸 새봄(김소혜)과 단 둘이 살아가는 중년 여성으로, 첫사랑에게 편지를 받게 된다. 편지를 몰래 읽은 새봄은 내용을 숨긴 채 윤희에게 일본 여행을 제안하고, 엄마와 첫사랑이 재회할 수 있도록 귀여운 계략을 부려본다. 윤희는 첫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그녀에겐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러브레터’와 ‘윤희에게’는 모두 두 여성이 편지를 계기로 어떤 일들을 맞이하게 되는지, 과거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 것인지를 지켜보게 되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러브레터’가 젊은 여성들의 멜로라면, ‘윤희에게’는 중년 여성의 멜로와 삶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지금껏 중년 여성이 주인공이 되어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미디어라고는 늘 흔한 패턴이 반복되는 주말드라마 밖에 없었다. 흔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은 인물이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는 것이 아니라 납작하게 눌려 오직 캐릭터로서만 소비된다는 것. 그렇게 특정화된 중년 여성의 캐릭터는 대중에게 피로감을 선사하기만 했다. 그런데 ‘윤희에게’는 달랐다. 윤희는 지금껏 미디어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던 인물이다. 스포일링부터 하자면, 윤희는 딸 새봄을 위해 억지로 삶을 이어나가는 무기력한 엄마이자, 자아를 박탈당한 성소수자다. 그렇기 때문에 윤희의 처지와 상황, 주변인들과의 관계는 복잡한 층위에서 입체성을 형성한다. 새봄과 윤희만을 보자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엇갈리기만 하던 모녀가 함께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게 되는 이야기이고, 윤희와 첫사랑 쥰(나카무라 유코)은 큰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던 두 여성이 주변 여성들의 도움으로 서로를 만나고 자아를 되찾는 이야기다. 애초에 편지가 발송될 수 있었던 건 쥰의 고모 덕분이고, 윤희를 일본의 시골 마을까지 데려간 건 새봄의 활약이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연령의 여성들이 연대해서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갈등과 혐오로 점철된 현시대에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위클리서울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위클리서울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위클리서울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위클리서울

두 사람이 재회하기 전, 쥰은 시도 때도 없이, 기한도 없이 윤희를 그리워한다. 무슨 꿈을 꾸었냐고 물으면 “그냥 계속 같이 있어”라고 답한다. 꿈속에서 조차 바라는 것이 그것 하나뿐일 정도로 어려운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말미에 윤희는 쥰에게 답장을 쓴다. 그리고 하나의 문장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두 사람에게 서로의 존재는 인생의 사랑이자 꿈이었던 것. 꿈 그 자체이자, 다시 꿈을 꾸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도 하는 사랑은 그렇게 영화 속에서 동화처럼, 때로는 현실처럼 그려지기도 했다.

긴 세월을 돌고 돌아 드디어 만난 윤희와 쥰이 함께 걷는 장면은 그야말로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일본의 눈 내린 마을을 찬찬히 묘사하듯 보여주던 영화에서 가장 뜬금없이 편집되어 튀는 장면이었는데, 현실 같지 않은, 환상 같은 짧은 시간임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간절히 바랐던 그 시간이 지난 뒤 윤희가 주체적인 삶의 의지와 목표가 생긴다는 변화는 손쉽게 관객을 설득시킨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거나 앞으로 연락을 하고 지내자고 약속하는 장면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 얼굴을 잠깐 마주한 것만으로 가능하게 되는, 그 시절부터 켜켜이 쌓아 온 사랑. 나를 온전히 마주하게 해 용기를 내게 만드는 사랑은 더욱 그 가치를 발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랑 이야기를 봐왔다. 닳고 닳은 소재 속에서 더 이상 발견할 것도, 느낄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우리 곁에 있었음에도 볼 수 없었던 사랑에서는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삶을 살아나가라는 메시지를 얻고 싶다면, 한 겨울에 내리는 눈의 시원하고도 포근한 정서를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길 바란다. ‘윤희에게’로 시작된 편지는 달콤하고 따스한 화답으로 마무리되며 그 과정 내내 당신을 미소 짓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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