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그래픽=이주리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SNS상에 어떤 분이 자신이 살아오며 겪었던 이야기를 올려놓은 글을 읽게 됐다. ‘설마…’ ‘진짜!’ ‘어떻게 그런 일이’라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릴 만큼, 믿기 힘든 여러 일들이 그 분 삶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생각이 났다. 나 역시 꽤나 많은 일들이 내 주변에서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처음의 기억은 유치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8년에 부산에서 일어났던 ‘정효주 유괴사건’. 그 당시 부산에서 수산업을 크게 하고 있던 정 사장의 막내딸 효주는 유괴범에게 두 번이나 납치되는 불운을 겪었다. 부자 아버지를 둔 죄였다. 유괴사건 대부분이 비극으로 막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럽게 효주는 두 번 다 살아서 돌아왔다. 이 사건은 영화 ‘극비수사’로도 만들어진 바 있다. 그런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면 그 당시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에 살던 나는 효주와 같은 발레 학원을 다녔던 동네 친구였다. 수업이 끝나면 아주머니 한분이 교습소로 올라와 효주의 옷을 갈아입혔고 학원 앞에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가 자가용에 태워 그 아이를 데려가곤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효주가 유괴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나는 그 집 앞까지 찾아가 ‘효주가 죽지 말고 제발 살아 돌아오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화성연쇄 YTN뉴스
ⓒ위클리서울/ 화성연쇄살인 관련 YTN뉴스 캡쳐

그 다음의 기억은 1986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다.

당시 수원의 변두리 쪽, 그러니까 화성과 수원의 경계선쯤에 큰언니가 살고 있었다. 방학 때면 가끔 놀러가던 그곳엔 아파트만 달랑 몇 채 서있을 뿐 그 주변은 모두 논이고 밭이고 공장 같은 것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뉴스에서 눈에 익은 동네가 나왔다. 거기서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큰언니가 살고 있는 곳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나오는 가까운 곳이었다. 엄마는 불안해서 안 되겠다며 큰언니와 조카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논두렁 밭두렁이 있는 그저 평범한 동네였던 그곳이 미치광이 연쇄살인범 하나 때문에 누구든 무작위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끔찍한 현장으로 변해버린 거였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1994년의 ‘박한상 존속 살해사건’.

대한민국 폐륜범죄의 대표주자라 말 할 수 있는 박한상이 자신의 아버지가 도박 빚을 갚아주지 않자 부모를 칼로 40번이나 찔러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집에 불을 싸질러 열두 살 어린 사촌동생까지 죽게 했던 사건이었다. 박한상이 다녔던 현대고등학교는 그때 당시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만큼 지척에 있었고 그의 집 또한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행동반경이 나와 어디쯤에선가는 겹쳤을 것이고 빵집 앞에서 어깨를 툭 부딪치고 지나간 누군가가 그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그 다음은 1991년 ‘이형호군 유괴사건’에 대한 기억이다.

영화 ‘그놈 목소리’로도 만들어졌던 이 사건은 내가 그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 집 앞 놀이터에서 일어났다. 유괴범이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아홉 살 형호를 납치한 뒤 가족에게 돈을 뜯어내려 44일 동안이나 술래잡기 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결국 형호는 잔인하게도 테이프와 끈으로 눈과 입, 손과 발을 묶인 체 한강둔치의 배수로에서 발견됐다. 전 국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유괴범의 목소리.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어 결국 범인을 잡아넣지 못했던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사건의 재수사가 다시 이뤄지게 되었다는 기사를 봤다. 아이를 잃고 한 많은 세월을 버티며 살아왔을 그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범인이 꼭 잡히길 간절히 바래본다.

 

ⓒ위클리서울/
ⓒ위클리서울/ 성수대교 붕괴 관련 KBS뉴스 캡쳐

그리고…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사건’

성수대교의 중간부분이 붕괴 되어 많은 인명이 희생된 대참사였다. 사건이 일어난 날 새벽, 성수대교를 지나가던 한 운전자가 다리 이음새 부분을 철판으로 땜질해 놓은 것을 보았다고 했다. 만약 벌어진 틈새에 대한 응급조치(땜질) 이후에 교량진입을 통제하고 그곳을 제대로 수리만 했더라도 얼마든지 그런 비극적인 대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거다. 사고가 일어난 시간이 아침 출근 시간 무렵이라 희생자 대부분이 직장인과 등교하는 학생들이었다. 그때 당시 나는 동호대교나 성수대교를 건너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니던 무렵이었고 그날 이유 없이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32명 중에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안전 불감증의 나라에 살고 있는 죄로 그 누구도 안전을 보장 받지 못한 국민의 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다음으로 2006년. ‘강호순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동네다. 우리 아파트 바로 옆 당수동에 그가 살고 있었다. 강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자주 갔었다던 음식점은 나도 고기 먹으러 몇 번 갔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성당에 피아노 반주를 해주러 가던 길 강씨에게 변을 당한 스무 살 여대생은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이웃 주민이었다. 강씨에게 마지막으로 변을 당한 21살의 여대생은 군포 대야미 보건소 앞에서 납치 됐다고 했다. 그 당시 군포 대야미에 있는 도예 공방을 다니고 있던 나는 공방 바로 근처에 있던 그 보건소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끔찍한 살인마 강호순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강호순의 첫 번째 희생자였던 윤씨. 그녀의 오빠는 자신의 여동생이 강호순에게 변을 당한 이후 경찰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강호순을 만나 이 한 마디를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너는 아무 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내 동생을 죽였지만 나는 경찰이 되어서 네 가족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굵직한 사건들이 ‘내 주변’에서 일어날 동안 부끄럽게도 나는 방관자였다. 물론 아이언맨이나 슈퍼맨처럼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떨어지는 교각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사람을 구할 능력도, 연쇄 살인마를 잡아 낼 힘도 없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나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을까. 연쇄살인범 이춘재가 8살 여자 아이를 들쳐 업고 산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는 목격자가 만약 주변 어른들에게 이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렸더라면… 그날 새벽, 교각에 덧대놓은 철판을 보고 불안했다던 그가 그냥 지나치지 않고 119에라도 전화했더라면… 강호순 주변에 살던 이웃이 수상한 그를 경찰에 조금 더 일찍 신고했더라면… 놀이터에 밤늦게 혼자 남아있던 형호군을 친구 엄마 누군가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밥을 먹였더라면… 어쩌면 누군가의 그런 작은 행동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안타까운 반성은 예전에 ‘민중의 소리’에 실렸던 ‘내가 성폭행 할 때 모른 척 해줘서 고마워’라는 만화를 보며 느꼈던 부끄러움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당신의 침묵은 우리의 비명보다 날카롭다.’

못 본 척 해줘서 고마워.

네 일 아니라고 무시해줘서 고마워.

동영상 재미있게 봐줘서 고마워.

만화의 내용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부당하고 잘못 된 일들을 내 일이 아니라고 못 본 척, 모른 척 눈 감아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내가 손해 보거나 다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냥 지나쳐 버린 순간 누군가는 희생양이 되거나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 기생하고 살아가는 범죄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은 누군가의 작은 관심과 행동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결국 나와 우리 가족을 지키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성폭행 할 때 모른 척 해줘서 고마워’ 배한나. 직썰 만화작가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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