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그물에서 금방 떼어낸 꽃게
그물에서 금방 떼어낸 꽃게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사람에게 만일 천적이 있다면, 바이러스나 세균 같은 기생식 천적이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사람을 먹는, 사람 고기가 매우 맛있다는 것을 발견한 괴 생명체가 있어서 사람을 대량으로 포획하고자 한다면, 미끼는 아마도 황금이나 혹은 보석을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때 했었지만, 꽃게를 생포하는 사람의 기술을 보고 난 뒤에는 욕망을 자극하는 미끼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이란 것의 내용은 실상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꽃게가 앞뒤로는 이동을 못 하고 좌우 양쪽으로만 걸을 수 있는 매우 괴상한 동물이라는 것과, 집게손의 악력이 대단해서 사람의 손가락에 구멍을 뚫어놓을 수도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 이상은 알지 못했고 딱히 관심을 갖고 알아보고자 노력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랬던 내가 물속에서 현란하게 춤을 추는 꽃게의 자태를 우연히 한 번 보고 난 뒤로 상사병 같은 것에 걸리고 말았다. 그날은 달도 없는 밤이었다. 깊은 밤에 야간작업을 끝내고 나오다가 일시적으로 길을 잃었다. 밀물은 벌써 종아리를 넘어 무릎까지 차오르고 있었고, 이제 곧 허벅지까지 잠수시켜 버릴 듯이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쓸데없는 전화질로 해찰을 하다가 아차 하는 순간 길을 놓친 트랙터 운전기사는 당황해서 여기저기로 마구 라이트를 비춰대고 있었다. 그때 한순간 그 현란한 장면이 내 눈에 보였다.

아차 하면 바닷물에 수장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저 아름다운 것이 대체 뭐냐. 하고 눈을 크게 뜨는 순간 꽃게라는 것을 알았다.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닌, 단 한 마리의 꽃게가 물속을 헤엄친다기보다 춤을 추고 있었다. 라이트에 비친 그 모습을 내가 정확하게 인식하고 쳐다본 시간은 아마 일 초나 이 초쯤이었을 것이다. 결코 길다고 볼 수 없고, 충분하다고 볼 수도 없는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모습은 그러나 영원처럼 길었다. 아니 영원처럼 내 기억에 콱 새겨져버렸다.

 

꽃게의 집게손
꽃게의 집게손

좌우 대칭으로 한쪽에 네 개씩 여덟 개의 다리와 두 개의 집게손과 두 개의 눈 그리고 핑크빛 알을 싣고 다니는 커다란 배꼽 하나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촉수를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활짝 열어놓은 채 꽃게는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 혼자라는 듯이 완전 무방비 상태로 춤을 추는 그 모습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 우아한 것들과 그리고 향기로운 것들을 총집결해서 바닷물 속에 띄워놓은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 나는 꿈에서 그 모습을 수시로 다시 보았다. 낮에도 하늘을 보면 꽃게 한 마리가 춤을 추고 있었다. 한 마리는 두 마리로 늘었고, 세, 넷, 자꾸 숫자를 더해갔다. 어떤 날은 수천, 수만 마리의 꽃게가 동시에 춤을 추는 환장할 것만 같은 장면, 이라기보다 헛것이 보이기도 했다. 며칠이나 반복되는 그런 환상을 함께 일하는 십이 년 연하의 사내 녀석에게 말했더니 그는 대뜸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라면 끓일 때 꽃게를 넣으면 겁나가 맛난디.”

그러면서 그는 생각만으로도 입맛이 다셔진다는 듯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정도는 나도 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바다를 직업적으로 드나드는 사람치고 라면을 끓일 때 꽃게 한 마리를 집어넣는 이른바 꽃게라면 맛을 모르는 자가 누구 있으랴. 그렇지만 이놈아, 이놈아, 하필 그런 얘기를 이런 때 해서 나의 환상을 깨버린단 말이냐.

나중에야 생각해보니 나는 꽃게의 천적이었다. 꽃게라면 맛을 안 뒤로 내가 냄비에 끓여댄 꽃게가 몇 마리인지 나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갯벌에 나가면 습관적으로 꽃게가 웅크리고 있을 만한 곳을 찾아서 부지런을 떨었을 뿐이었다.

 

꽃게잡이용 부표
꽃게잡이용 부표

양식장 면허가 난 갯벌에는 말목이 많다. 저기서 여기까지는 내 땅, 저기서 저기까지는 네 땅 하는 식의 경계선용 말목이다. 바닷물이 들고 날 때 이 말목을 중심으로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그러면 개흙이 빠져 나가면서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지는데 밀물을 따라 들어왔던 물고기나 꽃게 같은 녀석들이 썰물 때 미처 빠져 나가지를 못했을 경우 이 웅덩이를 피신처로 삼는다. 바다 생물들의 이러한 생존방식을 간파한 사람들은 갯벌에 들어갔다 하면 바지락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말목 근처로 달려간다. 달려가서 장화발로 웅덩이를 휘저어보면 다음 밀물을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는 망둥어나 꽃게가 어김없이 한두 마리는 뛰쳐나온다.

하긴 거의 모든 사냥 방식이 그렇긴 하다. 미끼도 그렇고 그물도 그렇고,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강물에서나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잡아먹고자 하는 대상의 생존방식과 욕망 그리고 습관을 파악해서 이용한다. 사람들은 아마 수백, 수천 년에 걸쳐 그것을 연구해 왔으리라.

그 중에서도 특히 꽃게를 대량으로 포획하는 기술은 놀랍기만 하다. 아니 그것은 놀랍다기보다 어처구니없다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맨 처음 꽃게 그물을 목격했을 때의 기막힘이 내게는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일단 이해가 안 되었다. 도대체 이걸로 어떻게 꽃게를 잡는다는 거지?

보고 또 봐도 그것은 남다른 그물이었다. 낚싯줄 같은 실이 얼기설기 망사 형식으로 엮여 있는데 구멍 하나의 크기가 어른 주먹이 쑥쑥 들고 날 정도로 크다. 그런데다 폭은 또 기껏해야 일 미터 남짓이어서 테니스장의 네트를 연상케 한다. 다만 길이는 무한대로 늘어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렇지. 이게 대체 무슨 그물이란 말인가. 그물이란 모름지기 잡고자 하는 대상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둬버리는 원리로 구성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꽃게 그물은 넓이가 기껏 일 미터 남짓밖에 안 된다. 이걸로 어떻게?

혼자서 눈이나 깜빡깜빡하다가, 고개나 갸웃거리다가 잊는 줄도 모르게 잊고 있었던 이 의문이 풀린 게 바로 그날 밤의 그 장면이었다. 온 몸의 감각기관을 활짝 열어놓고 물속에서 우아하게, 현란하게, 아름답게 춤을 추던 꽃게의 그 모습, 그 행동양식, 그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바로 꽃게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동돼 있다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다.

 

돌틈에서 기어나온 꽃게
돌틈에서 기어나온 꽃게

물론 꽃게 자신에게는 그런 행동이 하나도 우아하지 않고, 현란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은,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는 고된 노동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사람들은 꽃게의 그런 습관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렇게도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허술해 보이는, 외견상으론 엉성해 보이지만 꽃게를 잡기에는 최상의 그물을 고안해 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리의 꽃게가 사람에게 생포되기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해 보면 이런 그림이 된다. 살고자 하는 본능 외에 다른 아무 생각도 없는 꽃게가 물속에서 여덟 개의 다리와 두 개의 집게손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촉수를 최대한 활용해서 헤엄을 치고 있는데 뭔가 이물질이 감지된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자신의 진로를 방해하는 물체를 만나면 밀어내거나 쳐내기 마련이어서, 꽃게는 자신의 진로를 방해하는 그물을 본능적으로 밀어내고자 하지만, 그런데 이게 뭐냐. 이물질은 밀려나지 않고 오히려 다른 한쪽 다리 관절을 감고 들어온다. 그래서 또 다른 다리를 이용해서 밀어내고자 하지만, 이번에도 밀려나기는커녕 그 다리마저 감아버린다.

꽃게는 다리가 많고, 관절도 많다. 게다가 두 개의 집게손은 안쪽이 톱니 형식으로 돼 있다. 만약에 꽃게가 자신의 다리를 휘감고 있는 그물을 집게손으로 뜯어내고자 하면, 그물은 곧바로 집게손 안쪽의 톱니에 끼여 버린다. 당황한 꽃게는 여덟 개의 다리 모두와 두 개의 집게손 모두를 정신없이 휘둘러서 적을 물리치고자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꽃게의 활동반경은 더욱 좁아진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날개가 자유를 억압당하고 처절하게 망가져 가듯이 그렇게.

 

상품성이 없어 버려진 꽃게들
상품성이 없어 버려진 꽃게들

어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꽃게는 대단히 매력적인 어종인 한편 자본을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가신 후속작업을 거쳐야만 하는 상품이기도 하다. 꽃게를 사로잡고 있는 그물을 일일이 하나씩 가위로 잘라내야 하니 그물을 매번 새 것으로 갈아야 하고, 다리가 없는 꽃게는 상품성이 팍 떨어지는 까닭에 조심조심 정성을 다해서 뜯어내야 하니 그 작업에 소요되는 노동력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꽃게는 생명력이 매우 강하다. 다리가 모두 부러져도 죽지 않고, 바닷물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녀석을 수돗물에 넣어도 그 낯섦에 처음 몇 초 동안 펄쩍 뛰기는 하지만 죽지는 않는다.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해서 맛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소비자는 다리 없는 꽃게는 꽃게로 인정해 주지를 않는다. 그래서 어부는 다리 부러진 꽃게는 아예 그물에서 떼어내지도 않고 그대로 둬버린다.

그대로 둬버린 꽃게는 그물에 마치 무슨 열매처럼 매달린 채로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몸부림을 친다. 몸부림과 함께 서서히 죽어간다. 그물에 달린 꽃게가 아직도 살아서 몸부림을 치고 있지만, 자본주의 사상에 충실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는 어부는 거기까지 관심을 둘 정신이 없다. 어부는 다만 한 번 쓴 꽃게 그물은 두 번 사용할 수 없다는 앎을 갖고 있을 뿐이고, 그래서 꽃게가 주렁주렁 매달린 꽃게 그물을 둘둘 말아서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에 구겨 넣는다.

 

꽃게가 달린 채로 폐기된 꽃게그물
꽃게가 달린 채로 폐기된 꽃게그물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는 폐기처분을 목적으로 일단 야적장에 쌓아둔다. 다리가 없어서 떼어내지 않고 버려둔 꽃게도 함께 쌓여진다. 폐기처분되는 그물이 하루에 몇 개나 나오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물에 매달린 채로 야적장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꽃게가 하루에 몇 마리나 되는지 아는 사람도 당연히 없다.

버려지는 꽃게는 그물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물에서 떼어내는 동안 다리가 떨어져 나간 꽃게도 버려진다. 상품성이 있어서 챙겨지는 꽃게와 상품성이 없어서 버려지는 꽃게를 굳이 계량해 보기로 하자면 아마도 버려지는 숫자가 훨씬 많을 것이다. 어쨌든 상품성이 없어서 버려진 꽃게 쓰레기는 방파제 여기저기에 수북이 쌓여가고, 일부는 밀물 때 바닷물에 쓸려가기도 하지만 일부는 그대로 썩어간다. 그래서 꽃게 철에 꽃게잡이 전문 어선이 드나드는 항구에는 악취가 코를 찌른다.

이 엄청난 악취의 근원은 대체 무엇인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자본주의가 거기에 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 쓰레기배출이라는 삼각함수에 갇혀서 옴싹도 달싹도 못 할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 것으로 여겨진다.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가을이구나. 이제 곧 겨울이 오겠지. 악취가 진동하는 항구 여기저기를 쓸쓸한 마음으로 어슬렁거리는 내 귀에 대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썩어가는 꽃게가 비아냥대는 소리로 묻는 것만 같다. 너희의 자본주의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왜 아직도 포기하지 못 하고 붙잡고 매달린 채로 망해 가는 것이냐고.

그런가. 인류는 지금 망해가고 있는 것인가. 나날이 늘어만 가는 쓰레기 더미를 보고 있자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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