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위클리서울=박석무]  다산 자신이 기록한 글에 의하면, 정조를 만난 이후 세상을 뜨기까지 18년의 임금과 신하의 만남이었다고 했습니다. 귀양살이가 시작된 1801년에서 해배되어 돌아온 1818년까지가 또 18년입니다. 고향에 돌아와 18년을 살아가다가 다산은 세상을 떠납니다. 그렇게 18년의 숫자는 다산과 인연이 끈끈했습니다. 첫 번째 해우는 정조가 32세, 다산이 22세이던 1783년 봄이었습니다. 그때 세자책봉을 경축하기 위한 증광감시(增廣監試: 경사가 있을 때 기념으로 진사·생원을 뽑는 과거)에 합격하고 사은(賜恩)의 자리에서 정조와 다산의 첫 만남이 이뤄집니다.

그때 정조는 여타의 합격자는 그냥 지나치면서도 유독 다산이 앞에 오자, “얼굴을 들라! 나이가 몇이냐?”라고 묻자, 다산이 답했는데, 다산은 이 첫 번째의 대면을 풍운지회(風雲之會), 즉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의 만남이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일반 백성과 임금의 대면이 이뤄졌음은 그렇게 특별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첫 대면이 있는 이래, 정조와 다산의 뜨거운 학문적 만남이 이뤄집니다.

다산은 진사(進士)로서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어 성균관에 들어가 8도의 인재들과 어울리며 학문에 열중하였습니다. 다산과 대면한 이후, 정조는 바로 다산의 인품과 학문적 수준을 알아보려고 성균관의 학생을 자주 불러 학문을 토론하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해가 바뀐 1784년, 23세의 다산은 임금의 명에 따라 『중용(中庸)』에 대한 80여 조항의 질문서를 내려 답변해 올리라는 하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가 ‘사칠이기(四七理氣)의 변(辨)’을 논하라면서, 퇴계와 율곡이 논한 바의 차이점에 대해서 답변하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성균관에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큰 거소가 있는데 동재에는 남인, 서재에는 서인들이 거처했습니다. 동재의 학생들은 모두 퇴계의 사단이발(四端理發)의 설이 옳다고 답했는데, 남인인 다산은 율곡의 기발(氣發)의 설이 곧바로 통하여 막힘이 없다고 생각하여 율곡의 설이 옳다고 주장하는 답변을 올렸습니다. 당연히 동재 사람들의 비방이 빗발치게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깊은 정조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가 진술한 강의는 일반 세속의 흐름에서 벗어나 오직 마음으로만 헤아렸기 때문에 견해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그의 공정한 마음도 귀하게 여길 만하니 마땅히 정약용의 답안을 첫 번째로 삼는다.”라고 하면서 크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암선생연보』에는 다산이 정조에게 학문으로 인정받은 첫 번째 일이요, 두 사람의 학문적 만남이 최초로 이뤄졌노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다산의 기록에 의하면, 뒷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학자 군주 정조는 이미 『사칠속편(四七續編)』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다산처럼 율곡의 학설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더욱 다산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같은 결론을 도출한 학문적 이론 때문에 그 두 사람은 군신이자 동지의 사이가 되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신뢰했던 정조의 신하 다산, 정조의 붕어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사실은 다산이 모든 것에서 공정한 심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비방이 있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율곡의 학설이 옳다고 했으니, 얼마나 양심적인 학자이고 공정한 사상가인가요. 반대파의 논리도 옳으면 옳다고 주장하는 다산의 공심, 오늘에도 그런 학자들이 많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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