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지연의 중국적응기 '소주만리'
[위클리서울=류지연 기자] 소주는 물이 많은 도시다. 크고 작은 호수는 말할 것도 없고, 곳곳에 강과 하천이 흐른다. 중국에서는 이런 지방을 일컬어 ‘수향’(水乡, shuǐxiāng)이라고 하는데, 특히 수향이라고 하면 강남(장강의 남쪽, 장강은 우리에게 ‘양자강’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수향을 일컫는다. 상해(상하이), 남경(난징), 항주(항저우), 소흥(사오싱), 소주(쑤저우), 양주(양저우), 무석(우시) 등이 모두 강남 수향에 속한다. 강남 지역은 기후가 온화하고 강수량이 풍부해서 강과 하천, 호수가 사방에 널려 있고 예로부터 중국에서 쌀과 물고기가 가장 풍부한 지역(鱼米之乡), 즉 먹고 살기 좋은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天上天堂,地下苏杭)이라는 오래된 속담이 있을 정도다.
아직까지 소주가 천당급으로 빼어난지는 의문이지만 호수 인근에 살며 탁 트인 물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건 혜택임에 틀림없다. 중국에 오기 전에 살던 도시에도 나름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인공호수가 있었기에 호숫가 산책을 종종 즐길 수 있었지만 집 근처에 위치한 금계호(金鸡湖, jīnjīhú)는 소주에서 작은 규모의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인공호수는 명함도 못 내밀만큼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면적이 7.4㎢라고 하니 서울에서 가장 작은 행정구인 중구(9.96㎢)의 면적과 거의 맞먹을 정도다.
그간 종종 금계호를 산책하긴 했지만 편도 30분 정도의 거리를 왔다 갔다 한 게 전부였고, 한 바퀴를 온전히 돌아볼 생각은 못해봤다. 그러다가 며칠 전, 이런저런 계기로 금계호 한 바퀴에 도전해보기로 한다.
마침 남편이 하루 휴가를 낸다기에 같이 돌아보기로 했다. 총 거리가 대략 15㎞쯤 된다고 들었기에 세 시간이면 가볍게 끝마치리라 싶었다.
오전 9시에 집을 나섰다.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게 선선하니 딱 좋았고, 며칠간 심했던 미세먼지 또한 거짓말처럼 좋아져 공기마저 상쾌했다.
소주 생활의 좋은 점 중 하나라면 사람이 붐비는 때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이다. 중국의 인구가 어마어마하긴 하지만 땅덩이도 그만큼 넓어 인구밀도 자체가 한국보다 훨씬 낮다. 주말이나 연휴 때 상점가가 붐비는 정도랄까, 그것도 명동의 사람 머리만 빽빽하게 보이는 풍경을 생각하면 붐빈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출근길의 지하철 또한 중국인들 말로는 붐빈다고 하지만 서울의 ‘지옥철’에 비한다면 터무니없는 소리다.
호수 산책로 또한 인적이 드물다. 가끔 가다 산책하는 이나 운동하는 이들을 만나긴 하지만, 대부분은 거의 혼자서 호수를 즐긴다고 해도 무방하다.
금계호가 특별히 잘 가꿔진 경우인지는 몰라도 금계호 둘레길은 어디 내놓아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수준급이다. 일단은 산책로 자체가 굉장히 잘 닦여있다. 길이 끊기거나 막힌 곳 없이 시멘트길은 시멘트길 대로, 나무길은 나무길 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흐름이 부드럽다. 주변의 조경도 꽃과 나무, 하나하나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았다는 느낌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요즘은 계절이 바뀌는 시기이다 보니 종종 도로변에서 조경사업에 한창인 인부들을 볼 수 있는데 도로변의 뗏장부터 꽃나무, 자그마한 화분까지 수십명의 인부들이 모여 일일이 갈아엎고 있는 걸 보면 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
다시 금계호로 넘어오면, 자그마한 갈림길마다 표지판이 잘 세워져 있다. 중간중간 금계호 10경을 모아놓은 지도도 있는데, ‘O경’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자체들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똑같단 생각이 들었다.
굳이 10경을 꼽을 것 없이 둘레길 자체의 여유만을 즐겨도 충분할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산책로 중간에는 제법 예술성을 띈 조각품들도 꽤 전시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술중심(우리로 치면 ‘예술의 전당’) 근처에는 악기를 켜는 조각상이, 외국상점가 근처에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 등 장소와 연관성이 있다는 점이다.
한편 호숫가를 걷다보면 바로 호수 코앞에 세워진 별장풍의 주택가를 볼 수 있는데, 중국의 집주변 경관에 대한 선호도가 한국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한강변의 아파트를 알아주듯이 소주에서는 호숫가의 집을 알아주는데 호수가 보이는 집은 ‘湖景房(hújĭngfáng, 호수 풍경의 집이라는 뜻)’이라는 부동산업계의 명칭이 있을 정도다.
그나저나 두 시간이 되어갈 즈음 슬슬 다리가 아파온다. 39년 인생 동안 평지 걷기 하나만큼은 언제든 자신 있다고 생각했건만 나이는 못 속이나 보다. 다행히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한 외국상점가에 거의 다다랐기에 힘내서 음식점까지 발걸음을 옮겨 본다.
가는 도중 난생 처음 목격한 신기한 일도 있다. 상점가의 풀밭에서 두 마리 길고양이가 싸우고 있는 걸 봤는데,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를 무섭게 몰아붙이니 쫓기던 고양이가 재빨리 나무 위로 기어오르는데 어찌나 높고 어찌나 빠른지 정말 깜짝 놀랐다. 마치 변상벽 화가의 ‘참새와 고양이’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한참을 매달려 있다 내려올 땐 뒷걸음질로 엉거주춤 내려오는데, 고양이에겐 사활이 걸린 일일 테니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설픈 뒷걸음질에 웃음이 나왔다.
고양이의 안부를 궁금해 하며 점심식사를 마치고 남은 여정을 위해 이동했다. 오는 길에 마트와 시장에도 들르느라 잠시 호숫가를 이탈했는데, 솔직히 마지막 한 시간은 제법 고됐다. 오래 신어 런닝화의 기능이 떨어진 건지, 아님 그저 간만에 쉼 없이 오래 걸어서인지 발바닥은 상당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시장에 들른 후 집까지 마지막 삼십여 분은 버스에 오르고픈 강렬한 유혹을 느꼈지만 완주라는 목표를 위해 꾸역꾸역 걸었다. 드디어 집에 도착해서 운동기록을 보니 오늘 하루 걸은 거리가 무려 17.15㎞, 장장 3시간 27분 20초에 달했다.
한번 걸어보니 결코 쉽지만은 않은 여정이었지만, 드디어 소주살이 1년 만에 호숫가를 완주했다는 성취감이 있었다. 조만간 새 런닝화를 장만해서 좀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두 바퀴째에 도전해보리라. <류지연 님은 현재 중국 소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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