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길가에 새로 지은 합숙소
길가에 새로 지은 합숙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그냥 둔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커다란 건물 하나가 우리 동네 5일장 뒤편에 무슨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학교에 교실이 모자라서 2부제 수업을 해야만 했던 시절, 초등에서 중 고등학교까지 학생 수만 해도 삼천 명이 넘을 정도로 시끌벅적한 시절에 지은 건물이다. 지금은 남녀노소 모두 합한 인구가 삼천 명도 채 안 되니 장날에도 사람 구경하기가 어렵다. 쇠락에 조락에 몰락이라는 단어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사람이라면 죄다 도시로들 떠나버리고 보니 건물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애물단지가 돼버렸다.

당시만 해도 면단위 촌구석에서는 보기 드문 철근 콘크리트 공법으로 워낙 단단하게 지은 건물이었다. 오십 년이 넘은 지금도 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단다. 문제는 너무 크고 너무 단단하게 지었다는 점이었다. 밭으로 치면 두 마지기도 넘는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건물을 철거하고 고추농사라도 짓고 싶었지만, 너무 크고 단단해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철거전문 업체에 맡기자니 그 비용이 몰락한 살림살이로 보자면 가히 천문학적이라 그 또한 포기해야만 했다. 그 바람에 건물은 멀리서 봐도 어둠침침하게 기분 나쁜 느낌의 흉물이 돼버린 채로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오며 많은 말들을 낳았다.

무엇이든 오래된 물건은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이야기는 고귀한 것도 있고 비루한 것도 당연히 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요술 같은 것이어서, 오래된 물건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고귀한 것은 더욱 고귀하게 빛을 내기도 하고, 비루한 것은 하나도 비루하지 않게 여겨지기도 하며, 고귀했던 것이 비루하게 여겨지는가 하면 비루했던 것은 더욱 비루하게 비쳐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먼지가 켜켜이 쌓여서 우중충해져 버린 건물을 볼 때마다 한 마디 나직하게 중얼거리곤 한다. 천석꾼 부자로 알려진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으로 돈지랄을 했던 것이라고. 또 어떤 사람은 앞날을 너무 길게 내다본 탓으로 저런 귀신의 집 같은 것이 생기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앞날을 십 년 정도만 봤어야 하는데 자손 대대로까지 본 탓으로 애물단지 집구석을 후대에 남겼다는 것이다.

 

대기 중인 버스로 퇴근중인 외국인 노동자들
대기 중인 버스로 퇴근중인 외국인 노동자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어쨌든 예나 지금이나 유명한 건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이야 물론 초라하게 유명하지만, 건물이 들어선 직후에는 화려하게 유명했다. 그 당시 어른들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로러스케이트장이라는 것이 개장했을 때 관내의 유명인사는 물론이요 군수까지, 심지어는 도에서 부지사까지 축사를 목적으로 내려왔다. 로러스케이트장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른들은 미국귀신이라고 떨떠름해 했지만, 군수와 부지사가 직접 얼굴을 내민 뒤에는 뭐가 뭔지 알 수는 없어도 굉장한 것이 왔다는 쪽으로 차츰 의견의 일치를 보아갔다.

사실로 그것은 굉장했다. 문화라고 말할 만한 것이라곤 꽹과리와 장구, 소고 등등을 활용하는 마당놀이밖에 없었던 면단위 촌구석에서 로러스케이트장은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일 만한 사건이었다. 무슨 물건을 만들어내자는 공장도 아니고, 사람이 살림을 하자는 것도 아닌, 오직 하나 놀이만을 목적으로 철근 콘크리트 소재의 육중한 2층 건물을 짓는다는 게 그 당시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가당한 일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싶은 일이 벌어졌을 때 가장 열광적으로 관심을 갖고 달려든 계층은 이십대 미만의 청소년들이었다. 어른들은 듣도 보도 못한 로러스케이트를 청소년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어른들은 이제 아이들과의 실력 겨루기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로러스케이트라는 거, 그거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쌀을 한 가마씩이나 팔아도 구매가 불가능할 정도의 굉장한 물건이었다.

한 집에 보통은 두세 명, 많으면 일고여덟 명씩의 아이들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 많은 아이들에게 일일이 하나씩 그놈의 로러스케이트를 안겨주기로 하자면 아마 굶어죽을 각오를 해야만 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쩔 것인가. 바람은 폭풍처럼 드세어서 그 누구도 막아낼 수 없었다. 부자 소리를 듣는 집 아이들부터 하나씩 둘씩 로러스케이트를 자랑스럽게 들고 다니는가 싶더니 그것은 곧 유행이 되었고, 유행은 사람 마음속에 잠자는 경쟁심과 우월감과 열등감 등등 온갖 것들을 두들겨 깨워놓았다.

 

노동자들의 합숙소가 될 옛 건물
노동자들의 합숙소가 될 옛 건물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 바람에 소작농으로 근근이 끼니나 채우는 집에서는 그놈의 로러스케이트 때문에 빚을 내야만 했다. 학교를 안 간다느니, 밥을 안 먹고 그냥 죽겠다느니, 각종 방식으로 떼를 쓰는 아이들을 끝까지 우격다짐으로 눌러 앉힐 만한 실력을 가진 부모는 거의 없었다. 초기에는 어떻게 대충 눌러 앉혔다 해도 마당의 병아리를 이유도 없이 걷어차는가 하면, 밥상 앞에서 퉁퉁 부어터진 얼굴로 씨익, 씨익 소리를 내는 등 부모 보기를 돌멩이 보듯이 하니 자존심이 상해서도 그놈의 로러스케이트를 외면하고만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로러스케이트장이라고 해서 로러스케이트만 들고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 마음을 흔들어대는 음악이 있었고, 춤이 있었고,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각종 재주놀이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요즘 말로 치자면 카페라고나 해야 할 대형 휴게실이 있었다. 휴게실은 단순히 휴식만을 취하는 데가 아니었다. 아는 사람과 아는 사람이 만나서 반가워하고, 모르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들뜬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다가 아는 사이가 되는가 하면, 눈과 눈이 마주쳐서 연애로 발전하는 경우가 한 건, 두 건, 입소문을 타면서 로러스케이트장은 차츰 학생들뿐만 아니라 청춘 남녀들의 명소가 되어갔다.

꽃이 피고 지기를 몇 번이나 하는 동안 세상 풍경은 당연하게 변해갔다. 그렇게도 많던 청춘 남녀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은 로러스케이트장에서 연애의 풍경을 목격할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숫자도 대폭 줄었다. 영업이익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로러스케이트장 주인은 전자오락실로 업종을 바꿔서 간판을 새로 달았다.

갤러그니 테트리스니 하는 이름으로 유명한 초기의 전자오락실은 로러스케이트장을 개장할 당시만큼은 못해도 어쨌든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무섭게 변하는 세월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서울이나 부산 등등 도시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시외버스 터미널은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부모님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친구들과 헤어지게 된 아이들은 불안과 슬픔과 호기심과 억울함으로 복잡해진 심사를 훌쩍이는 콧물로 드러내며 좌우사방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다.

 

낯설면서도 친숙한 간판
낯설면서도 친숙한 간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열 개도 넘었던 읍내의 예식장이 경쟁적으로 문을 닫았고, 신혼부부를 구경하기 어렵게 되고 보니 학교도 이제는 문 닫을 채비를 차리기 시작했다. 2부제 수업으로도 교실이 모자라서 분교를 따로 지어야 했던 시절은 전설이 되었고, 분교의 운동장은 어느새 잡초가 무성한 폐허가 돼 있었다. 잡초 밭으로 변해버린 분교를 개인이나 단체에게 매각 또는 임대한다는 교육청의 공식 발표가 나올 즈음 오락실은 군청에 폐업신고를 했고, 그리고 이삼 년쯤 지나서 무허가로 실내 낚시터를 개장했지만, 본전도 못 뽑았다는 소문만 무성한 채로 문을 닫는다는 공지도 없이 문을 닫았다.

그렇게 십 년, 이십 년, 무섭게 흘러가는 세월의 때를 온 몸에 뒤집은 쓴 채로 흉물이 돼버린 애물단지 건물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 사람이 2020년 가을에 나타났다. 논이나 밭이나 어디나 작업장을 가서 보면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낳은 새로운 아이디어라고나 할까. 너무 크고 단단해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건물의 외관은 그대로 두되 내부는 대대적으로 개비를 해서 기숙사 내지 합숙소로 쓰고자 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사람, 그는 외국인 노동자 소개를 직업으로 하는 그 방면의 전문가였다.

전문가는 정말로 건물의 외관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내부에서만 공사를 진행했다. 부부가 함께 와 있는 외국인을 위해 작은 방을 따로 몇 개 만들고, 혼잣몸으로 와 있는 외국인들을 위해서는 여성용과 남성용으로 구분한 합숙소를 만들고, 공용 주방과 목욕실도 갖추고, 오래 전에 끊어진 전기를 새로 끌어들이는가 하면, 상수도와 하수도 공사에 박차를 가하는 등 부지런을 떨었다.

 

베트남인들의 쉼터 겸 장터
베트남인들의 쉼터 겸 장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 방면의 전문가는 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칠팔 년 전부터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혼자서 살다가 돌아가신 빈 집을 여기저기에 빌려놓고 외국인들을 거주시켜 온 또 한 사람의 전문가는 그동안 번 돈으로 건물을 아예 새로 지었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버려두다시피 한 도로가의 논을 사서 매립한 다음 아스콘을 깔고 현대식 공법으로 집을 세웠는데 그 모양이 제법 단아하게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집 옆 마당에 세운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사람 소개를 전문적으로 한다는 내용을 당당하게 표방한,, 낯설면서도 어쩐지 친숙한 느낌을 갖게 하는 이 간판은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지금까지 외국인 노동자를 알선하는 사업은 일종의 불법이었다. 관광 명목으로 입국해서 불법적으로 슬쩍 눌러앉은 사람이 외국인 노동자의 거의 전부이니 합법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외국인 노동자들은 늘 쫓겨 다녀야만 했다. 쫓기는 몸이다 보니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도 없었고, 여러 명이 함께 있으면 한꺼번에 추방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여기에 두 명, 저기에 세 명 식으로 흩어져서 가만히 없는 것처럼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었다.

그런데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가 등장하면서 상황을 확 바꿔놓았다. 다시는 코로나19 이전의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거라던 미래학자와 의료진들의 전망이 똑 맞아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농업이든 어업이든 사람이 없어서 쩔쩔매는 현장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법이냐 합법이냐 따위는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일손이 없어 농수산물을 제때 거둬들이지 못해 죽거나 썩어가는 판에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따져서 뭘 하겠는가 말이다. 다행히도 불법 여부를 따지는 감독당국의 기준이 완화되었고, 인력회사 간판을 떳떳하게 당당하게 달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으니, 노동자도 좋고 사용자도 좋고 알선업자도 좋고 모두가 좋은 세상이 새롭게 열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태국인들의 쉼터 겸 장터
태국인들의 쉼터 겸 장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간판은 인력회사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로마트가 생기면서 일제히 문을 닫아야만 했던, 문을 닫은 채로 헛간으로나 써 왔던 옛 가게 터에도 새로운 간판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표현하기 쉽게 그냥 싸잡아서 외국인 노동자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각각이 나라가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 또한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일이 없는 날에는 끼리끼리 모여서 고향 얘기라도 나눠야만 한다. 그러자면 모이는 장소가 특정돼야만 한다. 그래서 생겼다. 태국 국적의 사람들은 태국 국적의 사람들끼리 모이는 잡화점 간판을 달았고, 베트남 국적의 사람들은 베트남 국적의 사람들끼리 모이는 잡화점 간판을 달았다.

하나로마트가 생긴 이후로 쭉 외로웠던, 외로워서 죽을 지경이었던 건물 주인들은 당연히 신이 났다. 처음에는 기연가미연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지만, 한 번 보고 두 번 보는 동안 없던 정이 새롭게 생겨서, 이제는 하루라도 안 보면 못 살 것만 같다.

물론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도시에서는 취업난이 그렇게도 심하다는데, 농어촌에서는 어찌 이렇게도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워서 사람이 곧 보물인 것처럼만 여겨지는 것인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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