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싫지만, 문화는 좋다
일본은 싫지만, 문화는 좋다
  • 류지연 기자
  • 승인 2020.11.10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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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류지연의 중국적응기 '소주만리'

[위클리서울=류지연 기자] 10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 중국에서 뜻하지 않게 히가시노 게이고(东野圭吾, Dōngyĕ Guīwú)를 만났다.

그의 소설 <공허한 십자가>(중국판 제목은 <허무의 십자가>이다)의 연극 공연을 통해서다.

매일 아침 소주대 어학당을 가려면 지하철역에 인접한 문화예술중심(우리나라로 치면 ‘예술의 전당’ 혹은 ‘세종문화회관’)을 지나쳐야 한다. 문화예술중심에 가까워지면 옥외 광고판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각종 공연 광고를 안 보고 지나칠래야 지나칠 수가 없다. 확실히 광고 효과는 있다고 해야겠다. 활짝 웃는 해금연주자의 독주회 광고를 보고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공연표를 구매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10월 중순 처음으로 문화예술중심 건물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중국은 뭐든 규모가 크긴 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예상보다 더 으리으리했다. 대극장과 더불어 음악당, 아이맥스 영화관, 도서관 등등이 부메랑 모양의 특이한 건물 안에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다.

대극장은 1200여석 규모라고 하는데 연주회 공연들은 주로 최저가 180위안(한화 약 3만600원)부터 시작해서 280위안/380위안/480위안(중국인들의 숫자 ‘8’ 사랑을 볼 수 있다)을 지나 최고가 580위안(한화 약 9만8600원) 수준이니, 현지 물가와 임금 수준을 고려할 때 결코 싼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치면 비주류인 ‘해금’ 연주임에도 관객이 적지 않았다. 소주 출신 연주가인지 소주 복숭아꽃마을(桃花坞, táohuā wù)에 관한 곡을 연주했는데 단 두 줄로 어찌 그리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해금연주자 육일문의 공연 포스터. 공연 제목은 ‘듣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다.’이다. ⓒ위클리서울/ 류지연 기자 <br>
해금연주자 육일문의 공연 포스터. 공연 제목은 ‘듣기도 하고, 즐기기도 하다.’이다. ⓒ위클리서울/ 류지연 기자 

소주 첫 문화공연의 여유를 음미하며 공연장을 나오다가 로비에 세워진 다음 공연의 안내판을 보던 중, ‘东’자로 시작하고(‘동’의 일본어 발음이 ‘히가시’이다.) 십자가가 그려진 포스터를 보는 순간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사실 필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성팬이다. 한국에서 출간된 모든 작품을 읽었대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오래 전에 읽은 작품이지만 공허한 십자가의 내용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처음 연극 포스터를 보고 든 생각은 의아함이었다. 일본 작가의 소설이 중국에서 연극으로 공연된다니? 우리나라도 일본소설이 잘 팔리는 시장이고, 일본 만화책이나 만화영화, 영화 등 비주류를 넘어서 널리 인기가 있지만 공연계에서는 일본 작품을 별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가설이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일본은 싫지만 책이나 영화는 나의 기호를 공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감상할 수 있는 문화상품이다. 그러나 공연은? 한 자리에 모임으로서만 성립하기에 나의 기호가 드러나게 된다. 디즈니 영화를 좋아한다는 말에는 별다른 선입견이 없지만 일본 만화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오타쿠, 피규어, 코스프레 등 특정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아무튼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에다가, 중국의 연극 표현은 어떨지도 궁금하고, 과연 초보인 필자의 중국어로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도 궁금해서 고민 끝에 표를 샀다. 그런데 매 공연마다 똑같은 자리라도 표값이 달라지는지, 같은 대극장 내에서 저번 해금 연주회 좌석보다 뒷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280위안(한화 약 4만7600원)을 내야 했다.

 

‘허무의 십자가’ 연극표. 중국에서는 공연장/영화관 등의 좌석 번호를 붙일 때 행(가로/~번째 줄)은 ‘排(pái)’로, 열(세로/~번째 좌석)은 ‘座(zuò)’로 표기한다. ⓒ위클리서울/ 류지연 기자 

드디어 공연 당일, 낮 시간 한 통의 안내 문자를 받았는데 금번 공연의 객석점유율이 70%가 넘으니 마스크를 잘 끼는 등 방호수칙에 주의하란 내용이었다. 무려 70%라니!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대극장으로 향하니 삼삼오오 모여든 인파가 공연 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의 뮤지컬 공연장에 가면 볼 수 있는 바로 그 모습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작년 중국 결혼식에 가서 본 사람들보다 더 신경 써서 차려입은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온 것 같다.(참고로 결혼식에서 본 하객들이 옷을 너무 성의 없이 입고 오긴 했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된다. 중국은 광고조차 자막이 있으니 혹시 연극에도 좌/우 화면에 자막을 띄워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는데 안타깝게도 자막은 없었다. 대신 오히려 드라마 배우들보다 발음이 명확하고 대사 속도도 조금이지만 좀 더 느리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막 없이 온전히 발성으로만 뜻을 전달해야 하니 그런 걸까? 짐작해본다.

대개는 단어를 주워 담는 수준에 그쳤지만, 중간 중간 쉬운 문장들은 알아들을 수 있었고, 한국어와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나오면(예. 자살-自杀-즈샤 zìshā) 극의 문맥상 알아챌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주로 대학로의 소극장들에서만 연극을 봐서 그런지, 대극장에서 무대 틀을 2층으로 짜서 뮤지컬 무대마냥 앞뒤로 무대를 밀어가며 1층과 2층에 각기 다른 장면을 연출하는 기법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무대의 꾸밈 자체는 투박했지만 극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영과 강렬한 색채 대비는 그 투박함마저 의도된 것이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위클리서울/ 류지연 기자 
연극의 한 장면들. 어두운 색감은 극의 주제가 던지는 무게와 그 결을 같이 한다.
연극의 한 장면들. 어두운 색감은 극의 주제가 던지는 무게와 그 결을 같이 한다. ⓒ위클리서울/ 류지연 기자 

두 시간의 쉼 없는 호연 끝에 연극은 막을 내렸다. 분주한 공연장을 뒤로 하며 중국에서 일본 소설은 얼마나 잘 팔릴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에 온라인 서점 1위인 징동(京东, 타오바오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중국 최대의 온라인 상점)을 살펴보았다. 현재 소설 분야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니 놀랍게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9위(침묵의 퍼레이드)/11위(나미야 잡화점의 기적)/13위(백야행)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12위(노르웨이의 숲)를 차지하고 있었다.

뒤이어 출판시장 규모를 찾아보았다. 2019년 중국의 도서 소매 시장 규모는 1022.7억 위안(한화 약 17.3조원)이고, 이 중 문학류는 104.2억 위안(한화 약 1.7조 원)으로 전체 시장의 10.9%를 차지한다. 문학 분야에서 외국소설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5% 정도라고 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100명 중 69명은 중국인이고, 외국인 작가 중에서는 일본과 미국/영국 순으로 많다고 하니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일본 소설이 잘 팔린다고 봐야겠다. 특히 작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14권의 일본 작품 중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만 6권이라고 하니 중국인들의 히가시노 게이고 사랑이 특히 유난한가 보다. (출처: 북경서남물류중심유한공사 ‘2019년 문학류 베스트셀러 시장의 새로운 특징’)

징동서점의 도서 목록을 살펴보니 과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대부분의 책에 ‘120만+’라고 표시된 평가가 달려있었다. 저 숫자가 최대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아도 몇 만 정도 수준이지 백만이 넘는 평가가 달린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중국이 유독 일본에 친숙한 걸까? 바이두에 ‘중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국가’를 치면 줄줄이 검색결과에 ‘일본’이 뜬다. 즉, 일본은 싫지만 문화는 좋다는 뜻이다.

중국에서 잘 나가는 일본소설을 보니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들었다. 중국에게 분명 한국이 일본보다는 더 가까운 나라일 텐데 우리 문학은 아직 소개가 덜 됐구나 하는 아쉬움이었다. 필자조차 중국을 오기 전에는 중국인들의 문화와 삶에 대해서 거의 몰랐지만, (한국에서 출간된) 중국 소설을 몇 권 읽다 보니 그네들의 결혼 생활과 갈등 양상 등이 한국과 참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게 생각났다.

분명 공감대를 가진 많은 작품들이 있을 텐데, 어느 분야가 됐든 중국에 들어와 한국을 좀 더 알리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류지연 님은 현재 중국 소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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