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암과 천주교 관계의 진실
천진암과 천주교 관계의 진실
  • 박석무
  • 승인 2020.11.18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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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위클리서울=박석무] 요즘은 코로나19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일요일마다 오르던 산행도 멈추고, 주말은 대체로 집에서 책이나 읽으며 보내는 때가 많습니다. 몇 주 전 답답함을 풀려고 가까운 친구와 승용차로 모처럼 ‘천진암’ 옛터를 찾아가 한나절을 보냈습니다. 1983년 가을, 한길사의 주선으로 다산 연구자 일행과 함께 천진암 옛터를 찾은 때로부터 37년이 지났으니 시간이 많이 흐른 셈입니다. 예전과는 완전히 변해버린 그곳, 상전벽해라는 옛말이 새삼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한국천주교 창시 200년 기념」이라는 우뚝 솟은 거대한 비석이었습니다. 1979년에 세웠으니 1779년으로부터 200년이라는 뜻입니다. 

“옛날 기해년(1779) 겨울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을 때 눈속에 이벽이 밤중에 찾아와 촛불을 켜놓고 경전(經傳)을 토론했다(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菴走魚寺 雪中李檗夜至 張燭談經)”라는 2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정약용이 지은 「녹암권철신묘지명」의 한 대목입니다. “강학(講學)을 하자 모인 사람은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몇 사람이었다. 녹암이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었는데, 새벽에 일어나 얼음물을 떠서 세수를 하고는 「숙야잠」을 암송케 하고, 해가 뜨면 「경재잠」을 암송하고 정오가 되면 「사물잠」을 암송하고 해가 지면 「서명」을 암송하도록 하였으니 씩씩하고 엄숙하여 정성스럽고 공손한 태도로 규칙과 법도를 잃지 않았다. 그러던 무렵에 이승훈 또한 수양에 힘쓰며 열심히 애쓰고 공부했다.(會者金源星,權相學,李寵億等數人 鹿菴自授規程 令晨起掬氷泉盥漱 誦夙夜箴 日出誦敬齋箴 正午誦四勿箴 日入誦西銘 莊嚴恪恭 不失規度 當此時 李承薰亦淬礪自強)”라는 70자의 글은 다산이 지은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이라는 글의 한 대목입니다.

47자로 된 다산의 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우인이덕조만사(友人李德操輓詞)」라는 제목 7자와 5언 율시 40자로 된 시입니다. 큰 형수의 친정 아우이자 매우 가깝게 지낸 젊은 학자 이벽이 1754년에 태어나 1785년 32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다산은 그의 죽음에 슬픔을 금치 못하는 시 한수를 지었습니다. 그 시 전체가 비문에 한자로 새겨져 있습니다.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학식을 지닌 친구가 일찍 세상을 떠남을 슬퍼한 글입니다.

마지막 66자의 글은 「단오일배이형유천진암(端午日陪二兄游天眞庵)」이라는 10자 제목의 7언 율시 56자의 시 한수입니다. 그 시에는 “이벽이 독서했던 곳 아직은 있지만(李檗讀書猶有處)”이라는 한 구절이 있을 뿐입니다. 광주(廣州) 출신 이벽은 광주의 천진암에서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은 특별히 천주교와의 관계로 연관지을 이유도 없습니다.

문제는 첫 번째의 권철신 묘지명에서 언급한 1779년 겨울에 열었다는 강학(講學)의 모임입니다. 24자로 한정된 이 글은 앞뒤의 문맥을 정확히 읽어야만 본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호의 제자로 성호의 학문을 계승한 권철신의 높은 경학 수준을 누누이 설명하고, 이어서 그런 경학자에게 자신의 중형 정약전은 집지(執贄)한 제자로 본격적으로 경학공부에 온 정신을 바쳤다고 하면서 어느 해 겨울 천진암·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열어 밤늦도록 촛불을 밝히고 경전에 대한 담론을 계속했다는 내용일 뿐입니다. 그러던 때에 어느 날 밤에 눈 속에 이벽까지 찾아와 함께 공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그때는 광주 쪽의 천진암과 양근 쪽의 주어사 양쪽을 옮겨 다니면서 강학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중씨묘지명」이라는 글을 살펴봅니다. 70자를 인용해 비에 새겼는데 한자로만 쓰였습니다. 인용한 글의 앞에, “언젠가 겨울에 주어사에 우거하며(嘗於冬月 寓居走魚寺)”라는 구절이 있는데, 거기는 생략하고, 바로 ‘강학(講學)’에서 시작하여 분명히 주어사에서 강학했음은 밝히지 않고 천진암만 거론한 것부터가 바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숙야잠」, 「경재잠」, 「사물잠」, 「서명」 등을 암송하고 본격적인 강학을 했던 곳이 ‘주어사’임을 분명히 밝혀놓았는데, 천진암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곳은 생략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암송하고 담론한 내용은 모두가 유학(儒學)에 관한 글임은 재론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것도 기해년 1779년의 일인데, 권철신의 주도 아래 성경공부를 강론했으며 이벽까지 참석해 성경공부를 했으니 그때가 바로 한국천주교회가 창시되었다 결론을 내리고 천진암이 한국의 천주교 발상지라는 주장을 펴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1983년 그곳을 방문한 뒤 84년 봄에 간행한 『한국사회연구』(한길사)라는 무크지에 「정약용, 그 시대와 사상」이라는 장문의 글을 써서, 다산의 글 속에서 천진암이 한국천주교회의 발상지라는 사실은 허위임을 면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다산은 다른 글에서 “1784년 겨울에 이벽이 수표교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를 선전했다.(「이가환묘지명」)”라는 내용으로 보아 한국천주교회는 1784년 겨울 수표교 부근의 이벽의 집이 한국의 천주교회가 시작된 곳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다산과 정약전은 1784년 4월 15일(음력)에 처음으로 천주교 관계 서적을 보았다고 했고, 정약종도 1786년(병오)에야 중형 약전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해서 배웠다고 했는데, 5년 전인 기해년 천진암 강학회에, 정약용·정약종·이승훈 모두가 참석했다는 주장까지 펴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 모두가 참석했다면 다산은 왜 정약전은 참석했다면서 더 깊은 신자였던 정약종이나 이승훈은 거명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모든 점에서 천진암에서 한국천주교회가 창시되었다는 비문의 기록이나 여타 자료의 내용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40년에 가까운 세월, 이제는 천주교 측에서 천진암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혀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산의 글 내용은 천진암이 한국천주교 발상지이자 성지라고 여길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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