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병’의 후손들과 담배연기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병’의 후손들과 담배연기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0.12.16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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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치 감시하듯이
마치 감시하듯이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겨울날의 갯벌은 속옷 한 장도 귀찮아서 벗어 던지고 싶어 했던 여름날을 그리워하게 한다. 이 엄혹한 겨울이 지나고 다시 찌는 듯한 더위가 찾아오면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는 것만 같은 오늘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극에서 극을 왕래한다는 말이 실감나게 와 닿는다고나 할까. 여름날의 갯벌이 사하라사막을 떠올리게 한다면 겨울날의 갯벌은 북풍한설 몰아치는 허허벌판 시베리아를 연상케 한다.

뿐만이 아니다. 일이 없을 때는 숨이 막히게 고요하고, 일이 몰릴 때는 도떼기시장도 그런 도떼기시장이 없다. 한가할 때는 한없이 한가해서 단 한 사람도 외부 일손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일이 몰릴 때는 일손을 관광버스로 실어와도 모자랄 지경인 갯벌을 드나드는 동안 나는 어느새 문화인류학 비슷한 공부를 한다는 생각도 없이 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얼마나 더 있을까. 같지만 달라 보이고, 다르지만 같아 보이는 저 많은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해서 거기에 살다가 여기까지 흘러온 것인가.

내 몸의 두 배는 족히 됨직한 덩치의 러시아 국적 남자를 잠시 알았다가 헤어진 지도 칠 년이 넘었건만 나는 어제의 일처럼 그를 기억한다. 밀가루라도 온 몸에 바른 듯이 하얀 피부에 황갈색 솜털과 수염이 인상적인 그는 덩치로만 보자면 진창에 빠진 경운기 정도는 일도 아니게 밀어서 빼낼 것 같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이십 킬로그램짜리 바지락조개 한 망을 들고서도 힘들다고 비틀거리다가 넘어지기를 되풀이해서 나의 바보 같은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트려 주었다.

 

물속에 불을 피워놓고
물속에 불을 피워놓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한때는 러시아와 같은 소비에트 연방이었다가 고르바초프 이후 독립한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등 ‘스탄’ 지역에서 온 남자들은 뭐랄까, 내 안에서 잠자는 깊은 슬픔을, 인류애를, 동류의식을 깨워놓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럽에서 왔건만 유럽인들 특유의 외양은 찾아볼 길이 없는, 한눈에 척 봐도 칠팔십 년대 우리 아버지 시절의 농부를 연상케 하는 그들은 북한식 발음의 한국말을 곧잘 하고 있었고, 식습관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들과 친해진 뒤에는 내가 많이 아팠다. 가슴이, 마음이, 심지어는 영혼까지도, 온 몸이 다 아파서 현실감각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그들이 저 멀고도 먼 ‘스탄’ 지역의 국민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노라면 너무 아득하고 끔찍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남자가 내게 말했다.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키에서 태어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조선의 남쪽 양주 고을에서 태어나셨다고.

그러니까 그리 오래지도 않은 시절에, 착취와 학대를 목적으로 밀고 들어온 일본 제국주의를 피해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국경을 넘은 뒤에는 여기로 저기로 마구 흩어졌다. 뭉쳐 있으면 기관총사격에 목숨을 잃으니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흩어져서 걷고 또 걷기를 얼마나 하다가 다시 모였다. 연해주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만주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하바로프스키에 이르기까지, 신세계를 개척하듯이 각자 마음에 드는 곳에 터를 잡고 움막을 짓고 농사나 혹은 물고기 잡는 일을 했다.

제법 평화로워진 연해주 일대에 어느 하루 불호령이 떨어졌다.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모여라. 호랑이보다도 삼천 배는 더 무서운 걸로 알려진 스탈린의 이 칼 같은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몸을 피한 사람은 글쎄, 몇 명이나 됐을까.

 

사람을 기다리며
사람을 기다리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진창에서
진창에서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에워쌌다. 군인들은 고함을 질렀다. 걸어라. 앞으로 걸어라.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걸었다. 꼬리칸이 안 보일 정도로 길게 연결된 열차가 나타났다. 군인들은 또 고함을 질렀다. 타라. 열차에 타라. 사람들은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열차에 탔다. 이윽고 시베리아횡단 열차가 기적을 길게 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스탈린과 그 부하들이 지정한 장소에 떨어트림을 당했을 뿐이었다. 대략 십칠만 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강제 이주를 당했다. 굶주림과 병으로 열차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속출했고, 새로 태어난 아이도 있었다.

목숨이란 모진 것이어서, 죽지 않고 살아서 황무지에 떨어트림을 당한 사람들은 돌투성이의 땅에 씨앗을 뿌리는 등으로 미래를 기약했다. 그러는 동안 스탈린이 죽고, 그 부하들도 죽고, 부하의 부하들도 죽어서, 강압과 폭압이 그 지긋지긋한 꼬리를 말아 들일 즈음쯤, 강제이주를 당한 조선인 후손들이 ‘코리안 드림’이란 이름의 바람을 타고 한국 땅을 밟기 시작했다.

‘코리안 드림’이란 바람이 불지 않았어도 그들은 언제인가 한 번쯤은 한국 땅을 밟게 돼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죽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가 보아야 한다는 얘기를 부모로부터 수도 없이 들어 왔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인가 한 번쯤은 나의 뿌리는 어디인가 하는 심각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끔 돼 있는 존재이니까. 이 심각한 질문 앞에서 당황해 하는 또 다른 경우가 있으니, 베트남에 온 사람들이다.

 

종패뿌리기
종패뿌리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베트남 국적의 노동자들 중에는 가끔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할아버지, 코리아, 한국” 하는 식으로 자기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언제나 반쪽이다. 할아버지가 한국인인 것은 알아도 그 할아버지가 한국 어디의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할머니나 혹은 어머니가 너의 할아버지는 한국 사람이었다, 라고만 얘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만나고 나면 나는 으레 나의 사촌 매형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아직 미성의 청소년이었던 시절에 매형이 월남에서 돌아왔다. 월남이라는 데가 어디인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전쟁이 있었고, 한국에서 많은 군인들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는 정도의 소문은 듣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둘기부대니 청룡부대니 하는 명칭도 제법 알고 있었고,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겨서 돌아왔네’ 어쩌고 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힘차게 따라 부르곤 했었다.

전쟁이란 어차피 죽느냐 사느냐가 반반인 미친 짓이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매형은 안 죽고 돌아왔다. 안 죽고 돌아온 매형이 처가에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커다란 나무 궤짝을 어깨에 메고 왔다. 나무 궤짝을 개봉하는 순간 신세계가 펼쳐졌다. 지금이야 무엇이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먹을 것이 가득 들어 있었던 작은 상자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었다. 군인들의 한 끼 식사라고 하는 그 상자 안에는 소고기 통조림과 생선 통조림과 초콜릿과 비스킷, 껌 등등 오만 가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내가 좀 더 자라서 매형과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을 때, 그는 월남에서 있었던 은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그 중에서 압권은 월남 처녀들이 한국 군인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살림을 차릴 수 있었다는 대목이었다. 살림을 차렸다고 해서 밤낮으로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가끔 찾아가서 짧으면 몇 시간, 길면 하루나 이틀씩 머물다가 귀대한다는 거였다,

새척작업중
새척작업중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럼 매형도?”

“아니, 아니, 나는 말고 부대 안에 그런 자들이 많았다고.”

깜짝 놀라서 펄쩍 뛰는 매형의 언행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캐어묻지는 않았다. 어쨌든 매형과 그 동료들의 그런 언행은 일종의 영웅담이었음이 틀림없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죽음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은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가 영웅 대접을 받기 마련이다. 영웅에겐 도덕이나 인륜 같은 게 무의미하다. 나의 어떤 행동이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할 수도 있다는 이른바 공감능력이 자리할 틈도 없다. 그들은 다만 이겨서 돌아온, 근거가 매우 부실해서 초라한 영웅으로 기록될 뿐이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서 전쟁이 뿌린 슬픔과 분노가 희미해졌을 즈음,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봉착한, 초라한 영웅의 후손들이 뿌리를 찾아보고자 하지만, 근거가 부실한 까닭에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베트남 국적의 노동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뭔가, 어디에서인가, 금방이라도 슬픔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것을 갖고 다닌다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굳이 비유를 들자면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데 가끔 등장하는 서자 같다고나 할까. 아니 어쩌면 어디서 데려온 남의 자식 같다고 해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머뭇머뭇, 주춤주춤, 매사에 소극적이라는 느낌조차 있다. 일이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고, 몸에 상처가 났어도 고통을 호소하기보다 감춰버리며, 물병에 소주를 담아서 갖고 다니며 가끔 한 모금씩 홀짝이는 방식으로 생전 처음 해보는 노동의 고통을 달랜다.

 

추워요 추워
추워요 추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에 비하면 같은 동남아 지역의, 옆 동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태국 국적의 노동자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쾌활해 보인다. 인사를 해도 큰 소리로 “아안녕 하세요” 하는가 하면, 작업 시간이 길어지면 노골적으로 불퉁거리며 “힘들어, 힘들어”하고 소리를 지른다. 태국에서 온 사람과 베트남에서 온 사람들의 공통점을 굳이 찾아보기로 하자면 아마 담배를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이다.

담배, 그놈의 담배, 이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담배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담배와 몸이 혼연일체가 돼버렸다는 느낌이다. 몸에서 사람 냄새보다는 니코틴 냄새를 더 많이 풍기고 다니는 이 사람들은 트랙터를 타고 작업장에 도착하기까지 대략 사십여 분 동안 세 번 내지 네 번을 피우는데 한 사람이 담배를 꺼내면 나도, 나도 하고 일제히 담배를 꺼내는 방식으로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을 난감하게 한다.

“아 그놈의 담배 좀 그만 피워.”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옆에서 꽥 소리라도 지를라치면 이 사람들은 매우 재미있어 한다. 일제히 킬킬대고 웃어대며 담배 연기를 길게 너무너무 맛있다는 투로 빨아들이고, 다시 하늘을 향해 뿜어낸 다음 담배를 통째로 쑥 꺼내서 내민다. 한 가치 피워보시라는 건데 이 장면은 뭐랄까,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담배 인심만한 게 뭐 있겠냐는 말이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은 있었다. 일을 하면서도 담배를 입에 물고, 일을 안 할 때는 더 많은 담배를 피우던 시절, 극장에서는 담배 연기가 스크린을 뽀얗게 가렸고, 버스나 기차 같은 대중교통 시설에는 어김없이 재떨이가 비치돼 있었던 시절, 우리의 그 시절과 동남아쪽 사람들이 작은 가방에 담배를 항상 두 갑 이상씩 갖고 다니는 습관 사이에 뭔가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아서 취재를 시도해 보았지만, 돈이라는 딱 한 글자 이상의 무엇은 건져낼 수 없었다.

돈, 그놈의 돈,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웃고, 돈 때문에 한숨을 쉬고, 돈 때문에 외로워한다는 말을 누가 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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