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법기술자들이 일망타진되는 그날을...
나는 소망한다, 법기술자들이 일망타진되는 그날을...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0.12.28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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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한 시간 두 시간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사흘 동안이나 내리 차이콥스키를 들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으면서 나는 작은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았고, 교향곡 5번과 비창을 들으면서 나는 입술을 비장하게 물고 우울의 정서를 즐겼으며, 백조의 호수를 들으면서 나는 한 마리 고니가 되어 호수 위를 미끄러져 다녔고, 호두까기 인형을 들으면서 나는 통통 뛰는 재롱둥이에 말썽꾸러기, 근심 걱정 하나도 없는 각종 동물이 되었다가 마침내 사람으로 돌아왔다.

비로소 정리가 좀 되었다. 고마웠다.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 고마운 건지도 모르겠다. 울화통을 터뜨리지 않고, 화염방사기라도 만들어서 활활,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려야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울화통을 착실한 내공으로 잘 다스렸으니 이보다 고마울 데가 무엇이랴.

지혜는 간 데 없고 지식만 난무하는 세상이 되어 간다는 걱정이 현실화돼 있는 세상을 나는 지금 목도하고 있다. 깊은 철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지식이란 대개 알량하기 마련이다. 그 알량한 지식조차도 내용을 뜯어보면 개인적 이익에 매몰돼서 한 치 앞도 못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명박씨가 대통령을 하던 2011년 초 지구촌 곳곳을 화끈하게 달군 팸플릿 한 권이 출판되었다. 그 제목도 불꽃처럼 뜨거운 ‘분노하라’, 프랑스의 대표적인 혁명지성인 스테판 에셀이 93세라는 놀랄 만한 나이에 내놓은 이 소책자가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을 때 국립 서울대에서 법률을 가르치는 조국 교수가 추천사를 썼다.

한국에서 검찰개혁을 가장 뜨겁게 그리고 일관되게 오랫동안 외쳐온 사람을 들라면 아마 조국 교수를 첫 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그는 따분한 이론이나 반복적으로 주워섬기는 상아탑의 점잖은 교수로 머물지도 않았다. 실무 현장에 뛰어들어 검찰개혁에 관한 설계도까지 완성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그는 ‘분노하라’의 추천사에서도 검찰이 ‘과잉범죄화’의 칼을 휘두른다고 일갈한 바 있다.

과잉범죄화를 간파해냈을 정도로 명민한 그도 미처 살피지 못 하고 놓친 게 있으니,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은 뒷골목 양아치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주제이다. 서로 싸우다가 불리하면 상대의 사랑을, 그 고리를 인질로 삼아서 목에 칼을 들이대며 어쩔래, 어쩔래, 하고 야비한 이빨을 드러내는 뒷골목 양아치들의 비열한 수법을 감히, 차마, 입바른 소리로나마 정의를 입에 달고 다니는 검찰이 최고의 수사기술로 차용해서 들이밀 줄이야.

어어, 설마, 그렇게까지, 하는 동안 조국 교수의 아내는 발가벗겨졌고, 딸이 또한 발가벗겨졌고, 폐교 위기에 처한 학교를 인수해서 운영해 온 어머니가 도둑으로 몰렸고, 동생이, 조카가, 심지어는 이혼한 제수씨까지 소환돼서 시궁창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래도 아직 하나의 희망은 남아 있다고 믿었다. 인권의 최후 보루임을 자부하는 판사는 다르겠지. 그래, 다를 거야. 달라야 해. 다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했지만 아니었다.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검사가 살아야 판사도 산다는 이심전심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탓일까? 아니다. 알기는 알았다. 다만 차마, 감히,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는 인간애적인 믿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실로 그것은 뜻밖이었다. 너무도 뜻밖이었다. 뜻밖으로 심하게 단순무식해서 놀랐다. 자신들의 단순무식을 그렇게도 단순무식한 방식으로 드러내서 이중으로 놀랐다. 어떤 사람은 순망치한,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사자성어를 동원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검사는 입술이요 판사는 이빨이라는, 이해관계가 매우 밀접해서 서로 가끔 질투를 할지언정 떨어질 수는 도무지 없는 사이라는 얘기이다.

입술이 없어지면 안 된다는, 그런 큰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오직 그 한 가지 생각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는 해석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렇게도 단순하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만큼 다급해 있었고, 그만큼 흥분해 있었다는 얘기이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눈물이 쏙 나오게 사정없이 뺨을 후려치고 나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그런데 있어 버렸다. 내가 너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면 내 이익이 훼손된다. 고로 나는 너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나의 이런 판결에 대한 너의 소감을 듣고 싶구나 하는 뭐 그런 심사였던가 보다.

그는 아마 기뻤을 것이다. 자신이 내린 판결이 너무 흡족해서, 자기 자신에게 확인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런 불학무식한 질문을 자기도 모르게 던졌을 것이다. 소감이란 세상천치 모든 사람이 다 알다시피 꽃다발을 품에 안은, 기쁨이 넘쳐서 활짝활짝 웃고 있는 사람에게 주는 일종의 덕담이기 마련이다.

사람다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런 덕담을 그 판사는 징역 4년을 선고한 것도 모자라서 법정구속까지 시켜버린 자신의 피고발인에게 던졌다. 고로 그는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단언한다.

 

 ⓒ위클리서울/ 왕성국 기자

그가 사람다운 사람이 아닌 근거를 대기로 하자면 차고도 넘쳐서 숨이 가쁠 지경이다. 화초에 물주기를 허드렛일로 폄하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 부분도 그 하나이다. 오랜 세월 화초를 다뤄온 내 경험으로 보자면 어떤 품종은 하루라도 물을 안 주면 죽어버린다. 물을 필요 이상으로 자주 줘도 죽어버린다. 생명이란 이런 것이다. 면밀한 관찰과 판단 그리고 행동, 이런 삼각함수를 제대로 맞출 수 없는 사람은 생명을 관리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게 허드렛일이라고?

심각하게 따져 들기로 하자면 법이야말로 사실은 허드렛일에 속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상식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굳이 법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법이란 사람들 사이를 왕래하는 상식이 제대로 작동이 안 될 경우를 대비해서 정한 부가적 장치일 뿐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댄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오늘날의 법은 자신의 근간인 상식조차도 과감하게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법조문이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해석을 멋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오래 전에 만든 법을 폐기하지 않고 버려둔 데서 오는, 일종의 시대착오가 낳은 오류이기도 하다.

인생이란 묘하고도 묘한 것이어서, 거짓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거짓말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순간도 있다. 또한 거짓말이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화시켜주기도 한다.

자, 여기에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옆집 소녀를 밤마다 꿈에서 볼 정도로 좋아하지만, 좋아한다는 말을 명시적으로 하지는 못한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는커녕, 옆에서 친구들이 너 쟤 좋아하지, 하고 물으면 방방 뛰면서 아니라고, 절대로 아니라고 우긴다. 심지어 어떤 때는 내가 왜 저런 못난이를 좋아하냐고 따지기도 한다. 이 소년의 이런 거짓말은 어떤 법에 위반되는 것일까.

소감이 어떠냐고 물은 판사라면 아마 이 소년에게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한다고, 한 번도 아니고 열 번 스무 번 일관되게 거짓말을 해놓고도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 징역 4년에 벌금 오 억을 때렸을 것이다.

우리 마을에 노부부가 다정하게 살았는데 남편의 평생소원이 집을 현대식으로 짓는 것이었다. 집이 너무 옛날 것이어서 외풍도 많고, 부엌과 안방이 너무 멀어서 요리와 식사의 행복감이 반감되는 데다 화장실조차 밖에 있어서 겨울이면 너무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돈을 열심히 모으고, 또 모아서 마침내 집을 현대식으로 지었지만, 일 년이 채 안 돼서 남편이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새 집 짓기에 너무 열정을 쏟았던 탓으로 삶이 단축되고 말았다고 했다. 아무튼 혼자 남게 된 할머니에게 딸이 셋 있는데 세 딸이 모두 자기 집으로 어머니를 모셔 가고자 했다. 할머니는 어느 딸의 소원도 들어주지 않고 혼자서 꿋꿋이 먼저 떠나버린 남편이나 추억하며 살고 있는데 어느 하루 큰딸이 차를 몰고 와서 어머니를 우격다짐으로 차에 태웠다.

할머니는 떠밀려서 차에 탔다가 도로 내려오고, 차에 탔다가 다시 내려오기를 몇 번이나 하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떠나기 직전에 할머니가 나를 찾아오셨다. 집에 있는 개가 굶어죽지 않게 매일 한두 번씩 밥을 줘야 하는데 그 일을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면서 열쇠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개 사료를 밤이면 산에서 내려오는 야생동물이 죄다 먹어치우기 때문에 안방에 두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하여 나는 매일 아침과 저녁 무렵이면 할머니 댁으로 가서 안방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서 사료를 꺼내오곤 했다. 나의 이런 행동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마 굉장히 의아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수사기관에 신고를 할 수도 있다.

신고를 받은 수사기관은 당연히 나를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 시기에 마침 딸네 집에 가신 할머니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그래서 사실을 사실대로 증언해줄 수 없는 상태라도 돼버린다면, 나는 꼼짝없는 주거침입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수사관이 현명해서 공감능력도 뛰어나다면 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무혐의 처리를 하겠지만, 법조문에 명시된 주거침입 네 글자에만 매몰돼 있는 사람이라면 당당하게 재판으로 넘길 것이다.

판사는 현장의 수사관보다도 현장 사정을 모르고, 알아보고자 하지도 않는 그 직업의 특성상 나는 그대로 곧장 유죄 선고를 받고 벌금이든 징역이든 하여튼 단죄를 받아야만 할 것이고, 만약에 내가 일관되게 강한 목소리로 범법의사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면 판사는 ‘죄질이 아주 나쁘다’는 저 유명한 경구를 판결문에 적시해놓고 의기양양해 할 것이다.

피고인과 증인의 진술을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법정중심주의 재판 제도가 도입된 지도 꽤 됐지만, 우리나라의 재판은 여전히 검사의 일방적인 논고중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판사 개인의 편견과 그에 따른 심증, 예단에 종속되고 있음이 현실이다.

판사의 편견과 심증 그리고 예단은 정치적 성향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전관예우라는 저 막돼먹은 은밀한 관행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전관예우, 누가 맨 처음 이런 말을 쓰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참으로 후안무치한 단어이다. 예우란 뭔가 훌륭한 일을 했거나 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는 그야말로 예우, 즉 상을 말함이지 않던가.

변호사 시장에서 사용하는 ‘예우’는 우리의 일반상식과는 크게, 아주 크게 벗어나 있다. 있는 죄를 없애거나, 없는 죄를 있게 하는 기술이 뛰어나면 그 변호사는 이른바 떼돈을 번다. 현직 검사가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고, 판사가 돕지 않아도 안 된다. 현직에 있는 검사와 판사는 나중에 변호사 일을 할 것이고, 그러면 그때 자기도 떼돈을 벌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로 그것은 전관예우가 아니라 전관도적이요 강도라 해야 맞다. 감히 예우라는 단어를 붙여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변호사 업계의 연간 매출이 이십 조를 넘었다는 얘기를 들은 지도 벌써 삼사 년 전이다. 지금은 아마 삼십 조에 육박하고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중에 사분의 일 정도만 변호사협회에 신고가 돼서 세금을 낸다는 것이다. 사분의 삼은 신고고 세금이고 나는 몰라, 하고 대충 넘어가는데 그 중에 태반이 전관예우라는 이름의 전화변론 내지는 술집변론, 등산변론, 골프변론 등등으로 은밀하게, 내밀하게 이루어지 때문에 귀신도 알 수가 없고, 귀신보다도 정보에 밝은 주변 브로커들만 알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 이런 세상을 살고 있다. 고로 나는 소망한다. 착취와 모략이 일상화돼서 감각조차 없어져 버린 법기술자들이 일망타진되는 그날을.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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