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만화 차원을 넘어 민주⋅민중⋅민족운동을 위해 시사만화를 방편으로 활용”
“단순한 만화 차원을 넘어 민주⋅민중⋅민족운동을 위해 시사만화를 방편으로 활용”
  • 한성욱 선임기자
  • 승인 2021.01.0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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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박재동 시사만화가-3회

[위클리서울=한성욱 선임기자]

<2회에서 이어집니다.>

박재동 시사만화가 ⓒ위클리서울/ 한성욱 선임기자
박재동 시사만화가 ⓒ위클리서울/ 한성욱 선임기자

- 민중미술은 현실이자 삶이다. 뿌리를 못 내린 이유는.

▲ 외국에는 많은데, 우리나라만 없다. 특히 6.25 전쟁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그런 게 없어졌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미술은 절름발이 미술이다. 현실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사회 현실과 아픈 곳을 외면했다. 그러면서 노동자 고통이나 민중의 아픔은 볼 수도 찾을 수도 없었다.

화가들은 입시지옥에 고통받는 학생들의 아픔이나 여성과 장애인들이 겪는 아픔 등 그 어떤 것도 그릴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 민중미술 태생은 1979년 겨울에 일군(一群)의 화가들이 ‘현실과 발언’이라는 제목으로 현실을 반영한 미술운동에서 비롯됐다. 미술에 현실(現實)을 이야기하자, 미술에 현실이 없다는 각성이 일었다.

우리에게 분명히 현실이 있는데 왜 말을 못 하나, 이것을 토대로 한국에도 민중 미술운동 붐이 한때 뜨겁게 일고 있었고, 당시 문예진흥원에서 ‘현실과 발언’이라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을 받으면서 전시회를 열지 못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 의외로 미술이 사람들을 일깨우는 힘이 강하다.

▲ 군부정권의 억압을 피해 할 수 없이 전시회를 다른 곳에서 열었다. 젊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는 ‘와, 미술이 이런 것도 다루네’라는 것을 눈뜨게 됐다. 그전엔 우리 사회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농민이나 민중의 아픔을 알지 못했다.

전시회를 통해 정권에 대한 불만을 표현해도 된다는 인식이 점화하면서 불길같이 타올랐다. 노동현장에 대한 목소리나 농민, 농촌, 광부, 노동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민중미술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 나는 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는데 내 친구 화가들이 그런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과 발언’에 자연히 몸을 담고 활동을 함께 했다.

그때 민중과 같이 가는 데 가장 효율적인 것을 ‘만화’(漫畫)라 생각했다. 당시에는 민족미술과 민중미술이 대중화했던 시기였고,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할 때였는데, 화가인 박불똥 후배의 권유로 한겨레신문사에 시사만화 부문에 응모했는데 운 좋게 합격했다.

 

- ‘현실을 말하는 것’이 금지됐던 시대에 정보기관 사찰은 없었는지.

▲ 나는 단순히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 시사만화를 그린 게 아니고, 그 당시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만화라 생각했다. 또 ‘현실과 발언’의 한 일원이었기 때문에 현실 고발을 나름대로 펼칠 수 있는 방편으로 시사만화를 그렸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 고인이 된 오윤(吳潤)이라는 걸출한 판화가와 민중미술 선구자 김윤수 선생과 유홍준 교수가 이론을 세웠고, 시인 김지하 선생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때는 민족분단의 아픔 해결과 민족, 민중,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민족미술과 민족예술 각 분야 인사들이 모여 결성한 민예총을 만들었다. 남북교류사업도 하고, 지금도 있는 민족미술협의회에서 회장을 맡기도 했는데, 국정원에서 나를 사찰한 것이다.

 

- 시사만화가 탄압도 심했다.

▲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1960년대 당시만 해도 가장 자유로웠던 게 만화였다. 동아일보 김성환 선생의 ‘고바우 영감’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갈수록 군부정권의 탄압을 많이 받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 고바우 영감 만화 중 경무대(현 청와대) ‘똥통 사건’이 유명했다.

어느 날 변소(화장실) 치우는 사람이 똥지게를 지고 지나갔다. 그때 높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하는 걸 보고, 사람들이 ‘저 사람이 누구길래’ 물으니 ‘경무대에서 똥 푸는 사람이래’ 처럼 풍자만화를 통해 위세를 부렸던 권력자들을 비판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때부터 김성환 선생이 권력의 눈 밖에 났다.

박정희 정권 때는 정보부가 계속 감시하고, 따라다니며 행패를 부리고 오만 짓을 다 했다. 그래도 선생은 꿋꿋이 버텼다. 전두환 정권 초기에는 신문사 편집국까지 들어온 군인들에 의해 사전에 만화검열을 당했다. 군인들이 ‘두 개 그려와’, ‘세 개 그려와’ 등 말할 수 없는 치욕적인 욕까지 듣기도 했다.

 

- 당시 만화의 영향력, 어땠는가.

▲ 군부정권에서 소극적인 저항도 있었다. 호남의 한 일간지에 ‘까투리 여사’를 그린 윤영옥 작가가 있었는데 만화에 나오는 여사는 항상 얼굴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닌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로 항상 붙이고 다닌다. 그때는 신문 외에는 정보를 얻을 곳이 전혀 없었다.

신문이 가장 주도적인 매체였고 활발했는데, 그래도 그 안에서 딱딱한 기사가 아닌 삶과 유머, 해학 등을 보여준 건 만화였다. 사회적으로 만화가 중요했다. ‘오늘 고바우 만화 봤니’ 이런 이야기들이 대화의 테마가 될 정도였고, 그 당시는 신문 자체가 많아야 대판 16면 정도로 면수가 적었고 활자도 작았다.

어쨌든 네 컷 만화나 한 컷 만화가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나중에 나도 창간 당시 한겨레신문사에 들어가 만평을 그렸지만, 그때는 인터넷, SNS 등이 없었기 때문에 만화의 위상이 지금과 달랐다.

 

- 현재 경기신문에 연재하는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 만평이 이목을 끌고 있다. 일부 매체에서 만평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 지금은 유튜브가 나오고 인터넷과 1인 미디어 등 다양한 SNS가 쏟아져 나왔고 급기야 종편방송까지 나온 데다 볼 게 워낙 많아지면서 신문의 시사만화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일반 시민들의 감각과 풍자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굉장히 앞섰다는 점이다.

수준도 워낙 높다. 과거의 시사만화라는 게 옛날 1960~1990년대까지만 해도 영향력이 상당히 컸는데, 지금은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 일부 인터넷 신문과 내가 연재하고 있는 경기신문 등 지방신문에서 맥을 이어가고 있다.

 

- 시사만화는 언론사 논조와 맞아야 할 것 같은데.

▲ 시사만화는 계속해서 꾸준히 연구하며 그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다음에 세상을 보는 시각과 남다른 식견이 요구되는 직업이다. 대개 시사 만화가들은 진보적이고 비판적이다. 그래야 독자들이 궁금해서 본다.

그런 성향 때문에 때때로 언론사 매체 성격과 마찰을 빚기도 한다. 매체에서 만화가를 뽑았는데, 자신들의 논조와 맞지 않는 만화를 그리게 되면 쉽게 쫓아내지도 못하고 서로가 곤란해진다. 2002년 동아일보를 퇴사한 손문상 화백이 그런 경우였다.

나중에 부산의 한 일간지로 옮겨서 그리게 되었는데 보수적인 신문사와 논조는 달랐지만, 재미가 있었고 인기가 높아 한때 계속 잘 나갔다. 그런데, 신문사가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선언을 해버리는 바람에 결국 중도에 퇴사하고 말았다.

 

- 국내 신문 시사만화 동향을 말한다면.

▲ 지금은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에서 네 칸 만화가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다. 요즘은 인터넷 신문에도 좀 있다. 언제부터인지 국내 3대 일간지 등에서 만화가 점차 사라지면서 시사만화에 관심도 줄어들었다.

 

- 평소에 좋아하는 그림과 좌우명이 있다면.

▲ 내가 농촌 출신이어서 ‘밀레’와 ‘고호’를 좋아한다. 시사 만화가로서 좌우명이 있다면, 과거 한겨레신문사에 있을 때, 다섯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 첫째도 팩트, 둘째도 팩트 △ ‘역지사지’ - 비판의 칼을 갖고 있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휘두르면 안 된다. △ 인신공격을 안 한다. –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만 말할 뿐, 그 사람 자체를 나쁘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 훗날 역사의 법정에 섰을 때 그림에 대해서 말 수 있어야 한다. △ 오보했을 때 신중히 사과한다 등이다.

과거에 만화 때문에 사과를 한 예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가 수도권 급수원인 팔당댐 오염에 축산분뇨가 원인이라는 그림 때문에 축산업자들이 공장폐수도 있는데 왜 우리만 나쁘게 보느냐는 반발과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만평에 삼천포 사람들이 거세게 항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신문에 사과문을 즉시 공고하기도 했다.

 

- 25년 만에 재개한 ‘시사만화가’로서 올해 계획과 독자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다면.

▲ 한겨레신문에서 8년 시사만화를 그렸고, 그 후로 생각지도 않았다가 25년 만에 경기신문사 제의로 흔쾌히 시사만화를 하게 됐다. 신축년 올해도 시사만화를 주업으로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소소하게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지만, 다 할 수는 없다.

앞으로 내 나름대로 개인 또는 그룹전을 계획하고 있는데, 시사 만화가라 생각하지 않고 화가로서도 순수회화를 생각하고 있다. 친구들과 전시회를 열려고 했는데, 막상 또 시사 만화가가 되어 보니 아무래도 전시회 규모도 적어질 것 같다. 그래도 하고 싶다.

거창하게 하기는 어렵다 할지라도 쉽지 않겠지만 조금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더 집중하고 싶다. 시사 만화계에 달리 할 말은 없지만, 바람이 있다면 신문사가 시사만화가 ‘대접’을 잘하고, 만화 컷 크기도 좀 키워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과거에는 신문이 8면, 16면으로 얇았기 때문에 지면이 적어서 만화 크기가 작았다.

좀 더 컸으면 독자 눈에 더 어필할 수 있겠지만, 이것을 만화가에게 말할 수는 없고 신문 편집자가 그림을 좀 키워주면 훨씬 시원해질 것 같다. 요즘은 신문지면 수도 많고. 또 인터넷이나 SNS에서 좀 더 활성화됐으면 하는 기대가 크다. 

 

박재동 시사만화가

1952년 울산
서울 휘문고, 중경고 교사 역임
1988~1996년 '한겨레 그림판'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학과 교수
전 부천만화축제 운영위원장
저서 : 목 긴 사나이, 만화 내 사랑, 한국만화의 선구자들,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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