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날이 되자, 첫 영화제가 열린 도시로 도망쳤다
첫 날이 되자, 첫 영화제가 열린 도시로 도망쳤다
  • 김혜영 기자
  • 승인 2021.01.26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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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탐방기] 강릉국제영화제 1편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글을 쓸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누가 이 글을 읽을 것인가. 타겟이 되는 독자의 범위를 줄여야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용이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글을 누군가 읽는다는 사실 자체에 여전한 놀라움과 무한한 감사를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 쓰는 글은 벌써 여섯 번째를 맞은 영화제 탐방기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지루해지지 않게끔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간다. 대학생에서 대학원생이 된 필자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켜켜이 쌓여 성숙해질 수 있는 이 긴 여정에 함께해주시길 바라본다.
 

 

영화제를 갈 것인가, 연애를 시작할 것인가

1편에서는 늘 어떤 영화제에 방문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쓰게 된다.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갔다거나 교수님께서 수업 대신 영화를 보고 오라고 말씀하셨거나, 그 이유는 늘 제각각이다. 어쨌든 영화와 영화제를 사랑한다는 공통의 마음이 가장 큰 원동력이지만, 이번 강릉국제영화제를 다녀온 데에는 조금 허무하고 이상한 이유가 있다. 바로, 영화제를 다녀오기 전 날에 연애를 시작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민되는 것이 많았다. 재작년인 2019년엔 전국의 영화제를 다니느라 이미 많은 비용과 시간을 쓴 상황이었고, 아직 영화제의 정체성마저 정해지지 않은 제 1회의 영화제를 갈 충분한 이유가 없어보였다. 유구한 역사와 독창적인 정체성을 지닌 다른 영화제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제 1회라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첫사랑, 첫 입학, 첫 걸음마처럼 누군가의 처음은 내 것이 아닌데도 특별한 데가 있어서 지켜보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날의 연애도 마찬가지였다. 늘 잘 알던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발전하는 연애를 해봤지, 다짜고짜 접근하는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거나 알게 된 지 6개월도 되지 않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해본 적이 없었다. 무섭고 잔인한 세상에 조심성이 많아져서도 있지만, 성격이나 가치관을 중시하는 편이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감정이 생길 수 없어서였다. 그런 나에게 이 모든 기준을 뒤흔드는 인연이 찾아왔다. 학교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이긴 하지만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고, 수업 때문에 방문한 전시회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고,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짧은 대화로도 좋은 사람임이 충분히 느껴졌다. 모든 기준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인연이라서 나도 모르게 전화번호를 줘버렸고, 몇 번의 연락과 만남 끝에 고백을 받아버렸다. 영화제를 갈 것인지, 연애를 시작할 것인지. 처음 겪는 기준들 속에서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외지인과 도시가 맺는 유대관계

고민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은 마음이 이끌리는 걸 막을 도리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백을 받았고 영화제에도 갔다. 다만 그 결정의 순서가 조금 의미심장하다. 우선 고백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받아버렸는데, 이 결정으로 인해 생길 모든 변화들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솔로의 삶에 만족도가 컸고 연애 때문에 생기는 감정, 에너지, 시간 등의 소모와 삶의 지각 변동을 덜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고백을 받자마자 내일 당장 영화제에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물리적으로라도 연인이 된 사람과의 거리를 벌려야 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 심사숙고해도 결정은 늘 충동적일 수밖에 없고, 어떤 좋은 결정에도 무언가를 포기하는 아쉬움은 남기 마련이다. 나는 사랑을 시작하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기에, 좋은 예감과 기대가 큰 만큼 그 사랑을 시작할 나에게 유예와 휴식을 주고 싶었다.

결국 누군가와의 첫 날을 맞이하자마자 첫 영화제가 열린 도시로 도망쳤다. 앞으로 내 삶과 일상의 많은 것이 변할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듯, 강릉 역시 큰 축제의 시작에 대한 기대와 긴장이 느껴졌다. 영화제를 방문할 때마다, 영화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서점이나 바닷가 같은 곳에서 영화제 개최를 축하하는 현수막과 정보를 알리는 팜플렛이 발견되는 순간을 좋아한다. 한 도시가 공통의 무언가로 엮여있다는 감각이나 축제를 기대하고 즐기는 데서 오는 움트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외지인인 나와, 내가 방문한 도시가 지금 이 순간 같은 감정과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그 황홀한 정서는 아주 오래 남아 두고두고 찾아올 외로움과 싸워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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