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우리집이 눈에 파묻혀 간다
우리집이 눈에 파묻혀 간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올해는 눈이 참 많다. 희끗희끗한 눈발이나 몇 번 인색하게 비치다가 말다가 금년 눈은 이제 끝, 해버린 작년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렸고, 내리고 있다.

작년에는 사실 어리둥절했었다. 이렇게도 눈이 없단 말인가? 고창에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눈이 많은 곳으로 유명했다. 겨울이면 밤마다 뒷산에서 소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뿌직, 뿌직 들려오곤 했었고, 먹을 것을 찾을 수 없는 토끼와 노루가 마당으로까지 진출하는 게 다반사였고, 장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꽤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이듬해 봄 눈이 녹은 뒤의 논고랑창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당시 분패라는 말이 있었다. 눈이 내릴 때 바람까지 세게 불면 붙이는 이름이다. 표준어로는 아마 눈보라가 맞겠지만, 어쨌든 우리 고장 고창에서는 분패라고 했다. 분패가 일어나면 내리는 눈이 내린 자리에 있지를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아니 날아다닌다. 뛰고 날고 하던 눈이 농수로 같은 낮은 곳을 만나면 거기에 머물고, 그 위로 또 다른 눈이 날아와서 쌓이기를 되풀이하면 그곳이 바로 죽음의 장소가 된다.

시장에 갔던 사람이 돌아오는 길에 분패를 만나면 길을 잃고 헤매게 되고, 헤매다가 어느 순간 발 한 번 잘못 디디면 푹, 하고 빠져 들어가서 다시는 나올 수가 없게 돼버린다. 이때 강치라는 이름의 한파라도 몰아치면, 그는 눈 속에서 얼음덩이가 되어간다. 집에서는 장에 간 사람이 안 돌아온다고 찾아 헤매지만 찾아낼 방법은 없다.

 

눈이불을 덮은 소나무
눈이불을 덮은 소나무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바 없는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으며, 혹은 구경하며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됐을 때 상상력이 제법 번창해 있기 마련이다. 고난과 시련은 진화의 동력이요 에너지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며, 지금 이 시대가 아닌 까마득한 옛 시절로 쑤욱 들어가기도 하고, 옛날이야기에도 등장하지 않는 미래 세계에 관심을 집중하기도 한다.

초등하교 시절에 나는 만화책에 푹 빠져 있었다. 최영 장군이 깊은 산속에서 홀로 왜구 수백 명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스토리는 지금 생각해도 지루하지가 않다. 미국 전투 비행기와 일본 전투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에서 서로에게 기총소사를 해대다가 다함께 바닷물에 빠지는 장면은 또 어떤가.

그런 다이나믹한 스토리에 푹 빠져 있는 내게 해인가 느닷없는 무슨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을 외워 오라는 숙제가 주어졌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나 뭐라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것은 정말이지 재미가 없었다. 재미없는 그 짓을 내가 해야 할 이유는 도무지 없었다. 숙제도 어지간해야 할 맛이 나는 거지, 할 맛은커녕 쳐다도 보기 싫은 그 짓을 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이유 없는 짓을 안 했다는 이유로 주어진 체벌은 어마무시한 것이어서, 내 손바닥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남자 선생님이라면 그나마 쬐끔, 아주 쬐끔 이해라도 하겠는데 긴 생머리가 치렁치렁해서 파초를 연상케 하는 여선생이었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그녀가 삼십 센티미터짜리 대나무 잣대로 내 손바닥을 후려치기 시작하는데 아팠다. 너무 아파서 아이 시벌,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대나무는 허리가 휘고
대나무는 허리가 휘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러자 그녀는 나를 죽이겠다는 듯이, 오늘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성이라도 갈겠다는 듯이 치고, 또 치고, 또 치고를 반복했다. 그나마 잣대를 납작하게 해서 때렸다면 손바닥이 찢어지는 사태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으련만,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졌다고 모로 세워서 뾰족하게 내려치기를 반복하니 피범벅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학교에 매력을 잃었다. 개근상 아니면 최소한 정근상 정도는 타던 내가 학교에 간다고 집을 나와서 산으로 강으로 쏘다니기를 되풀이하니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하루도 아버지의 큰소리가 안 터지는 날이 없었고,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안 나오는 날이 없었다. 우리 집은 그렇게 지옥이 돼 갔다. 집구석을 지옥으로 만든 원흉인 내가 집에 있을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없어 보였다.

집을 나와서 헤매기를 십몇 년이나 했던가. 어찌 어찌 당도한 것이, 참으로 어렵게,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자리가 그곳이었다. 처음부터 계획을 세우고 한 짓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야말로 우연히, 어느 하루 문득, 갑자기, 나도 소설 같은 것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의문은 곧 가능성으로 바뀌었다.

그때가 바로 최루탄과 백골단에 쫓기던 김귀정 학생이 퇴개로 뒷골목에서 압사당한 즈음이었다. 최루탄에 맞아죽고, 곤봉에 맞아죽고, 물고문으로 희생당한 학생이 있은 뒤에 끝내는 그렇게, 마구 밀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넘어진 채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밟혀죽은 사람까지 있어버린 그 사건이 내게 준 떨림은 가혹했다.

 

두충나무는 의연한데
두충나무는 의연한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사실은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물론 김귀정 학생이 들어간 골목과 내가 들어간 골목은 달랐다. 그러나 결국은 한 걸음 차이였다. 서울역에서부터 계속 쫓기다가 아무 골목으로나 들어간 것이니, 인연이란 것이 끔찍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면 내 발이 죽어가는 김귀정 학생을 마지막으로 밟았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뒤로 또 얼마나 세월이 흐른 뒤에, 한 유명 소설가는 나를 일 년 안에 데뷔시켜주겠다고, 자기 집에 와서 사숙을 하라고 했다. 일 년? 일 년이라니. 문학판 데뷔라는 것이 그렇게도 쉬운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쉬운 것은 싫다, 하는 결론이 너무도 쉽게 나왔다. 무엇보다 그 당시 내게 중요한 것은 데뷔다 뭐다 그런 외양적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무엇인가를 잡아내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문학판의 이른바 공모전 당선 여부는 정치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여겨진다. 물론 지금도 나의 그때와 같은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삼십 년 전에는 그랬다. 그 방면으로 감각이 유별나게 발달된 작가나 시인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리다 보면, 당선이라는 보상이 주어질 수도 있다. 물론 그 뒤의 일은 당선자 본인의 창의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나를 일 년 안에 데뷔시켜 주겠노라 공언한 그 양반은 그 방면으로 감각이 매우 발달된 사람이었다. 요즘 말로 치자면 아마 빨간펜 선생님쯤 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매년 1월이면 네다섯 명쯤의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양주병을 들고 그 양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내가 어떤 신춘문예의 최종심에서 떨어졌을 때 그는 왜 원고를 자기한테 보여주지도 않고 멋대로 응모를 했느냐고, 마치 무슨 죄인이라도 다루듯이 취조를 했다. 그때 알았다. 문하생의 모든 작품을 응모 전에 그가 고쳐준다는 것을.

 

목화송이가 이만할까
목화송이가 이만할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오리지널하게 습작품이라면야 뭐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말이 되느냐난 식의 지적을 수도 없이 당하고, 고침을 당하는 과정을 수도 없이 거치면서 자기 자신의 오류를 깨달아가는 것, 습작의 과정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자면 아마 그런 것쯤 될 게다. 그런데 공모전에 응모하는 작품까지 심사위원의 관심사에 맞게 고쳐준다?

생각만으로도 그것은 하품이 나왔다. 비유를 하자면 그것은 마치 자식의 나이 마흔 살이 넘었을 때까지도 부모가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는 것과도 같은 일이라 여겨졌다. 그리하여 나는 자연히,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 그룹과 멀어지게 되었다.

혼자서 고군분투, 구십 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간신히, 이름도 희귀한 무슨 문학상이란 이름으로 소설 하나를 일간지에 연재하고 났을 때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현대문학이란 이름의 문예지를 통해서 얼굴을 내민 시인이었고, 현대문학과는 전혀 이질적이라 여겨지는 오일팔문학상을 받았다고 힘주어 말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정확히 2000년도 2월 말인가 3월 초인가, 때 늦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덜컹덜컹 소리도 요란한 고물 트럭을 몰고 나를 찾아왔다.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어서 빨리 옷 입고 양말도 신으라는 등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고창의 옆 동네 영광에서 무슨 문학단체 결성식인가 뭔가 행사가 있는데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문학단체라는 말부터가 피곤해서 나는 쓴입맛이 다셔졌다.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현수막 걸어놓고 사진 찍는 풍경이 하나도 부럽지 않고 피곤해 보이기만 해서 그때까지 내 생애 딱 한 번 참석해본 것이 전부였다. 한 번 얼굴을 내민 뒤로 다시는 이런 데 얼씬거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던가 어쨌던가. 하여튼 문학관련 단체 같은 데 회원으로 가입한 적은 당연히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뭐랄까, 그리 먼 데도 아니고 바로 옆 동네이니 가서 소주나 한두 잔 얻어 마시자는 생각으로 따라나섰다.

그날 그 자리에 이낙연이라는 사람이 왔다. 막걸리를 마시는 자리에서 그 자신이 토로하는 바에 따르면 김대중 총재의 눈에 들어서 몇 번인가 면담을 했고, 동아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영광군 국회의원 후보로 곧장 찍힘을 받아서 내려왔다는 거였다. 그날 그와 악수를 했는데, 그 손의 무게와 두께가 낯설지 않았다.

 

배롱나무에 흰꽃이 폈다.
배롱나무에 흰꽃이 폈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햇솜 같은 모습
햇솜 같은 모습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세상에 태어난 이래 수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했지만, 손의 무게와 두께로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물론 손이 너무 작고 따뜻해서 기억에 남는 사람도 있고, 손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솜털처럼 부드러워서 기억에 남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손이 겁나게도 두껍고 무겁게 느껴져서 그때까지 내 기억에 남은 사람으로 첫째 김대중 총재가 있었고, 둘째 김종필 총리 또는 총재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또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이낙연이란 이름을 가진 그가.

그는 그 해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연히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을 의심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딱히 무슨 과오가 없었기에 다음 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연히 당선되었고, 그 뒤로도 선거만 치렀다 하면 당선, 또 당선을 해서 도지사 자리에까지 올랐고, 급기야는 중앙국정의 2인자 자리로까지 부름을 받는가 싶더니 차기 대통령 후보 1순위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전라도 출신 정치인이 대통령 후보 1순위로 거론되기 시작했을 때 전라도 사람들은 당연히 박수를 쳤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글쎄, 글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글쎄라는 의구심이 붙는 이유는 첫째 부잣집 도련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돌파력이 약한 관리형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돌아보면 그는 정치인 중 드물게 큰 시련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 점은 아마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에서 기록할 만한 대목일 것이다. 동년배의 진보 계열 정치인들이 대부분 군부독재에 맞서는 활동을 치열하게 했거나, 생각이 불순하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감옥을 살았거나, 빈민운동을 했거나 등등 자기 개인의 행복이 아닌 우리 모두의 행복에 방점을 두고 아픔과 시련을 마다지 않았던 점에 비하자면, 그는 확실히 말썽 한 번 부리지 않고 곱게 성장해 온 부잣집 도련님 같은 이미지가 꽤 진하게 어른거리는 정치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범죄자를 전직이 대통령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용서해주자는 이른바 관리형 발언을 해서 회초리질을 당하기 시작했다. 회초리 중에서도 가장 매서운 회초리는 전라도에서 나왔다. “우리가 남이가” 따위 부족주의 정치가 아직도 횡행하고 있는, 내 고향 사람이니까 무조건 밀어준다는 풍토가 만연한 대한민국에서 전라도 사람들의 정치의식은 역시 훌륭하다고, 뛰어나다고, 이렇게 말하면 자가당착일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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