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은 사람을 통해 완성된다
풍경은 사람을 통해 완성된다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1.02.01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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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히말라야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풍경이 아름답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을 때 내가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추위밖에 없다. 거대한 산맥의 봉우리들 사이에 놓인 캠프에는 작은 숙소 몇 채가 있었고 온통 눈으로 뒤덮여 아름다웠지만 추웠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산악인들은 이곳에서 등반을 준비한다고 했다. 그래서 베이스캠프라고. 그러나 일반인은 이 이상 나아갈 수 없다. 체력은 고사하고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른 허가가 필요할뿐더러, 봉우리들 사이에 고여 있는 듯 자리한 이 캠프를 넘어서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렵다. 이미 높은 곳에 올라와서일까, 영화에서 산소통을 등에 지고 얼어붙은 얼굴로 생존을 걸고 등반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곳이 저 곳이라니. 내가 지나온 길은 그저 5배 정도 커진 지리산처럼 느껴졌을 뿐인데. 가파른 고산이 앞에 있다. 내가 하루를 보낸 캠프로부터 산악인들이 숱하게 얼어 죽었을 고산지대는 눈앞에 있어 가까운 동시에 잘 상상되지 않아 아득히 멀었다. 보이지만 상상할 수는 없는 것. 여전히 히말라야는 멀다.

영하 20도의 캠프는 지금 생각해보면 놀랄 만큼 춥지는 않은데도 난방시설 전혀 없이 낡은 침대뿐인 방은 놀랄 만큼 추웠다. 침낭 속에서 들어가 마지막으로 남은 핫팩을 꺼내 눌렀다. 투명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사 넣어 침낭 안에 놓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4일 간의 등산 끝에 도착한 마지막 종착지에서 나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곳이 히말라야구나. 여기가 내가 갈 수 있는 끝이구나. 그저 추울 뿐. 풍경은 가만히 있다. 무언가 더 대단해야할 것 같은 산맥은 더 웅장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식으로 버티고 서 있다. 이른 저녁 식당에서 고산병에 좋다는 마늘차를 마시고 별을 구경하다 침낭 속에서 잠들었다. 등산을 함께 한 일행들은 롯지에서 파는 참치를 넣은 비린내 나는 피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절대 참치 넣은 피자는 먹지 말라고 이야기할 거라고. 여행자들을 위해 가이드나 짐을 들어주는 포터의 역할을 하는 네팔 사람들은 식당 칸에 모여 얇은 옷에 담요를 두른 채 모여 잤다. 우리 일행과 함께한 포돔과 아비셰, 차크라도.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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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내가 네팔에 온 이유는 히말라야 때문이었다. 멀리까지 왔는데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있다는, 8000m가 넘는 산들이 가득하다는 그 산맥을 한 번 내 눈으로 보고 걸어보고 싶었다. 일반인들이 등산할 수 있는 코스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산맥 자체는 네팔 전체에 자리한 만큼 드넓고, 보통 수도 카트만두 쪽에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쪽으로 가거나 포카라에서 안나푸르나 주변을 등산한다. 많은 사람들이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 같아 나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가기 위해 인도에서 네팔의 포카라로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 육로로 국경을 넘어 왔다. 안나푸르나의 등산코스는 비교적 간단하다. 봉우리들에 둘러싸인 계곡을 쭉 따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가거나, 안나푸르나 옆, 마차푸차레 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올라가 걷거나, 아예 안나푸르나봉을 가운데에 두고 한 바퀴를 도는 안나푸르나 서킷. 서킷은 이를테면 지리산 둘레길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짧으면 2주 길게는 한 달까지도 걸리며 5000m가 넘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들었다. 나는 베이스캠프로 가는 6박 7일의 일정을 선택했다. 겨울에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해서 코리안 루트라고 현지에서 불리기도 한다는 그 루트로. 몇몇 경험 때문에 여행 중에 한국인 무리를 따라다니는 걸 개인적으로 선호하지는 않았지만 긴 등산이 간단치는 않을 것 같아 한인 게스트하우스에서 장비 도움을 받고 한국인 일행들을 구해 함께 일정을 잡았다. 일행들은 가이드 겸 포터를 겸하는 분들을 여행사 통해 구해서, 허리 쪽에 문제가 있었던 나도 내 짐의 반 정도를 가이드 포돔에게 맡기고 등산하기로 되었다.

풍경에 압도되지 못해서 그런지 등산 중에 산을 많이 즐기지는 못한 것 같다. 내 짐도 다 짊어지고 오를 수 없는 산이라면 꼭 와야만 했을까하는 생각이 왕왕 들었다. 이 풍경을 위해서? 사람들이 부러 가이드와 포터를 섭외하는 것은 몸에 무리를 줄여 산을 여유롭게 등산하기 위함일 텐데, 또 그건 일종의 좋은 비즈니스일 텐데, 그 관계가 솔직히 어색했다. 함께 했던 포돔, 차크라, 아비셰와 우리는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잘 드러나지는 않을 뿐인 분명한 위계 속에 있었다. 그들은 분명 그들의 일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미래에는 정상까지 등반할 수 있는 셰르파를 꿈꾸는 네팔 청년들이었지만 우리가 풍경을 즐기기 위해 그들이 받치고 나아가는 짐의 무게가 내게는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한 나라의 지리와 역사와 문화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으니 무리한 상상이긴 하겠으나 사람들은 히말라야가 네팔에 없었다면, 결코 네팔에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우연히 거대한 산이 거기에 있었고, 우연히 거기에 사람들이 살았으니, 산 구경을 위해 당신들은 우리를 좀 도와라. 사람들은 산맥의 웅장함과 등산의 방식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도 네팔의 산을 자랑스러워하는 네팔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국의 자연을 체험하는 일은 물론 값진 일이 될 수 있다. 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히말라야 산맥을 등산할 수 있는 경험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될 수도 있다. 일주일간의 산행을 통해 스스로를 이겨나가는 작은 성취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산 자체를 남다르게 좋아하는 건 아니었던 내게는, 자연의 얼굴이 인간의 얼굴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 같은 상황이 무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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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나푸르나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산 속의 마을들이다. 한국의 산들과 네팔의 산들의 차이점이 높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을 등산하다 중간에 사람 사는 마을을 만날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는 마을에서 마을로 등산로가 이어졌다. 정확히는 그들의 길이 곧 등산로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히말라야 산행은 적어도 며칠은 걸리고, 등산객들은 잠을 자며 위로 나아가야 한다. 네팔 정부는 산 속 마을들의 집 몇 군데를 지정하거나 새로 만들어 등산객들이 자고 먹고 갈 수 있는 롯지로 정해 지정된 음식을 지정된 가격에 팔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의 직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에서 몇몇 마을들을 지나쳤다. 아래에서 위로. 사람이 있는 곳에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하는 등산로에서 보았다. 물소와 당나귀들. 계단식 논밭. 평상에서 장난치는 아이들. 다시 짐을 운반하는 당나귀의 무리. 그 뒤로 머리로 질 수 있는 끈을 달아 가늠할 수 없는 무게를 받치고 짐을 나르는 포터들. 좋은 등산화들 옆에 포터들 맨 발에 슬리퍼. 그들이 오는 기척이 들리면 옆으로 꼭 길을 내어주세요. 등산객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 씨가 있고 잎도 달린 귤을 파는 마을 사람들. 오렌지. 오렌지. 바구니에 가득한 오렌지. 팔리지 않는 오렌지. 무언가를 태우는 사람들. 연기. 이제 눈과 얼음이 보이기 시작하고. 네팔의 도심은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거나 눈이 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산을 오르면 날씨의 변화가 꼭 계절의 변화 같다. 봄에서 여름을 건너뛰고 가을이 되었다 급하게 겨울이 되는. 초록 풀숲에서 대나무 밭, 넘어가면 사람 없는 돌무더기와 얼음과 눈. 여름에 오면 아래쪽에는 꽃이 가득하다고 했다. 더 올라가지 않고 마을에 있고 싶었다.

등산을 시작한 것이 연말이었기 때문인지, 우연히 촘롱이라는 마을에서 큰 규모의 축제를 볼 수 있었다. 근처 마을 사람들이 무대를 만들어 놓고 각 씨족의 춤을 추는 댄스 콘테스트 같은 느낌이었고, 명목상은 티베트 불교 축제라고 했다. 가파른 경사로 이어지는 마을의 몇 안 되는 완만한 지대에 공연무대는 생각보다 작지 않았다. 예전에 어릴 적 유원지에서 놀았던 것처럼 간이부스에서 음식을 팔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후원을 해준 여러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반복해서 호명하는 데만 거의 1시간이 걸리는 걸 보며, 초등학교 행사 때 연단에 길게 늘어선 귀빈들의 뻣뻣한 자세와 의례적인 박수갈채를 떠올렸다. 깜깜한 밤에 화려한 색의 전통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빙글빙글 춤을 췄고 주위의 북적거리는 인파들은 추워서인지 한 잔해서인지 붉어져 갔다. 청년들이 화투를 치듯 구석에 모여 작은 도박판을 벌이고, 늙은 경찰은 뒤늦게 나타나 제지를 하고. 연말다운 연말이었다. 그 밤 가이드 포돔과 대화다운 대화를 처음 나누며 네팔 사람들은 몇몇 씨족으로 나눠져 있으며 서로 언어가 아예 다르기도 하고 생김새와 문화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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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하나기에 하산할 때도 같은 길로 내려온다. 원래 우리는 축제가 열렸던 그 마을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숙소가 다 찼다고 해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한 채 남은 작은 롯지에 묵었다. 하산인데다가 고도도 충분히 낮아져 술을 조금씩 마실 수 있었다. 무사히 다녀왔다는 안도감에 편안했다. 식당 안에서 적당히 취해갈 때 바깥에 나가보니 롯지 주인 할머니와 가이드 포돔, 차크라, 아비셰가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네팔 전통술 락시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나를 보곤 와서 앉으라고 권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눴고, 불 앞에 가만히 앉아 술을 얻어먹는 게 좋았다. 그 술 맛이 어땠었나. 잘 모르겠다. 주황색과 노란색으로 섞여 타는 불의 온기만을 뚜렷하게 기억할 뿐이다.

포돔은 할머니가 이곳에서 나고 자라면서 이 길의 끝에 있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말을 내게 번역해 전달해주었다. 할머니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녀는 캠프로 향하는 사람들을 수 십 년 바라보면서 그곳에 가보고 싶었을까. 여전히 가보고 싶을까. 거진 일주일에 한 번씩 캠프에 오르는 가이드들과 그 길목에 살며 한 번도 캠프에 가보지 못한 할머니와 방금 막 캠프에서 내려와 앉은 나. 모닥불은 늘 사람들을 둘러앉게 만들기에 우리는 둥글게 앉아 각자의 불을 봤다. 나는 등산에서 그 불을 가장 좋아했다.

풍경은 결국 사람을 통해 완성된다. 설령 아무도 없는 곳일지라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사람의 부재로, 사람이 있는 곳은 사람의 존재로. 불 앞에 사람들. 얼음 위를 걸어 온 사람들. 여기가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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