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바깥에 내던져진 그들
국가의 바깥에 내던져진 그들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1.02.16 08: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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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미얀마, 벵골, 콜카타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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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인도의 콜카타에서 겪었던 일들을 말하기 전에 다소 장황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콜카타와 벵골에 대해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전혀 관련이 없을 줄 알았던, 근래에 일어난 미얀마의 군사 쿠데타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우리나라도 지난 역사에서 군의 쿠데타를 경험한 적이 있고, 타국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구나 싶었다. 새로운 사건들은 으레 미리 알고 있거나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이해되니까. 미얀마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웅 산 수치의 민주화 운동이나 이름 모를 소수민족이 박해받고 있다는 정도를 겨우 들어서 아는 정도였으므로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것이 그렇게 새롭게 들리지는 않았다. 인터넷의 반응도 대부분 그런 것처럼 보였다. 한국이 50년 전의 경험한 것을 이제야 겪고 있다며 미얀마의 민주화를 기원하고 은근히 동남아의 후진성을 지적하는 사람들. 나도 그저 미얀마는 아직 혼란스럽구나, 생각했다.

각각의 여행지에서 만난 여행객들이 입이 마르고 닳도록 미얀마의 바간은 정말 멋진 곳이라고 했던 것만을 떠올렸다. 거기엔 낮게 늘어선 불탑들이 가득하고 또 밤에 별이 가득하고 불탑에 올라서 별을 볼 때 갖은 로맨틱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점을 그들은 강조했다. 쿠데타가 일어났다는데 바간의 불탑들은 잘 있을까. 가보지 않아 더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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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소수민족, 로힝야족이 대대적으로 박해받고 있다는 사실은 예전에 얼핏 흘려들었던 기억이 있다. 다수민족과 소수민족 양자 간의 갈등이라고 넘겨짚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미얀마의 상황을 찾아보니 그보다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얀마는 이미 130여개의 소수민족이 존재하는 다민족국가였고, 각 민족들이 갈등과 통합을 반복하며 비교적 자기 정체성을 유지한 채 오래토록 살아왔다. 미얀마의 전 이름인 버마는 가장 큰 규모의 버마족의 이름을 따왔다. 이 명칭에서 미얀마라는 지금의 이름 역시 유래했다고 해도 미얀마는 기본적으로 다민족국가, 혹은 여러 민족이 살아가는 지역이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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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가 19세기 후반에 영국에게 완전히 점령되어 인도제국으로 편입되면서, 영국은 손쉬운 지배를 위해 주로 남부 방글라데시의 벵골인들을 미얀마 지역으로 이주시킨다. 그 후 인도 제국이 해체되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국경이 다시 정해졌는데, 미얀마의 민족들은 로힝야족을 ‘미얀마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제국주의 시대의 잔재로 여겨지는 로힝야족을 추방하려고 했다. 이미 몇 세대를 미얀마에 자리 잡고 살아왔던 로힝야족은 이미 인도의 서벵골이나 방글라데시인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두 국가의 상황도 로힝야를 받아줄 수 있는 상황이 되지는 못했다. 그렇게 로힝야족은 어느 국가에도 공식적으로 속하지 못하는 일종의 난민이 된다.

역사의 세부를 살펴 이 자리에서 지금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충분히 복잡할뿐더러, 각 집단의 목소리가 엇갈리고 있다. 로힝야족이 제국주의 시대 이전부터 이미 미얀마 지역에 살아왔다는 이야기도, 로힝야족이 미얀마의 민족들에 대한 학살을 먼저 시작해왔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다른 국가나 사람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며 기본적인 시민권조차 박탈당한 채 말 그대로 ‘국가의 바깥’에 내던져진 그들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백 만이 넘는다. 방글라데시가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같은 벵골어를 사용하는 방글라데시로 돌아갈 수도 없다. 여전히 몇몇의 로힝야족은 난민선을 타고 어느 나라로도 입국할 수 없어 바다를 떠돌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미얀마에서는 무장투쟁에 나선 로힝야족을 보복하기 위한 학살을 기획했던, 버마족 민족주의 노선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로힝야의 대표는 군부에 반대하기 위해, 학살을 방조했다고 평가받는 아웅 산 수치를 지지하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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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가보지도 않은 나라의 민족들과 쿠데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이유는, 이 상황들 속에 내가 몇몇 국가들을 경험하며 느꼈던 생소한 느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하나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종교적 갈등도 없는 한국에서, 민족은 곧 국가처럼 이해된다. 머리로는 다른 수많은 나라에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고, 심지어 언어와 종교가 다른 민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어도, 늘 그게 잘 체감이 안 되었던 것 같다. 한국은 한국. 인도는 인도. 미얀마는 그저 미얀마.

그러나 여행을 하며 알았다. 한국이 오히려 특수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민족은 곧 국가가 아니다. 근대 이후 ‘민족국민국가’라는 꺼풀을 열어보면 아직 전혀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각 국가에 산재해 있다. ‘제국주의’라는 말은 이미 다 끝나버린 낡은 단어인 것 같지만, 제국주의가 만든 문제들은 아직 전혀 정리되어있지 않다. 아프리카 대륙의 직선적인 국경선 외에도 문제는 많다. 상황을 이 정도로 복잡하게 만든 것은 당연히도 몇몇 제국주의 강대국들이지만, 그들을 탓하는 것은 너무 쉽다. 물론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고. 우선 무엇보다 몇몇 국가와 민족들이 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이해라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들은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단지 후진적인 정치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져온 역사의 복잡한 결과를 겪어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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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힝야족과 미얀마의 상황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까닭은 로힝야족이 왔다는 벵골 지역에 나도 잠깐 머무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벵골 지방의 콜카타는 내가 인도에서 처음 방문했던 도시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베트남을 통해 동쪽에서 인도로 처음 입국하는데, 여행 경로를 한붓그리기처럼 만들고 싶었던 나는 가장 동쪽에 있는 대도시 콜카타를 첫 여행지로 정했다. 어릴 때 동물원에서 봤던 벵골호랑이의 벵골이 이 지방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약간의 친숙함을 느꼈을 뿐이다. 인도에 대한 여행객들의 수많은 악명을 듣고 처음 밟은 인도 땅이라 처음에는 두려웠고, 어수선함 그 자체인 길거리와 정말로 거리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들, 인도에서 이 도시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인력거, 다 헤진 옷을 입고 맨발로 인력거를 모는 인력거꾼. 콜카타의 상징인 샛노란 택시.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들과 거기에서 읽히는 어떤 비난의 느낌. 슬럼화된 거리와 그 거리를 가득 채운 녹이 슬어있는 것 같은 활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하얀 대리석 궁전과 그 옆으로 늘어선 텅 빈 공원에 가득했던 쓰레기들. 인도-콜카타의 첫인상은 어딘가 두렵게 남아있다. 콜카타의 인상에 압도당한 후로 콜카타를 다시 생각해본 것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니체를 좋아한다는 방글라데시 청년 때문이었다. 그가 내게 많은 말을 해준 것은 아니었지만 잠깐의 대화는 마지막에 벵골의 역사로 이어졌고, 그 후 나는 콜카타에 머무는 동안 벵골의 역사에 대해 찾아 읽었다.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라고 늘 배워왔는데, 그게 민족이 분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벵골 역시 분단되어있다. 벵골의 콜카타는 인도 제국의 수도였다. 인도 제국이 무너진 이후,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차이로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된다. 이때 힌두교도가 주로 있었던 서벵골은 인도로, 이슬람교 지역이었던 동벵골은 동파키스탄이 된다. 민족성과 언어가 다른 파키스탄에게 차별받던 동파키스탄은 인도의 도움으로 독립해 지금의 방글라데시가 된다. ‘벵골의 국가’라는 뜻으로. 벵골어는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인데,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영국이 빠져나간 콜카타는 산업 기반을 잃고 슬럼화 되었고, 농경지가 대부분이었던 벵골 동부의 방글라데시는 여전히 최빈국에 가깝다. 농지를 얻기 위해 미얀마로 향했던 벵골의 후손, 로힝야족들은 국가도 없이 버려져있다. 민족과 종교와 국가가 어지럽게 얽힌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있구나.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게 괜히 억울해서, 두려워하며 걸었던 콜카타의 거리를 자꾸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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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규 2021-02-16 11:55:32
"영국은 손쉬운 지배를 위해 주로 남부 방글라데시의 벵골인들을 미얀마 지역으로 이주시킨다" ??? 뱅골하고 라까잉 지역이 고대, 중세, 근대로 오면서 어떤 왕조가 흥망성쇠를 이어갔는지 그리고 그사이에 어떤 소수민족들이 이동이 잦았는지 찾아보면 답이 나온다. 물론 역사학자, 지역학자들이 더 연구해야겠지만, 뱅골 치타공 라까잉등이 얼마나 느슨하게 지역적, 민족적 구성이 있어왔는지는 로힝야사태 덕택에 많은 학술지에서 언급이 되어왔다. 꽁바웅왕조의 아라칸 왕국 멸망 사건 시점이 1785년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18세기까지 뱅골이나 라까잉에 버마족은 존재한적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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