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듯 걱정과 긴장이 시원하게 사라졌다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듯 걱정과 긴장이 시원하게 사라졌다
  • 김혜영 기자
  • 승인 2021.04.08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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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탐방기] 강릉국제영화제 6편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드디어 강릉국제영화제의 마지막 편이다. 영화를 한 편만 소개해놓고서 왜 벌써 마지막이냐면, 여행이 늘 그렇듯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편에서는 탐방기의 마무리와 더불어 여러 영화 이야기가 등장할 것이다. 어떤 영화를 보고 또 어떤 여행을 했는지 지켜봐주시기 바란다.

 

강릉국제영화제 포스터
강릉국제영화제 포스터 ⓒ위클리서울/ 강릉국제영화제 홈피

친구를 초대하고 마중을 나가는 일

장소는 당연히 강릉, 날짜는 영화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하루를 보낸 다음날이다. 이번엔 정말 혼자서 영화를 보거나 정처 없이 걸으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또 다른 친구 M이 서둘러 서울에서 내려왔다. 나처럼 강릉을 자주 놀러오는 친구였다. M은 강릉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매번 서울을 떠나올 기회를 틈틈이 노리고, 절대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를 알고 있던 터라 그녀와의 여행을 막을 길은 없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편한 친구가 곁을 지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마치 강릉에 사는 주민처럼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내 집과 내 동네가 없는 곳에서 손님을 초대한 주인처럼 행세하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뿌듯하고 설레는 일이었다. 아직 온전한 내 것이랄 게 없는 가난한 학생이라서 평소에 해볼 수 없는 주인 행세나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M은 도착하자마자 바다를 보고 싶어 했고, 자연스레 가까운 바다인 경포대로 향했다. 영화제를 찾을 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는 아니라서 극장에 데려가기는 미안했다. 그래서 경포대를 택했다. 그곳엔 바다도 있었고, 100초짜리 영화제가 실시되는 간이건물도 있었다.

 

<100X100> 프로젝트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100X100> 프로젝트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100X100> 프로젝트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모래사장에 생긴 작은 컨테이너 극장

너는 바다를 봐, 나는 영화를 볼게. 그런 마음이었지만 실제로 내뱉지는 못했다. M도 극장에서 몇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싶진 않았겠지만 영화제라는 축제에 대한 호기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서 100초짜리의 영화가 끝없이 나오는 컨테이너 건물에 순순히 들어갔다. 한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100명의 감독이 제작한 100초짜리의 영화 100개가 상영되고 있었다. 무료인데다 접근성이 좋아 어린 아이를 동반한 가족부터 어르신들까지 자유롭게 오고가며 영화를 관람했다. 다양하고 실험적인 영화들 가운데에는 최근의 민감한 이슈를 다룬 영화도 있어서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요즘 애들은 이런 영화를 만드느냐며 호통을 치거나 대중적이지 않은 내용을 대중적인 형태로 전시한 것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진지하지만 자유롭게, 편하지만 예의를 지키며 영화를 감상했다. 자신의 취향이 아닌 영화가 나오면 암막 커튼을 열고 간편하게 떠나면 그뿐이었다.

<100X100> 프로젝트는 여성 감독 50인과 남성 감독 50인으로 구성되어 더욱 의미가 있었다. 운이 좋게도 첫 번째를 맡은 여성 감독의 영화부터 순서대로 감상할 수 있었는데, 이정향 감독의 ‘100원의 무게’였다. 줄거리는 이렇다. 음료수 자판기를 이용하려던 청년이 버려진 음료수를 마시는 할머니를 보며 경악하다 동전을 떨어뜨린다. 라면 국물이 범벅된 100원을 줍기는 싫은데 딱 100원이 모자라 음료수를 뽑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때 할머니가 청년에게 100원을 선뜻 건네고, 땅에 떨어진 100원을 닦아 주머니에 넣는다. 말문이 막힌 청년의 얼굴 뒤로 할머니는 길을 떠나며 폐지를 줍는다. 영화를 만든 이정향 감독은 전 국민을 울린 ‘집으로…’(2002)를 연출한 감독이다. 역시나 따스하고 묵직한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도 충분히 풀어낸 영화였다. 100번째 생일을 맞이한 한국영화가 힘든 시기를 겪은 이전의 영화들에게서 도움을 받으며 자랐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어 여러모로 여운이 남았다. 그 외에도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다룬 강유가람 감독의 ‘새시대’, 여우가 여우주연상을 받는 귀여운 애니메이션인 장형윤 감독의 ‘여우주연상’ 등의 작품을 보았다. 아쉽게도 100개의 영화를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진흥위원회 KOFIC’의 유튜브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어 훗날을 기약했다.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지금 이 순간을 누린다는 것

그 후에는 M과 서점에 가서 구매한 책을 바다에서 읽기도 하고, 강릉의 향토 음식을 먹으며 여행했다. M이 쉬는 동안 VR로 영화를 상영하는 곳을 다녀오며 영화제를 진하게 즐기기도 했다. 편도로 기차표를 끊은 터라 서울에 돌아갈 시간을 정해두지 않았지만, M이 집으로 돌아갈 때 함께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마지막 날, 영화를 더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숙소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한 편 더 보고 잠에 들었다. 무료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하듯 괜히 시간 낭비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원래 영화제에선 취향에 맞지 않는 영화를 보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영화제의 낭만을 가득 채우고 외롭지 않게 서울에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그동안 연인인 Y는 살뜰하게 연락을 해왔다. 고백을 받자마자 바로 다음날에 강릉을 가겠다고 선포를 했더니, 자신의 집에 다시 들려 머플러를 가져왔다. 바닷바람이 추우니까 꼭 메고 다니면서 동시에 자신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가끔씩 떠올려주라고 했다. 아마도 내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도망치듯 떠난다는 걸 눈치 챈 것 같았다. 영화제 내내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바쁠 나를 배려하며 연락을 독촉하진 않았지만, 자신은 무얼 하고 있는지 다정하게 남겨놓으며 내 안부를 챙겼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에는 자신이 역까지 데리러 가도 되겠냐며 조심스레 묻는 Y에게 마음이 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닷바람을 맞아 초췌해진 머리를 걱정하며 그냥 다음날에 보면 어떻겠냐고 물었고, Y는 단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네가 갑자기 레게머리를 해도 좋아.’ 그 순간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듯 걱정과 긴장이 시원하게 사라졌다. 언젠가를 생각하며 미래를 걱정하는 것만큼 쓸 데 없는 일은 없다. 걱정할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걱정하면 되고, 지금은 이 순간을 그저 누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 깨달음을 위해 강릉까지 떠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 내 VR 체험 부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어느덧 연인과 함께 해를 넘기고 3년차가 된 지금, 새롭게 출발한 축제였던 제 1회 강릉국제영화제를 되돌아보며 초심을 기억하려 한다. 여전히 연애는 어렵고 고민이 많지만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가치가 있다. 기쁨과 감사를 한껏 누리며 이 소중함을 잊지 않고 계속 노력해야 한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어렵고 때로는 부끄러운 것이 글쓰기지만, 용기를 내어 계속 쓰는 것이 유일한 방도일 것이다. 강릉국제영화제 탐방기는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새로운 원고를 써서 다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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