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위클리서울

[위클리서울=박석무]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은 조선 5백 년 역사에서 가장 많이 활용된 교과서였습니다. 한문을 배우는 학동들에게는 필수과정의 교과서로서 글을 배우는 사람으로서『소학(小學)』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였습니다. 주자가 편찬한 책이어서 당연히 중국사람에 대한 내용이고 중국 역사상의 일들을 중심으로 꾸며진 책이었지만, 조선에서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유학이론의 기본으로 구성된 책이어서 대표적인 교과서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중국 중심의 내용이라는데 문제의식을 지니고 조선 중심이자 우리나라의 인물과 역사를 내용으로 해야, 우리 국민을 교육하는 교과서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대동소학(大東小學)이라는 책이 저작되었습니다.

나의 선사(先師) 일청(一靑) 김형재(金亨在, 1909∼1988)선생은 민족 수난기를 살으셨던 한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애국 애족에 투철한 정신을 지녔던 분으로, 『소학』의 문제점을 똑바로 알아보시고 수많은 책을 참고하여『대동소학』이라는 조선의 소학을 1937년에 완성하시고, 1975년에야 간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70년대의 한국은 유신독재의 탄압에 시달려야 했지만, 독재와 싸우면서도 나는 한문 공부에 온갖 정성을 쏟던 때였습니다. 익산에 한학자 일청선생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몇차례 익산으로 선생을 찾아뵈오며 학문을 묻곤 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다음으로 한문공부에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이 일청선생이었습니다.

5.18로 감옥을 살다 나온 80년대 중반, 일청선생은 광주의 관선회(觀善會)라는 강학(講學)모임을 이끄시느라 자주 광주에 오셨는데, 그때마다 선생은 나의 연구실을 방문하여 많은 공부를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 무렵 저에게 주신 책이 다름 아닌『대동소학』이었습니다. 2019년 초, 정영길 교수(원광대)와 조운찬 기자의 노력으로 번역본 『대동소학』이 간행되어, 모처럼 선생의 책을 다시 읽어보면서 참으로 박식하고 정밀하던 선생 학문의 깊이를 다시 살펴보면서, 선생의 민족과 국가에 대한 사랑의 뜻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위당 정인보는 조선의 근고학술사를 종계(宗系) 해보면 반계가 1조, 성호가 2조, 다산이 3조라는 주장을 폈었는데 일청선생 또한 똑같은 주장을 하였습니다. 반계 유형원의 높은 학문, 반계를 이은 성호의 실학사상, 반계·성호를 이어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에 대한 평가를 치밀하게 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다산의 뜻은 오직 백성과 나라에 두고서 수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경국(經國) 제민(濟民)의 학술이 아닌 것이 없고, 지언요도(至言要道:지극한 말, 요긴한 도리)가 모두 담겨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80년대 중반, 나는 다산공부에 빠져 다산의 저서를 번역하고 논문을 쓰면서 한창 재미에 빠져 있을 때, 그런 모습을 목격한 선생은, 자신의 꿈이 하나 있다면서, 홍도원(弘道院)이라는 서원을 창건하여 반계·성호·다산 3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강학소를 꾸며 개신유학이자 실학사상인 세분들의 학문을 강학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였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희망을 말했습니다.

『논어』의 ‘인능홍도 비도홍인(人能弘道, 非道弘人)’에서 ‘홍도’의 의미를 따내 자신이 작명한 서원의 이름이었습니다. 선생께서 세상 떠난 지 30년이 훌쩍 넘었고, 선생은 물론『대동소학』도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요즘, 실용과 실사구시, 공정과 청렴만이 나라와 백성을 건질 위대한 방책이라던 세분 선생을 숭모하고 그분들의 뜻을 현실에 펼치는 ‘홍도원’을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창건하여 운영한다면 얼마나 값있는 일이 될까요. 선생이 더욱 그리울 뿐입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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