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나의 삶은 지속되었다
또 나의 삶은 지속되었다
  • 이선희 작가
  • 승인 2021.04.23 17: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 어느 삶, 75년 : 1회, 47년생 이선희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위클리서울=이선희] 1947년 음력 10월 7일 서대문구 창천동 20번지에서 태어나 살았다. 내 아버지는 양복을 만드는, 지금으로 치면 남성 패션 디자이너 겸 재봉사. 그런 아버지의 3남 1녀로 태어난 나는 세 살 무렵 천연두를 앓아 평생 얼굴에 흉 자국을 가져야 했다. 이것으로 일생을 비관하며 살았지만, 그래도 어릴 땐 비교적 잘 살았다. 그 시절에도 양복을 입고 학교에 다닌 나는 선생님들 사랑을 받았으니까.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담임 선생님들께 양복을 해주신 아버지 덕이었을 게다.

우리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딴사람이 되었다. 때로는 마귀 같아 보이기도 했다. 모든 살림살이가 구들장을 뚫고 파묻힌다. 가게 재봉틀은 몇 대가 유리창 진열대를 뚫고 도로로 나가떨어졌다. 동네 사람들은 놀라 와서 말려보아도 술에 취한 사람은 무아지경으로 난리였다. 한 번 술을 잡수면 일주일에서 열흘은 고생했다. 집안은 난장판이 되고 성한 데가 없었다. 오빠와 나, 동생들은 모두 이웃집으로 피신하고, 엄마는 울부짖고, 이렇게 살기를 수년, 한 곳에서 오래 살지도 못하고 자주 이사도 다녔다. 강원도 주문진까지.

요즘 같으면 가정폭력이며, 하다못해 경범죄로나마 조치가 취해지겠지만 나 어릴 때는 그런 법이 없었다. 그래도 풍파가 지나면 아버지는 또 여전히 사업을 했고, 돈을 벌었다. 후회하면서도, 이 술버릇은 3, 4개월에 한 번씩. 집안 살림이 정상으로 돌아왔나 싶으면 또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우리 형편은 늘 그래왔다.

세월은 쉬지 않고 갔다. 수원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아버지는 또 양복점을 차렸다. 그런데 어디 인간 육신이 거짓말을 할까. 그렇게 술을 먹고 살았으니 위가 병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고작 16살일 때 돌아가셨다. 막막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엄마는 홀로 4남매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나 걱정이었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그래도 딸 하나인 나를 제일 사랑해서. 미국 유학도 시키고, 얼굴도 성형시켜줄게, 그리 약속을 하신 당신께서 술로 세상을 잘못 만나 나이 42세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엄마는 남아선호사상이 있었다. 자연히 나는 별 볼일이 없어졌고, 건물 집주인의 딸네 아이보개로 보내졌다. 그 집에서 석 달쯤 되었을까. 나는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입어 깁스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 년쯤 지나고 나는 어느 제약회사의 포장공으로 취업을 했고,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내 꿈은 타이피스트였다. 공장에서 일을 한 돈으로 학원을 등록했는데, 엄마가 학원엘 찾아가 그 등록금을 도로 찾아갔다. 우리 딸은 학원 다닐 형편이 안 된다며. 나는 낙담했고, 엄마가 싫었다. 결국 친구들과 집을 나갔는데 친구들과 달리 예삐지(‘예쁘다’ 경남, 전남 방언) 않다고 취업이 안 되었다. 실망과 절망에 죽을 마음이었다. 수면제를 많이 사가지고 어느 여인숙으로 들어가 먹고 한숨 자려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는지 아님 하늘이 살린 건지.

이렇게 사람 구실을 못 하며 살다 정말 가출을 결심하고 떠났다. 배우지도 예쁘지도 못한 내가 그 시절 그 나이에 무얼 하겠는가. 철없는 20살 나이에 무작정 열차를 타고 내린 곳이 장항항구였다. 돈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는 어린 마음이 자포자기해서 아무 가게에 들어가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 사람들이 모두 좋았다. 나보고 집을 나왔냐 걱정해주며,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며칠 쉬었다 가라며 환대를 해주었다.

오빠가 찾아왔다. 오빠에게 잡혀 집으로 돌아와 이모가 하는 미용실에 보조원으로 들어갔다. 미용실은 영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시장 안 총각들이 순진한 미모를 쫓아다녔다. 총각들의 이모, 형수들은 내 이모에게 와서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가곤 했다. 이모는 일언지하 내 조카는 나이도 어리고 아직 안 된다 딱 거절하며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세월이 또 지나 우리 집은 인천으로 이사를 했고, 내 인생은 여전히 어려웠다. 23살 아직 꽃다운 나이에 나는 40살 홀아비로 아이가 셋이나 있는 남자에게로 갔다. 더 이상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소원한 엄마와는 가끔 대화라도 하면 험담과 트집이 생겼고, 오빠와는 몸싸움까지 격해지며 우당탕 난리가 나고야 말았다. 그러니 내가 집을 나올 수밖에. 그럴 때 이 아저씨가 날 위로했다. 자기 처지 같은 사람도 있는데 아가씨같이 꽃다운 처녀가 왜 살지 못 하겠냐 달래주었다.

자기 집에 가보면 많은 위로가 될 것이라 하여, 그 집을 가보았다. 옛날 도화동 판자촌. 남의 외양간 옆에 방 하나. 아이들이 올망졸망 셋. 내 처지를 비관하던 나는 이 아이들을 길러주며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날부터 그 집에서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며 아저씨가 하루 만 원씩 주는 돈으로 살게 되었다. 반찬값, 연탄값, 쌀값, 국수값, 아이들 군것질값. 이 모두를 만 원으로 해결했다고 요즘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아저씨께 이사를 가자고 했다. 용현동 개 기르는 집으로. 엎친 데 덮친다고 이 아저씨가 또 사고로 다리를 다쳤다. 나는 배가 불렀다. 산달이 다 되어가 어쩔 수 없이 엄마를 찾아갔다. 엄마는 너무 놀랐지만 할 수 없이 내가 사는 곳에 와 보았다.

아이를 낳았다. 딸이다. 엄마는 아기를 두고 가자고 했다. 아저씨가 부엌에서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들었다. 나는 엄마에게 그럴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엄마는 옆집 애기엄마에게 나를 부탁하고 돌아갔으나 슬픈 얼굴이었다. 밖에 서 있던 아저씨가 들어와 고맙고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가장은 다리를 다쳤으니 당분간 돈벌이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10살 짜리 큰딸 숙이에게 애기를 맡기고 식당이라도 다녀야 했다. 아이가 4명이었다. 보다 못한 엄마가 둘째 아이를 내 큰이모 댁으로 보내 잔심부름이라도 하고, 밥이라도 먹여 크게 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정말 그래도 되나? 아이들 3명을 책임지겠다고 이 집에 직접 들어와 산 것인데, 이건 아니다 싶다가도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매일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니….

둘째를 이모할머니 댁으로 보냈다. 학교도 보내준다고 하더니 안 보내고 있다. 다시 데려오리라 생각했지만 남아있는 가족도 살아가기 힘든 형편이었다. 자연히 큰딸 아이도 셋째 이모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나는 죄인이 되었다. 자식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전부 헤어지게 했으니.

남편은 다리는 나았지만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공구장사 중개업을 하다말고 개를 기른다고 하다가 개를 잃어버리고, 또 물리고, 엉망진창 궁상이었다. 군대 생활을 많이 해서 세상을 잘 모른다. 그저 착하기만 하다. 그러다 아는 후배가 십정동으로 이사를 하라고 해서 십정동 집으로 이사를 왔다. 십정동은 철거민촌이다. 이곳으로 이사 와서 오토바이를 한 대 사 공구중개업을 다시 시작한 남편. 매일 매일을 그럭저럭 살았다. 아이가 어려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앞집 아주머니의 소개로 집에서 검도복을 꿰맸다. 밤을 새워가며 꿰맸다. 그래도 남편이 옆에 있고 아들애도 있고 내가 낳은 딸도 있으니까. 이래서. 또 나의 삶은 계속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 뉴텍미디어 그룹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 07108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 인터넷 : 서울, 아 52650 (등록일·발행일 : 2019-10-14)
  • 발행인 겸 편집인 : 김영필
  • 편집국장 : 선초롱
  • 발행소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목로 72(신정동)
  •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전무이사 : 황석용
  • 고문변호사 : 윤서용(법무법인 이안 대표변호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 위클리서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weeklyseoul.net
저작권안심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