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위클리서울=박석무] 유교의 경전에는 크게 ‘십삼경(十三經)이 거론되지만, 흔히는 ’사서6경(四書六經)‘ ’사서5경(四書五經)‘을 말하고, 작게는 ’사서3경(四書三經)’이라고 일컫습니다. 유학자라면 13경에 달통해야하지만, 최소한 7서(七書)라고 말하여 사서삼경이라도 제대로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고는 유학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4서’야 다 알고 있지만, 3경은 ‘시·서·역(詩·書·易)’을 말하여 시경·서경·역경이 유교의 기본 경전임을 알게 해줍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다산의 평생 꿈은 조선을 요순시대와 같은 나라로 만들려는 뜻으로 유학공부의 목표를 두었습니다. 그의 230여 권의 경학연구서는 그런 방법으로 경을 해석해야만 요순시대가 온다고 여기며 연구했던 결과물이며, ‘일표이서’라는 경세학 또한 그런 제도적 장치와 개혁이 있어야만 요순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저술한 책이었습니다. 7서 중에서 대표적인 요순시대의 정치철학은 바로 『맹자』와 『서경』이었습니다.

『서경』은 『상서(尙書)』·『서전(書傳)』이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지지만, 그 책의 가치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정확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조선의 대현(大賢) 율곡 이이(李珥)는 “이제(二帝 : 堯 舜) 삼왕(三王 : 禹 湯 文)의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대법(大經大法)이 들어있는 책이다(격몽요결)”라고 말하여『서경』이야말로 요순시대의 통치철학임을 분명하게 말해주었습니다. 때문에 다산도 다른 어떤 책보다도 『서경』에 대해 주목하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상서고훈(尙書古訓)』7권과 『매씨서평(梅氏書平)』 4권 등 주석서를 저술하였습니다. 1778년 다산은 17세의 소년으로 21세의 중형 정약전과 함께 화순의 동림사에서 40일 동안 독서를 했는데 형은『서경』, 자신은『맹자』를 읽었다면서 눈오는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 형제가 요순시대를 구현하는 방법에 대한 토론을 했노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요순시대를 이룩하려는 꿈을 젊은 시절부터 지녔음을 알게 해줍니다.

뒷날 흑산도에서 귀양 살던 중형과 강진에서 귀양 살던 다산은 편지를 통해 『서경』의 익직(益稷)편을 토론하면서 고적제(考績制)의 올바른 시행을 통해서만 요순시대를 이룩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이번 겨울부터 반드시『상서』와 『좌전(좌씨춘추)』을 읽도록 하라.(寄淵兒)”고 말하여 아들에게도『서경』읽기를 권장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그처럼『서경』은 중요한 책입니다. 이번 여당 대표로 선출된 정치지도자 한 사람이 현충원을 참배하고 그 방명록에 “민유방본 본고방녕(民惟邦本 本固邦寧)” 여덟 자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안녕(安寧)해진다는 뜻으로, 고대 동양 정치철학의 핵심인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주장한 내용이어서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서경』의 「하서(夏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집권 여당인 거대당 대표가 요순시대에 대한 꿈을 피력한 내용이어서 그냥 넘길 수 없습니다. 단순히 말로만 하지 말고 제대로 민본사상을 현실정치에 구현하여 요순시대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을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여당 대표는 이 글귀가 고등학교 때 배운 글로 자신의 정치신념이라고까지 말했다니 더욱 기대가 큽니다. 실천이 뒤따르기를 염원해 봅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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