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봅시다] 임노동 장애인들의 이런저런 고충, ‘화상 장애인’ 김연수 씨

[위클리서울=최규재 기자] 풍채 큰 한 사내가 선머슴처럼 운전석에서 서럽게 울고 있다. 사내는 운전대를 택시회사로 돌린다. 두 번 다시 택시 운전은 안 할 것이라며.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연은 대략 이렇다. 급하게 택시 뒷자석에 탄 한 승객이 인사이드 미러로 사내의 얼굴을 본 뒤 “지갑을 깜빡 두고 나왔다. 다른 손님을 태우라”며 줄행랑쳤고, 사내는 자신의 얼굴이 흉측해서 도망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손님이 실제 지갑을 두고 왔을 수도 있겠지만, 사내의 촉은 늘 곤두서 있었다. 하루 이틀 벌어진 일이 아니기에. ‘매번 이래서 사납금은 채울 수 있을까. 이 얼굴로는 서비스업이 안 되는구나.’ 그에겐 얼굴이 무기였다.

사내는 회사로 돌아와 그만두겠다며 계속 눈물을 글썽였다. 선배 기사들이 다독여도 소용없었다. 이후 그는 택시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 일용직노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십 수년전 있었던 일이다. 화상 장애 3급인 김연수 씨(47. 가명)는 현재 임대아파트에 살며 기초생활수급자로 연명하고 있다.

 

ⓒ위클리서울/ 최규재 기자

야구의 꿈 박탈

김 씨는 중학 시절부터 야구에 두각을 나타냈다. 집안이 넉넉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에서 야구로 유명한 명문 고등학교로 스카웃 되어 야구인의 길을 걸었다. 실력이 있어도 대학을 쉽게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실력이 없어도 집안이 좋으면 대학을 가던 시절이었다. 운동부의 현실이 그랬다.

“집에 돈이 없었죠. 저보다 실력이 안 되는 동기나 선후배들이 대학을 가고 프로에 입단하는 것을 보면서 좌절감을 느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월등히 실력이 뛰어났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실력이 정말 뛰어났으면 당연히 대학에서 저를 불렀겠죠.”

아직 입시가 끝난 게 아니다, 부르는 곳이 있지 않겠느냐, 좀 더 기다려보자는 고교 코치 말에 그저 연습에만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원인 알 수 없는 불이 나고 만다. 마침 부친은 집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부친을 품에 안고 탈출하던 도중 전신 화상을 입고 몇 달간 병원에 감금되다 시피 했다. 다행히 부친은 무사했다. 대신 야구의 꿈은 조금씩 사라져 갔다.

장애 3급 판정을 받고 퇴원한 김 씨.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운이 좋아 얼마 후 지인의 소개로 택시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선배 동료들은 사정이 딱하다며 김 씨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것도 잠시. 회사나 동료들과의 불화가 아니었다. 손님들에게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도 그들의 얼굴에선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뒷좌석의 ‘정상인들’은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표정 일색이었다. 김 씨는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못해먹겠다.”

택시 운전대를 잡았던 시절은 짧았지만, 운적석에서 울었던 시절은 길었다. 결국 울면서 회사를 나왔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일 밖에 없어보였다. 덩치 있는 운동선수 출신에게 건설노동자와 같은 천직은 없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를 피했지만, 건설현장에서만큼은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노동현장에선 늘 그를 원했고, 체력도 받쳐줬다. 기초수급자가 자신의 명의로 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급권이 자연히 박탈되기에. 그래서 다른 명의를 빌려 건설현장 일을 했다. 옳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변이 있다. 부친이 뇌경색으로 병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친과 함께 사는 입장에서 수급비 60만원으로는 생활이 턱없기 부족했다.

 

“대리운전 시간대는 얼굴 식별 어려워”

시간이 흘러 김 씨는 일용직이 아닌 철거현장의 간부로 승격하기에 이른다. 정규직으로 스카웃 된 것이다. 자신이 직접 용역회사에 일용직 노동자 파견 인원수를 요구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물론 철거회사 사장이 그에게 전권을 위임한 까닭은 고된 일을 먼저 나서서 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지시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루하루를 일용직 노동자들과 동일하거나 혹은 그보다 고된 노동 강도에 시달려야 했다. 사장의 주머니는 두툼해져갔지만, 김 씨의 몸은 지쳐만 갔다.

“사장이 제 사정을 알아서 항상 현금박치기로 월급을 받았어요. 그건 좋은데, 1년 가까이 쉬는 날이 거의 없다시피 했거든요. 건설노동 중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철거 일이에요. 일용직의 경우 철거 현장 하루 나오면 며칠 쉬는 경우도 있어요. 다시로 안 오려 하죠. 지옥이 따로 없다며.”

김 씨는 이 길은 아니라는 확신에 사로잡히게 된다. 노동인권은 찾아볼 수 없는 현장에 환멸을 느꼈다. 몸은 망가질 데로 망가졌다. 게다가 땡볕에서의 노동은 화상을 더욱 악화시켰다. 화상은 꾸준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도지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택시 운전대를 다시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택시운전이 상대적으로 편한들 자신이 그 일도 할 수 없는 처지여서 한탄할 뿐이었다. 그래서 번뜩 떠올랐던 일이 대리운전이었다.

“대리운전이 택시랑 다른 게 뭐겠어요? 주로 밤에 달리잖아요. 제 얼굴이 잘 안 보여요. 대부분 술에 취해 있으니 제가 화상을 입었는지 아닌지 식별 안 되거든요. 게다가 제 건강에도 좋고요. 그래서 대리운전으로 돈 좀 벌었어요.”

운이 좋아 먼 거리나 지방으로 손님을 태우고 가는 날이면 2시간 만에 15만원을 버는 날도 있었다. 보통 하루 평균 7시간 근무했고 손님은 끊이지 않았으니 꽤 괜찮은 수입원이었다. 대리운전 하면서 자신의 얼굴에 시비(?) 거는 손님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2년 가까이 대리운전에 매진했다. 하지만 이 운전노동 역시 지난해 ‘코로나 사태’가 터진 이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임대아파트의 현실

대리운전을 관둔 후 또 다시 막막한 일상을 이어가던 김 씨. 다행히 수급자임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국자지원금을 받을 수 있어 어느 정도 혜택을 누렸다. 발로 뛰어 찾아낸 지원금이었다.

“저 같은 사람들이 큰 돈 만지는 건 아니잖아요. 당장 먹고 살기 위해 국가에서 주는 건 어떻게든 받아먹어야죠. 좀 답답한 건 국가에서 먼저 연락오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긴급지원금 등등 자기가 직접 조건을 찾아서 신청해야 하니...”

백수생활 중인 김 씨. 당장의 불만은 ‘있는 자들’의 꼼수이자 횡포다.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지만, 임대아파트 당첨 순번을 기다리며 거주를 꿈꾸는 ‘없는 자들’의 현실에 한때 크게 분개하기도 했다. 과거 자신이 거주하는 ‘의심스러운’ 아파트 주민들을 신고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이 오고 방송국 기자들이 취재하러 오는 상황이 벌어졌단다.

“거주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불법적으로 거주했고, 막상 살아야 할 사람들은 입주를 못했거든요. 주변에 알던 제 지인 몇몇도 당첨되기만을 기다렸는데, 다들 탈락했죠. 대다수 임대아파트 주민들은 매달 60만원 정도 되는 수급비를 받고, 월세와 관리비 15만원 정도 내면 살 수 있어요. 이 점을 노려 불법으로 수급자 자격을 얻어 들어오는 입주민이 많았어요.”

한 때 경찰조사와 방송국 기자들의 취재로 파장이 일었지만, 그 때 뿐이었다는 게 김 씨의 얘기다.

“10년도 넘었어요. 이 동네 난리가 났었죠. 경찰에 기자에... 몇몇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잡혀가고, 주민들은 그들을 향해 삿대질 하고... 그런데 바뀐 게 없어요.”

최근 들어 다시 벤츠 등 유명 외제차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법망을 피하는 수법이 교묘해지면서 증거를 잡기도 어렵다는 게 김 씨의 주장이다. 친인척이나 가족의 수급자격을 이용해 입주한다는 소문도 들린다.

“몇몇 집 골라서 기습하면 아마 수급자 아닌 사람이 살걸요? 방법은 천차만별이에요. 위장이혼 등을 해서 집 한 채 얻는 거죠. 이 집 없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인데 말이죠.”

남 욕 할 처지가 아니라지만 신고해도 바뀌는 게 없다며 그저 패배주의적인 발언만 이어간다. 김 씨는 수급자격이 박탈되어도 좋으니 당당하게 땀 흘려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만약 제가 이 외모로도 열심히 일해서 벌 수 있는 직장이 있으면, 수급자격이 박탈되어도 상관없어요. 당당하게 택시운전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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