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수 밭에 우직한 물소의 눈동자를 보듯이
야자수 밭에 우직한 물소의 눈동자를 보듯이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1.07.08 0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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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폰디체리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폰디체리
폰디체리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카르시의 해변

폰디체리의 해변에서 나는 카르시케얀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고 늘 같은 머리스타일을 유지했다. 내 옆에 앉은 그의 커다랗고 차분한 몸을 나는 느꼈다. 인도 동부 해안가를 잇대어 이어지는 프랑스풍의 해변에는 사람 키 정도 되는 야자수들이 정돈되어 늘어서 있었다. 1월에도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에 사람들이 원색의 옷을 걸치고 모레 사장 위를 걸어 다녔으며,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아이스크림은 하나 같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나는 늘 도대체 카르시가 뭐하는 사람인지 알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남인도 특유의 영어 억양은 특이했지만 정확했다. 우직하게 앉아 있는 덩치 큰 그의 어깨 너머로 파도가 일렁거렸다. 요즘 뭐하고 있냐는 나의 질문에 카르시는 추리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시간 잠을 잔다고도. 그는 갑작스레 나에 대한 감상을 말했다. 카트만두에 있을 때 너는 불행해 보였어. 잘 웃지도 않았지. 그런데 지금은 잘 웃네? 사람들은 종종 어색할 때 더 과장되게 웃는다는 사실을 카르시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느끼기에 나는 카트만두에서 충분히 즐거웠던 거 같은데. 그는 나의 어떤 표정을 읽은 걸까. 나는 반대로 그의 얼굴을 읽고자 노력했다.

 

폰디체리의 카르시케얀
폰디체리의 카르시케얀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폰디체리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그의 고향 마을인 폰디체리에서 카르시는 비교적 평안해보였는데 그의 눈이 풍기는 느낌은 여전했다. 무언가를 묵묵히 응시하고 있는 굳은 심지가 느껴지는 눈동자, 그러나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어떻게 이어나가야하는지는 모르는 눈치. 190이 넘는 커다란 덩치는 그의 눈을 한층 우직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늘 피상적인 계획을 아주 느리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에는 소설을 쓰고 싶구나. 저번에는 세계 여행을 시작하는 중이라고 했었는데. 그는 이제 코로나가 발발한 중국의 상황을 걱정한다. 아직 인도에 코로나가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인도에서 나는 야채를 먹으면 중국 사람들은 다 괜찮아질 텐데, 그렇게만 하면 해결될 텐데, 카르시의 황당한 이야기에 그의 우직함은 내게 일순간 우둔함으로 읽혔다. 전염병은 그런 문제가 아니야 카르시, 미국이 너를 사찰할 이유는 없으니까 페이스북을 지울 필요는 없어 카르시, 어딘가로 향할 땐 부디 날씨를 확인하고 가, 그곳이 외국이라면 특히. 카르시는 내 말이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해변의 중앙에 세워진 간디의 동상 앞으로 양파망 같은 모자를 쓴 이슬람교도들이 정부의 차별에 대해 항의하는 의미로 행진했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아 긴 띠를 이루었고, 나와 카르시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카르시는 내가 만났던 인도인들 중에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카트만두
카트만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카트만두 거리의 둥지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들 중 하나는 내게 단연코 숙소 자체다. 내가 주로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에서 지냈던 건 당연히 돈 문제 때문이 컸지만, 나는 게스트하우스만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다 친해지기도 하고, 어쩌다 동행이 되기도 하고, 그냥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 알아서 흩어지는 분위기. 말하고 싶지 않으면 혼자 침대에 우두커니 있고, 말을 나누고 싶으면 공동 공간에 귀 내밀고 앉아 있으면 되는 곳. 때로 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게스트하우스로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숙소를 잘 만나면 여행의 질은 가파르게 상승한다. 어쩌면 바깥보다 숙소에서 머문 시간이 더 길었는지도 모르겠다. 숙소와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여행을 기억하는 경우는 흔하다. 여행을 오래한 사람들이라면 다들 나만의 베스트 숙소 순위를 알고 있지 않을까?

 

버드네스트 게스트하우스
버드네스트 게스트하우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게스트하우스 발코니
게스트하우스 발코니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내 순위에서 카트만두의 ‘버드네스트 게스트하우스’는 무조건 상위권이다. 이곳의 장점은 계단식으로 이어지는 넓은 마당이었다. 마당에서 마당으로 올라가다보면 트인 건물이 나오고, 그 건물에서는 층층의 마당들이 겹쳐 보였다. 대충 뚝딱 만든 것 같은 헐렁한 나무판자 의자들과 툭툭 놓여있는 타이어들. 자연스럽게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야초들. 카트만두 특유의 황색 먼지가 분분한 거리를 돌아다니다, 마당을 넘어 숙소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씨커르가 웃고 있고, 사람들 몇이 네팔에서의 산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곳. 네팔의 전력난 덕분에 비가 오면 따뜻한 샤워를 할 수 없는 2층의 샤워실을 지나면 두꺼운 2층 원목 침대들이 들어선 도미토리룸이 있고, 그 구석에는 추위에 떨고 있는 카르시케얀이 있다. ‘새 둥지’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웅크린 새처럼 앉아 있는 그의 얼굴.

 

카트만두 거리
카트만두 거리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카르시의 추위

사연은 이렇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한때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 남부 폰디체리에 살던 카르시케얀은 세계여행을 위해 생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네팔에 왔다. 그의 원래 계획은 네팔을 여행하고 발 가는대로 다른 나라로 향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가 사시사철 따뜻하거나 더운 인도 남부에서 왔다는 것. 그는 따뜻하지 않은 날씨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고, 그저 반팔 차림으로 작은 배낭을 들고 10도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는 네팔의 겨울에 도착했다. 그는 추위를 참으며 아무 게스트하우스에 우선 들어갔지만 너무 추워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얕은 감기에 걸린 카르시는 2주가 넘게 네팔의 방구석에만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포카라에서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와 만나게 되었다.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추워하는 걸 별로 본 적이 없다. 심하게 추워했다는 의미는 아니고, 모든 방면에서 추워했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그는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조금씩 다 추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갑작스런 이상기후를 겪고 당황한 커다란 야자수 같았다고 해야 할까. 주변 사람들은 다 멀쩡했는데, 그는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고 열이 나는 것도 아니라 큰 병이 있는 것도 아닌 듯 했다. 2주 동안 이러고 있었다고? 카르시는 덤덤하게 그렇다고 했고, 보다 못한 사람들이 그럼 옷이라도 사다줄까? 묻자 그런 방법이 있었냐며 놀라워했다. 생전 처음 입어보는 니트와 털모자, 장갑을 껴입고 그는 겨우 밖으로 나왔다. 도미토리에 있던 나와 중국인 후이에게는 어떤 목표가 생겼다. 일종의 ‘카르시 정신 차리게 하기’ 후이와 나는 카르시의 추위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가져오고, 평생 채식을 해오던 그가 먹을 만한 것들을 구해왔다. 집 주변 마실 나오듯 시작한 카르시케얀의 세계모험은 좌초되기 일보직전이었다.

 

폰디체리
폰디체리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카르시케얀
카르시케얀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카르시의 세계여행은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그는 나와 후이의 조언을 따라 긴 시간 가만히 있었던 카트만두를 떠나, 따뜻한 옷으로 중무장을 한 채 휴양지에 가까운 포카라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폰디체리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고, 한 달 후 인도 남부를 여행 중이던 나와 해변에 앉게 되었다. 그의 묵묵한 얼굴은 여전했다. 정말 이곳은 따뜻하구나, 카르시. 여기가 너의 세계구나. 그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폰디체리에 와도 알 수는 없었지만, 야자수가 따뜻한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충분한 안심이 되었다.

버드네스트 게스트하우스의 일상은 비슷하게 이어졌다. 후이와 내가 밖에서 놀다 오면 이불을 뒤집어 쓴 카르시가 우리를 반기고, 카르시는 우리가 가져온 커리를 먹었다. 주변에서 애들 공차는 소리가 들려왔고, 마당에서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새해 초였다. 카르시는 서서히 내 하루의 어떤 부분이 되어갔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하루를 구성하는 어떤 일과처럼. 니트를 입은 그가 산 너머의 사원을 바라보며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저곳에 원숭이들이 많다고 저번에 묵었던 사람이 알려줬어. 언젠가 저기에 갈 거야.”

“너 여기 2주 동안 있었는데 그렇게 비장하게 말하지 마.”

그때 카르시의 말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그의 마음은 어딘가 그를 응원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야자수 밭에 우직한 물소의 눈동자를 보듯이. 그의 눈동자는 카트만두에서나 폰디체리에서나 같았고, 그것이 그를 설명할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임을 나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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