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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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1967년 2월 18일 뉴욕 타임스는 특이한 문장으로 구성된 부고 기사를 출고했다. “세계는 숭고한 정신을 하나 잃었습니다. 그는 시와 과학을 하나로 묶은 진정한 천재였습니다.”

그날 오전 열 시에 한 남자가 침대에 누운 채로 꿈이라도 꾸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 절차를 마친 뒤에 아내는 남편의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작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크고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항아리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떨어뜨렸다. 육지의 인간들과는 죽어서도 만나지 않게 하겠다는 아내로서의 마지막 배려인 것 같았다. 항아리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듯이 물 위에 뜬 채로 몇 번 선회를 하다가 바다 속 깊이 내려앉았다.

1945년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상공에 버섯구름을 피워 올리게 했던 원자폭탄 개발의 총책임을 맡았던 사람, 훗날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오펜하이머는 그렇게 바다 속 깊이 가라앉았다. 그의 죽음은 순수한 자연사가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놓고 그를 물어뜯어 온 미국 우파들의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공격에 그의 심신은 만신창이로 찢겨 있는 상태였다.

세월이 흘러 비극적인 죽음도 어지간히 잊혀져갈 즈음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란 제목의 에세이 한 권이 세상에 태어났다. 본문 내용만 일천 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를 두세 권으로 나누지도 않고 한 권으로 묶어낸 엄청난 책이었다. 오펜하이머 못지않게 시와 과학과 인간을 사랑한 저널리스트 마틴 서윈, 그는 이 한 권의 책을 위해 미국 전역은 물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각종 도서관과 연구소에 소장된 자료를 뒤졌으며, 악명 높은 정보기관의 도감청 문서까지도 일만 쪽이 넘게 분석했다. 그에 바친 세월이 무려 25년이었다.

작가 자신은 이삼 년 정도 예상했다고 한다. 이삼 년이 이십오 년으로 늘어난 것은 필연이었다. 오펜하이머 개인의 관심사가 그만큼 넓었다. 교우관계 또한 방대했으며, 오펜하이머와 원자폭탄의 관계를 연구해 온 사람 역시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작가 개인의 열정과 의지만으로는 그 많은 사람과 기관을 찾아다니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여기저기서 후원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뜻 깊은 후원자들 덕분으로 작가는 굶어죽을 걱정 없이 이십오 년 동안 꾸준히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분석하고 글을 쓸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온라인으로 주문한 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2010년 여름이었다. 그때는 중증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와 함께 지지고 볶던 시절이라 일천 페이지도 넘는 책을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읽지도 못할 책은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처박혀졌고, 그리고 내 의식에서도 사라져 갔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 책이 내 의식에 다시 떠오른 것은 검찰총장 윤석열의 조국 죽이기가 어지간히 성공한 것처럼 보이던 2020년 가을이었다.

이해하고 싶었다. 해석하고 싶었다. 이해도 해석도 못한 채로 눈이나 끔뻑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뚜렷한 혐의도 없이 압수수색, 압수수색, 자고 나면 들려오는 압수수색 뉴스에 나는 이미 분노의 덩어리가 돼 있었다. 압수수색이 빈번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범죄의 증거가 거의 안 나오고 있다는 반증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검찰이 다른 의도를 갖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인문학적 소양이 제로인 자들은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을 내심 질투하고, 시기하며, 무너뜨려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사력을 다한다는 것쯤이야 이제는 상식의 고전이 되었다 해도, 윤석열의 조국 물어뜯기는 개인적인 질투나 시기의 차원을 넘어 조직의 이익을 놓치지 않겠다는 어떤 음모로까지 읽혀지고 있었다.

윤씨가 처음부터 정치적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는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해도, 전개돼 가는 양상은 분명 윤석열과 그 주변 인물들의 정치적 목적이 조국에게 덮어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악한 짓이다. 미국의 매카시와 스트라우스가 오펜하이머를 죽음으로 몰아간 바로 그 방식, 국익을 앞세워 감정상의 사적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간교한 계락이 아니라는 증거를 나는 찾아낼 수 없었다.

일 년 가까이나 걸렸다. 무슨 경전도 아닌 한 권의 에세이를 이렇게도 오랜 세월 붙잡고 있게 될 줄이야 처음에는 당연히 상상도 못 했다. 일천 쪽도 넘는 엄청난 분량의 압박 때문에 오랜 시일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읽다가 덮어놓고 며칠 뒤에 다시 읽곤 해서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읽었다. 매일 새벽 3시에서 4시쯤 눈을 뜨면 팔굽혀펴기 등 가벼운 운동을 하고, 커피 한 잔을 끓여 마시고, 어떤 날은 삼십 분, 또 어떤 날은 한 시간쯤, 책을 읽다가 내려놓고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고 힘겨운 생각에 빠져들기를 되풀이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고통스런 책 읽기였다.

오래 전에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의 저작에 ‘행복한 책읽기’와 ‘불행한 책읽기’가 있는데 굳이 그런 제목을 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 것 같다는 느낌이기도 했다. 어쨌든 오펜하이머 읽기를 끝낸 지 한 달이나 지났을까. 조국씨의 에세이 ‘조국의 시간’이 출판될 예정이라고, 지금 막 인쇄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왔다.

조국이란 이름 두 자가 내 의식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인터넷 공간을 떠도는 온갖 뒷공론들 때문이었다. 뒷공론에 따르면 조국은 얄밉게도 잘생겼고, 얄밉게도 서울대를 나왔고, 얄밉게도 강남에 살고 있으며, 얄밉게도 서울대 교수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얄밉다는 건 비난이나 저주는 아니었다. 찬양 내지는 선망이었고, 존경의 다른 표현이었다. 내가 보기엔 별로 잘생긴 것 같지도 않은데 사람들은 왜 잘생겼다고 하는 것일까, 의아해서 그의 관상을 뜯어보기 시작했고, 보다 보니 그의 마음이 궁금해졌고, 생각이 또한 궁금해져서 그의 언행을 가능한 한 추적해 보고자 애를 썼다.

아, 이 사람은 사람 자체가 선한 의지로 충만해 있구나.

어느 하루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 무엇이 계기가 되어 그런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은 없다. 동영상으로 보는 그의 표정과 말투, 눈짓과 미소, 손짓과 걸음걸이 등등 그의 모든 언행이 내 기억에 입력돼 있다가 종합적인 판단으로 이어진 것일 뿐 객관적인 지표나 자료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뭐랄까. 사람을 진실성 있는 따뜻함으로 바라보는 눈을 그는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눈이었다. 어떤 목적의식을 숨겨놓고 사람을 대하며 이런저런 계산을 정신없이 해대는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눈이었다. 그런 눈은 연습이나 훈련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인식하겠다는 맹세를 수천 번 한다고 해서 그런 눈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진실로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감히, 차마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못 하는 사람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눈이었다.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정신없이 뛰어 가다가도 넘어진 사람이 있으면 잠시 멈춰서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사람, 가슴에 맺힌 원한이 너무 커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사람이 있으면 그 억울함을 경청해줄 수 있는 사람, 내 눈에 비친 조국은 그런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가 검찰개혁이란 명제를 들고 나왔을 때 나는 그렇지, 결국은 그 길로 가야 할 수밖에 없을 거야, 생각하며 응원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내 나이 이십대 중반에 무슨 병이 들었던 것인지 사법고시라는 것을 보겠다고 일 년 남짓 설치고 다녔던 까닭에 나는 그쪽 사람들을 제법 알고 있었고, 그쪽 사람들 대다수의 인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공적으로 주어진 권력이 사적으로 남용되는 범죄행위가 은밀한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권력기관은 한 손에 칼을 한 자루씩만 쥐어주어도 문제가 생기는데 우리나라의 검찰은 특이하게도 한 손에 칼을 세 자루씩이나 쥐어주었으니 이놈의 조직이 건강할 수가 없었다.

이제라도 검찰의 손에 쥐어준 칼 세 자루 중에 두 자루는 빼앗아야 한다는 이른바 검찰개혁의 필요성이 그동안 수많은 학자와 정치가들에 의해 제기돼 왔지만 검찰은 거의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믿는 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검찰은 조국이란 사람의 됨됨이를 알고 있었다. 선한 의지로 충만한 사람은 엉거주춤하게 꽁무니를 빼는 법이 없고, 간교한 자들의 술수에 낭패를 당하는 일은 가끔 있어도 그들과 타협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검찰은 알고 있었다.

조국씨의 기본적인 품성이라 할 만한 선한 의지는 그의 강점인 한편 약점이기도 했다. 사회가 건강하다면 약점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고 강점으로만 인식되겠지만, 물어뜯기를 작정하고 덤벼드는 자들의 눈에 선한 의지 따위는 아킬레스건으로 인식되기 십상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물어뜯기 작전이 개시되면, 부화뇌동의 달인들이라 할 만한 언론이 따라붙어서 응원에 찬양에 온갖 선동을 해댄다.

근대적 개념의 언론이 활동을 개시한 이후 언론은 스스로 정한 ‘정론’이니 ‘직필’ 따위에 큰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까닭도 없이 뛰쳐나와서 사람을 죽인 전두환조차도 떠오르는 해로 묘사하는, 언제나 힘을 가진 쪽에 서서 그 힘이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으스대 온 언론은 이제 거짓말의 달인이 되고 말았다. 만약에 언론이 건강했다면 오펜하이머의 죽음은 아마 그렇게도 일찍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오펜하이머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 자신의 품성에서 찾아야 할 일이기는 하다. 선한 의지로 충만한 사람 오펜하이머, 그는 원자폭탄 개발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긴 했지만 히로시마에 투하한 것은 몹시 잘못됐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고, 더 이상의 핵개발은 중단하거나 자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개발해서 대통령을 설득하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대중강연에 나서기 시작했다.

일견 모순처럼 보이기도 하는 오펜하이머의 이런 언행은 그의 출신성분을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유태인 출신으로 독일 국민이었던 그의 부친은 나찌를 창설한 히틀러의 공포정치가 맹위를 떨칠 즈음 탈출해서 미국 국민으로 제2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소년기의 오펜하이머는 문학청년이었다. 수백 편의 시를 줄줄 외고 다닐 정도로 문학을 좋아했던 그는 소설 또한 닥치는 대로 읽었다. 소설 중에서도 특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매료돼서 몇 개의 문장은 성서처럼 가슴에 새길 정도였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주는 고통에 무관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악함이 그토록 드물고, 비정상적이며, 소외된 상태가 아니고 심지어 그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은 무관심을 지칭하는 단어는 여럿 있지만, 결국은 끔찍하고 영구적인 형태의 잔인함이라고 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는 일생을 통해 수백 번, 어쩌면 수천 번 이 문장을 되뇌며 자신이 남에게 끼치는 고통에 무관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문장을 인용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문학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는 않았다.

청년 오펜하이머를 유혹한 것은 물리학이었다. 이것과 저것을 섞어서 특정한 온도와 환경을 조성해놓고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하면 전혀 다른 물질이 생성된다는 거, 이 매력적인 일을 하면서도 그는 문학을 놓지 않았고, ‘약한 자의 슬픔’으로 통칭되는 사회 문제에도 열심히 관심을 기울였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프랑코 독재에 맞서 싸우는 단체를 금전적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수십 년이 지나서 오펜하이머를 공격하는 자들은 이때의 활동을 근거로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라고 떠들어댔고, 언론은 당사자의 해명은 구하지도 않고 그대로 신문에 써대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의 어린 아들은 학교에서 공산주의자의 아들이란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아이는 친구를 잃고, 말문도 잃어갔다.

오펜하이머로 하여금 원자폭탄 개발에 관심을 갖게 만든 사람은 히틀러였다. 세계대전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히틀러가 결정적인 승전을 위해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국의 전쟁부와 백악관이 오펜하이머를 설득했고, 오펜하이머는 잔머리 굴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수 년 뒤에 원자폭탄 실험은 성공으로 기록되었지만, 나찌 독일의 패배로 원자폭탄은 그 의미를 잃어 버렸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일본을 지목했다. 무모하게도 진주만 기습을 감행한 일본 또한 그때 이미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다. 굳이 원폭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일본의 항복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도 백악관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고, 이때부터 오펜하이머의 고뇌는 시작되었다. 다 죽은 맹수의 심장에 대포를 쏘아댄 격이니 이게 무슨 만행인가 하는 의문이 그에게 있었다.

그 당시 미국의 기조는 전쟁을 거치지 않고서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핵폭탄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딴 소리를 하고 나선 오펜하이머는 반역자에 버금가는 사람이었다. 선봉장으로 저 유명한 매카시 상원의원이 나섰다. 추종자로 물리학계의 원로 스트라우스가 나섰고, 응원부대로 언론이 출연했다. 그렇게 해서 오펜하이머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제 명에 못 죽는 운명에 이르고 말았다.

오펜하이머 못지않게 선한 의지로 충만한 사람 조국, 그에게 덮어씌워진 혐의는 애당초 검찰이 주장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게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오펜하이머와는 경우가 다를 것으로 예상이 되기는 하지만, 판사의 인문학적 소양 정도를 알 수가 없으니 글쎄, 글쎄 하는 물음표는 앞으로도 한동안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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