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주는 명료함, 그 뒤편의 것들을 이미지화 시키는 게 과제”
“단어가 주는 명료함, 그 뒤편의 것들을 이미지화 시키는 게 과제”
  • 우정호 기자
  • 승인 2021.07.20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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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김지혜 작가 인터뷰-2

[위클리서울=우정호 기자]

<1회에서 이어집니다.>

김지혜 작가 ⓒ위클리서울/ 김지혜 제공

창작하는 사람,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계기가 전부 기적적이고 스펙터클한 건 아니다. ‘어느 날 꿈에 신이 나타나 조각을 하게 했다’와 같은 카톨릭 성인전에나 나올 만한 얘기보단 ‘인기가 얻고 싶어 기타를 잡았다’와 같은 친근한 예들이 더 많다. 김지혜는 왜 그리게 됐나? 그녀는 “피아노 학원 가기 싫어서?”라며 웃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피아노 학원을 다녔는데, 도대체 왜 ‘도’에서 ‘파’로 손가락을 옮겨야 하는 지도 잘 모르겠고 너무 재미가 없었어요. 그러다 바로 옆 미술 학원에 우연히 가게 됐는데 사물들을 보고 아무 것도 없는 평면에 옮기는 행위가 너무너무 재밌는 거예요. 칠성사이다 병을 그리는데 붓을 빠르게 그으면 되게 매끈한 느낌이 표현되고, 붓을 느리게 하면 눅눅한 느낌이 표현되는 게 너무 신기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유치원에서 ‘과학 상상화 그리기’를 시켰을 때가 기억났다. ‘실체도 없는걸 백지에 그리라고 하는데 단 한 줄도 그리지 못했다’고 했더니 그녀는 “‘한 줄’은 글 쓸 때 쓰는 표현이고 보통 ’한 선‘이라고 표현 한다”고 고쳐주었다. 여유 있는 웃음과 함께.

“그리게 되니까 자연과 가까운 당진이라는 도시 환경도 감사했어요. 노트만 있으면 뭐든 그릴 게 있고. 학교 안에 소각장이 있었는데 쓰레기 버리고 오는 소각장 당번을 돌아가며 시켰어요. 보통 싫어하죠. 비위 상하는 일이니까. 그런데 저는 소각장조차도 인상적이었어요. 잘 살펴보면 색이 다채롭잖아요. 엄청 다채로운 녹색과 녹슨 색들이 섞여있고, 떨어져 있는 쓰레기들마저 각각의 색을 다 가졌고.”

해안도로, 97x162.2, 캔버스에 아크릴 페인팅, 2020
해안도로, 97x162.2, 캔버스에 아크릴 페인팅, 2020 ⓒ위클리서울/ 김지혜 제공

그녀는 “똑같이 그리는 걸 잘 못했다”고 했다. 수채화 교실에서 취미로 그림을 배우거나, 입시미술 기초반에서 기계처럼 ‘잘’ 그리는 능력을 키울 게 아니라면 창의적 예술 활동에 있어 그런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을 것이다. 화가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가 1839년 사진기를 발명한 이후부터. 

“중학교 때 야외에서 열린 풍경화 사생대회에 나갔는데 도중에 비가 왔어요. 그랬더니 강당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미리 찍어놓은 풍경 사진을 보고 그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냥 사진만 보고 그리는 건 ‘진짜가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보고 그리라고 나눠준 사진에 있는 장미꽃에 비를 맞게 하자는 취지로 처음 스케치했던 그림을 번지게 하고 효과를 줘서 제출했죠. 똑같이 그리라는데 오기를 부렸으니 대회에선 실격 당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저는 똑같이 그리지 않는 데서 희열을 느꼈어요. 멋지다고 생각했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허용되는 이걸 직업으로 가지면 되게 행복하겠다고 그때 생각했어요.”

태어나서 한 번도 미술관을 가지 않은 사람이라도 ‘미술가’라는 직업을 떠올리면 으레 ‘귀를 자른 고흐’ 같은 단어를 떠올리곤 한다.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는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라고 했다. 고통과 한 마저 재료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즉, 행복과 괴로움, 따뜻함과 외로움이 공존하는 직업. 그렇다면 김지혜의 재료는 무엇일까?

“어둠의 영역이 엄청 큰 상태, 너무 눈이 부셔 어지러울 정도의 상태랄까. 환경이 극단적인 상태에서 감흥을 얻는 편이에요. 그런 감흥을 세분화해서 그림에 오목조목 다 넣고 싶고. 2018년, 을지로 ‘개방회로’에서 그림 두 편만 놓고 전시 한 작품을 예를 들면, 장마철에 밤에 산책을 하다 공사장 흙을 쌓아놓은 게 서서히 와르르 무너지는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상태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그걸 보고 어떤 관계를 생각하게 되고, 흙이 무너지는 자체의 색감과 어떤 아름다운 장면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머릿속에서 미시적인 드라마를 만들었어요.”

“해저나 우주에 관한 것들도 재료가 되죠. ‘우주’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지금까진 ‘우주가 주는 공포’가 먼저 떠올랐는데, 최근에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에서는 지평선이 있는 그림을 떠올리고, 오히려 평면적으로 나열된 안정적인 느낌의 그림을 그리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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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미지1 3 Room Stitching(전시전경)2018, 디지털이미지2 City, Digital Painting, 2020 ⓒ위클리서울/ 김지혜 제공

"의도치 않게 ‘새로운 기호’ 얻을 때 성취감 느껴"

미술가의 성취감은 어디서 오는가. ‘좋은 결과물을 만들었을 때’와 같은 교과서적인 대답을 제쳐 놓으면? 큰 전시를 마쳤을 때? 작품을 많이 팔았을 때? 유명한 레지던시 공모에 합격했을 때? 혹은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많이 모았을 때? 김지혜는 “의도치 않은 것이 나왔을 때”라고 했다. 삶의 가장 큰 가치는 ‘창작’에 있다고 말하듯이. 

“기초적인 작업을 반복적으로 쌓아가고 있거나, 해오던 패턴대로 작업을 계속하다가도 의도치 않게 새로운 형태가 태어날 때가 있어요. 작게 만들어 놓은 조각들을 붙여보니 어떤 형상이 보인다든지. 그걸 재현하고 새로운 기호가 생길 때 ‘아, 이게 바로 내 거구나’하면서 큰 희열이 생기죠. ‘이걸 가져가야겠다’는 확신도.”

풍경화 같은 팝아트로 유명한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현대예술가라는 데미안 허스트, 낙서를 예술로 만든 뱅크시조차도 그들의 작품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작가로서의 삶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그저 자기만족을 위해 하루 종일 선을 그어대는 ‘별종’ 정도로 취급됐을지 모른다. 김지혜는 작품을 본 이들의 독창적 언어가 스민 피드백에 반응한다고 했다. 작년 그녀의 개인전 'pickles'를 보고 내 노트에는 ‘무거운 안쪽을 간결하게 바깥으로 내놓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적혔다.

“관객의 대상에 따라 다르긴 한데, 아이들이라면 제 그림을 보고 ‘나 그림 그리고 싶어’라고 말하면 가장 좋아요. 평론가나 예술을 공부했던 사람들일 경우, 제 그림을 보고 새로운 시 언어를 꺼내게 될 때 흥분이 되더라고요. 제가 독창적 단어 표현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이들인데도 ‘저건 노란색인데 달이 납작해진 거 같다. 달이 우울한가 봐 엄마’ 이런 표현을 하는 걸 들으면 아주 난리가 나는 거죠.” 

작품을 훌륭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작가는 드물다. 모든 사람의 언어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고, 각자 가진 ‘달란트’ 역시 다르다. 하지만 작품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의 질문에 두리뭉실한 대답을 늘어놓거나 ‘그냥’이라고 답한다면 그 혹은 그녀의 예술이 얼마나 존중받을 수 있을까? 

김지혜는 2013년 개인전 ‘13분 50초에서 14분의 성가퀴’에서 작품들을 자신의 독창적인 단문들과 함께 배치했다. 그녀의 훌륭한 언어는 또 다른 작품이 됐다. “글과 이미지를 잘 엮어서 작품이 보일 수 있는 효과를 증폭시키고 싶은 의도가 있었어요. 그리는 행위와 쓰는 행위가 서로 다른 각각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한 평론가는 제가 지난 20년간 작품을 만들며 메모했던 글들과 이미지를 조화한 전시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어요. 저도 그 얘기를 듣고는 ‘멋지겠다’, ‘하고 싶다’고 얘기했었죠.” 

한편, 순수예술가에게 ‘대중성’이라는 가볍고 무거운 단어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언젠가는 해내야 할 과제? 혹은 투명함을 탁하게 하는 일종의 채색?

“어려운 건데, 진짜. 예를 들어 데이비드 호크니 작업이 사실 엄청 매니악한데 이게 좋은 기획으로 대중성을 획득했잖아요. 저한테는 대중성이라는 건 그런 느낌이에요. 그걸 이루기 위한 길은 작품성보다는 기획의 영역에 가까운 거 같고. 대중성을 획득한 작가들도 실제로 순수예술을 하고 있기도 하고. 획득하면 좋은 게 대중성이란 생각은 하지만, 어떤 예로는 창의력이 뛰어나지 않지만 비슷한 작품을 대량 생산해내는 작가라고 해도 대중성을 획득할 수는 있는 거죠. 그것도 하나의 전략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런 작가들이 많아지면 사람들이 예술을 볼 수 있는 영역이 좁아지잖아요. 그걸 응원하진 않고. 그래서 다양한 작가들을 자꾸 발굴해서 펼쳐 보여주는 기획의 중요성도 더 커진다고 생각해요.”

‘기성작가’의 문턱. 앳된 얼굴로 여전히 ‘반가운’ 방황 중인 그녀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뜻밖에, “모르겠다”는 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어떤 방향에 집중해야 할지는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거라 어떻게 해야겠다 방향을 미리 설정하는 건 잘 안되더라고요. 계획이 뚜렷한 페인터들도 있지만 붓을 들고 빈 공간을 마주쳤을 때 나오게 되는 편이에요. 어떤 ‘단어’가 주는 명료함이 있으면, 그 명료함 뒤에 있는 것들을 이미지로 풀어내는 게 과제인 것 같다는 생각은 해요.”
 
“좀 더 가깝게는, 음악 협업했을 때 ‘산’이라는 이미지를 제가 그리면, 스프레이로 뿌린 것처럼 희미하게 하거나 꾹 누른 연필로 그리거나 해서 이미지를 만들었더니 음악가들이 각자의 언어로 예상치 못했던 것들을 사운드로 만들어 냈어요. ‘산’이라는 글자 하나가 이렇게 다른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이 단어가 가진 개념 뒤에 다른 감각의 영역들이 있는데 이런 감각들을 캐치하는 작업들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가 하는 일이 뭘까?’ 질문을 던져보면 ‘뭔가 색으로 크고 작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인터뷰 동안 ‘영향 받은 미술가는 누구인가?’, ‘롤 모델이 있나?’와 같은 상투적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오직 그녀가 발산하는 다양한 색채에만 눈이 향했기 때문에.

 

김지혜 작가 프로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개인전
2020 피클스, 당진문예의전당 제 1, 2전시실
2019 쓰리룸 스티칭, 예술공간 서로
2019 턴 어라운드 라잉 다운, 고양아람누리 제 3전시실
2018 plastikos pot, 갤러리 도스
2018 외인 너머에 외인, 개방회로
2016 미필적 고의에 의한 행간, 로딩조각센터
2013 13분 50초에서 14분의 성가퀴, 갤러리 가이아
 
단체전
2019, 돌리 돌리 더 스페이스, 공간칠일 
2019 풍경, 갤러리 화이트버치
2018 drawing on paper, 예술공간 서로
2018 풍경, 갤러리 화이트버치
2017 화가의 자화상, 갤러리 두인
2016 그룹 23.5, 갤러리 반디트라조
2015 그룹 23.5, 갤러리 이마주
2011 서울 컨템포러리,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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