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다산 정약용

[위클리서울=박석무] 어느 때보다도 근래에 ‘공정’이라는 단어가 화두가 되면서, 부쩍 불공정한 수사나 재판도 문제가 되지만, 불공정한 세상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게 해주고 있습니다. 멀리 조선 시대부터 우리 역사는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을 양산하여,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죽어간 원혼들이 우리 주변에 맴돌고 있음을 역력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의 남이 장군이 역모에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것을 비롯하여, 대학자이자 개혁가였던 정암 조광조가 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30대의 새파란 나이에 귀양지에서 사약을 마셔야 했던 것만 생각해도 얼마나 억울한 죄인들이 많았던가는 금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일에서도 사건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죽산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어갔던 일에서, 인혁당 사건의 8명의 통일운동가들이 턱없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져갔던 사실만으로도 억울한 죽음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정권 보위를 위해, 정치적 반대자들에게는 모략과 중상을 끊이지 않게 감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가짜 뉴스와 근거 없는 사실을 조작하여 인간의 생명을 멋대로 앗아갔던 사실들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죽음이야 면했기 때문에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지만, 다산 정약용 또한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와 증언이 있었지만, 모략과 중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18년의 긴긴 유배살이를 했던 사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억울한 수사와 재판을 받았었나를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가 무죄로 풀어줄 것을 의논했으나 유독 서용보(徐龍輔)만이 고집을 부려 안된다고 해서, 나는 장기현으로 유배를 당했다.[諸大臣皆議白放, 唯徐龍輔執不可, 鏞配長縣 : 自撰墓誌銘]”라는 글에서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 재판을 받았나를 알게 해줍니다.

죄 없는 사람을 유배 보낸 것도 분이 풀리지 않아, 다산을 죽여야만 한다던 반대파들은 또 옥사를 일으키며, 다시 유배지에서 체포해다가 재차 국청을 열어 심문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801년 겨울의 ‘황사영백서사건’의 일입니다. 봄의 ‘신유옥사’에서 붙잡히지 않고 제천의 토굴에 숨어서 ‘백서(帛書)’를 작성하여 중국 교구로 보내려던 차에 그것이 발각되어 황사영의 국청이 열리자, 이미 귀양가서 황사영과 연결될 어떤 방법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반대파들은 다시 중상모략하고 또 가짜 뉴스를 제작하여 이번에는 기어코 정약용을 죽여야 한다고 감옥에 처넣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문을 가하고 혹독한 심문을 했어도 사실이 아닌 이상, 정약용에게 죄를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양지만 바꿔, 강진으로 옮기고 말았습니다.

중상·모략과 가짜 뉴스로 얼마든지 억울한 옥살이나 사형까지도 시킬 수 있는 것이 옛날이나 지금의 수사와 재판입니다. 억울한 수사와 재판이 그치지 않는 한, 절대로 공정한 세상은 올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신문에 ‘오염된 증거’라는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증거주의 재판에서 증거까지 오염 시킬 수 있다면, 공정한 재판은 난망입니다. 다산이 ‘억울한 재판이 없기를 바란다’[冀其無寃枉]라던『흠흠신서』저작 목적이 다시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증거까지 오염 시킬 수 있다면 억울한 재판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시끄럽게 했던 수사가 증거까지 오염 시켰다면 억울한 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