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부처의 얼굴을 매만지는 듯
죽은 부처의 얼굴을 매만지는 듯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1.08.12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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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룸비니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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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비니는 너무 추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더위와 추위 중 어느 것이 더 싫으신지. 요즘 같은 무더위 속에서도 나는 확실히 추위가 더 싫다. 여행을 하는 동안 확실해졌다. 실은 더위를 조금 더 버거워했던 내가 마음을 바꾼 곳은 히말라야 산지도 아니고 사막의 밤도 아니고, 부처가 태어났다는 네팔의 룸비니다. 체감하는 온도는 상대적이라고 했던가, 룸비니의 게스트하우스 방은 정말 추웠다. 아마 10도 안팎의 기온이었을 테니 생각해보면 그렇게 버티기 힘든 날씨는 아니었을 텐데 도리 없이 추웠다. 오랜만에 도미토리가 아닌, 침대 두 개 딸린 더블룸에 묵는 호사스러운 날이었지만 묵었던 방에는 온기라고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하얀 타일로 뒤덮인 바닥은 여름이라면 퍽 시원할 법 했는데 건조한 겨울에는 냉기로만 가득했다. 어쩌면 내가 얕은 감기에 걸려있던 것인지도. 침대 위에 경량침낭을 피고 그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밤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때 확실히 알았다. 더우면 짜증이 나지만, 추우면 서럽다는 것을. 온기 나눌 사람 하나 없는 독방에서 추위는 서러움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실은 홀로 겪는 추위가 가장 버티기 힘든 것이었는지도.

사실 룸비니에 꼭 와야 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내가 받은 네팔 비자는 단 15일이었다. 그 안에는 히말라야 트래킹과 포카라와 카트만두를 둘러 볼 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빠듯했다. 그렇다고 여유 있게 30일 비자를 신청하기에는 가격과 일정이 부담이었다. 그래도 일전에 인도에서 불교의 성지 중 하나인 사르나트를 방문한 이후, 부처가 태어났다는 룸비니에도 한 번 들러보고 싶었다. 룸비니에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는 거대한 사원 군이 있다. 단순히 거대한 것도, 오래되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은 아니다. 룸비니는 부처의 탄생지고, 불교 최대의 성지다. 이곳의 사원 군에는 여러 나라의 불단에서 만들고 관리하고 있는 각국 특색의 사원들이 모여 있다. 네팔 정부가 그 부지를 일종의 대사관 소재지처럼 장기 임대식으로 제공하고 있다고 들었다. 중국 절, 미얀마 절, 태국 절, 티베트 절, 등등이 계속 놓여 있는 거대한 사원 군. 한국 불교에서 지어 놓은 대성석가사라는 절도 있다. 심지어 독일 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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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비니 가는 먼 길

마침 룸비니는 인도에서 네팔 포카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었다. 네팔 가는 김에 잠깐 들리는 식으로 들리지 뭐, 생각했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종교적인 것에 대개 흥미를 느끼는 편이고, 다른 종교보다는 불교에 조금 더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으니 여기까지 와서 한 번 쯤 룸비니에 들리는 것도 좋은 일일 것 같았다. 이상하게 룸비니, 라는 이름에도 매력을 느꼈다. 어딘가 귀엽고 비밀스러운 이름이 아닌가? 이름은 이름일 뿐인 걸 아는데 사람이든 사물이든 도시든 마음에 드는 이름이면 왠지 더 정이 간다. 부처의 가르침 중 하나는 ‘이름’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인데. 아무튼 나는 부처와 이름에 이끌려 단 이틀을 머물기 위해 룸비니로 향해왔다.

지난한 여정이었다. 한 번에 긴 시간을 들여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건 꽤 익숙했지만 하루 종일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갈아타는 길은 분명 피곤했다. 인도 바라나시에서 국경을 넘어 룸비니로 향하는 과정은 대략 이렇다. 먼저 바라나시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국경 근처에 도시 고락푸르로 간다. 고락푸르에서 작은 밴을 타고 몇 시간을 더 가면 인도와 네팔의 국경이 나온다. 국경은 그냥 뻥 뚫려있고 노점 사이에 슥 놓여 있는 출입국 사무소에서 알아서 도장을 받아가야 한다. 수많은 환전상과 노점들, 나라의 경계가 애매한 먼짓길을 지나 네팔 쪽의 사무소에서 비자를 구매하고 입국 도장을 받은 후, 다시 룸비니로 향하는 버스가 있는 곳을 향해 작은 봉고차를 타야 한다. 풍경이 어딘가 조금 더 회백색으로 변했다는 느낌을 받으며 룸비니 행 버스를 타고 한 두 시간을 더 달린다. 그러면 결국 부처가 태어났다는 룸비니에 닿는다. 생각해보면 그다지 복잡한 여정이 아닌 것도 같은데 의외로 몸과 정신이 피로했다. 고락푸르로 향하는 야간열차에서 푹 자고 일어났을 때는 다른 인도인들을 따라 천장에 달린 선풍기 위에 올려놓았던 내 샌들이 사라져 있었다. 아, 여행 잘하라고 어머니가 선물해준 신발인데, 역시 인도는 인도인가. 괜히 인도 사람들 욕하다 내려간 기차 바닥에 샌들이 떨어져 있었다. 아무도 내 샌들을 훔쳐가지 않았다.

고락푸르의 새벽 풍경은 정신없었다. 누가 봐도 인도에서 영적 체험을 얻었을 것 같은 ‘옴’ 무늬가 그려진 악기를 들쳐 맨 독일인 여자와 마주쳐, 국경으로 향하는 사람으로 꽉 찬 미니밴에 몸을 구겨 넣었다. 국경의 풍경은 누군가 한 번도 정리한 적 없는 잡초 밭 같았고, 네팔 측의 사무소에서는 내가 가진 달러에 흠집이 있다며 돈을 다시 가져오라고 했다. 환전소의 환율에 눈탱이를 맞고 혼미한 정신으로 슬퍼하던 도중, 어디선가 나타난 굳세게 생긴 네팔 아저씨가 나의 행선지를 묻고 내가 향해야할 길을 일러주었고,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냥 에이미라고 기억하고 싶은 독일 여자애는 포카라행 버스에 탄 채 내게 손을 흔들었다.

룸비니행 버스 정류소로 향하는 마을버스에는 역시 사람들이 가득했다. 내 배낭은 어쩔 수 없이 열린 문 쪽에 걸쳐져 있었는데, 나는 저 짐들이 떨어진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뛰어내려 짐을 향해 뛰어야하나, 사람들 사이에 구겨져 생각했다. 겨우 무사히 내려 룸비니 행 버스로 갈아탄 이후, 운전석 옆 자리에 걸터앉은 나는 배낭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는 마치 고등학교 시절 자습 감독 선생님 마냥 괜히 나를 자꾸 깨웠고, 여기선 버스 탈 때 자면 안 되는 규칙이라도 있나 생각하며 꾸벅꾸벅 졸았다. 그렇게 도착한 게스트하우스 방은 말도 안 되게 추웠다. 마음이 추운 건지 몸이 추운 건지. 마음의 추위가 몸을 장악한 건지. 아무튼 한 2500년 전 쯤 이곳 근방에서 석가모니가 태어났구나 생각했다. 적어도 이 근처에서 부처는 자라났겠지. 수목이 많이 바뀌지는 않았을 테니 이런 나무와 흙을 보며 부처가 남쪽을 향해 걸어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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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석가사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사원군의 아이들

룸비니의 사원군은 확실히 독특했다. 거대한 유원지 같았다. 길이나 건물들이 사원군 바깥의 마을과는 다르게 정돈되어 있어서, 일상적인 풍경에서 무언가를 다 빼고 남은 뼈대처럼 보였다. 깔끔한 수로를 통해 물들이 잔잔히 퍼져나갔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넓어서인지 텅 빈 도시의 느낌이었다. 각국의 양식을 딴 독특한 사원들이 하나 둘 이어졌다. 신실한 불자들이나 몇몇 여행객들은 이곳에서 꽤 오래 머물며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한국 절에서도 무료로 잠자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국 절 한 바퀴를 구경하고, 중앙에 세워져 있는 아기 석가모니 동상 앞에서 진지하게 스님의 말을 경청하는 태국 사람들을 바라보고, 사람이 없어 아무도 앉지 않는 줄지어 나란한 벤치들과, 잘 정돈된 수로와 깔끔한 다리들을 보았다. 어딘가 비어있는 풍경. 부처는 텅 비어 평온해지는 법을 깨달은 것일 텐데 나는 텅 비어 허전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걸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며칠 머물며 마음을 가다듬고 절들을 구경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었고, 어딘가 이 거대한 사원 군의 텅 빈 공간은 어딘가 사람을 위압하는 데가 있었다.

사원 군에서 나가는 저녁 길에는 현장학습 나온 듯 보이는 네팔 초등학생들이 내 뒤에서 무리지어 걷고 있었다. 그들은 혼자 걷고 있는 내가 신기했는지, 관심의 표현인지 개구리에게 돌 한 번 던져보는 마음인지, 내게 조약돌을 던졌다. 아픈 돌은 아니었는데 서러운 돌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며 무리지어 웃었다. 그들의 선생님은 근처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 앞에 떨어진 돌을 주워들고, 던진 것처럼 여겨지는 남자 아이 앞으로 갔다. 무리의 웃음이 멈췄다. 나는 그 아이의 얼굴 앞에 돌을 들어 올렸다. 아이의 눈동자와 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이는 겁먹은 표정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움츠린 모양이었다. 나의 표정은 추위만큼 차가웠을 것이다. 시선이 교차하는 동안, 나는 돌을 먼발치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이의 눈동자를 깊게 바라보았다. 아이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동시에 마음의 이상한 동요와 그와 반대되는 평온함을 느꼈다. 아이들을 뒤로 한 채, 나는 전보다 나아진 마음으로 나의 차가운 방으로 돌아갔다. 죽은 부처의 얼굴을 매만지는 듯 차갑고 부드러웠던 돌의 촉감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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