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회상’
김성호의 ‘회상’
  • 김양미 기자
  • 승인 2021.08.30 0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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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요즘 김성호의 ‘회상’이라는 노래가 인기다.

사실 이 노래는 4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90년대 초반부터 많이 불렸던 노래. 음색이 편안하고 가사가 대중적인데다 톤이 높지 않아 따라 부르기 좋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 더더욱 애절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나온 지 32년이나 된 이 노래가 갑자기 사람들 사이로 파고든 이유는 왜였을까.

노래로 치면 언더그라운드 정도의 지방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중소기업 회장님 같은 얼굴로 마이크 앞에 선 은발의 남자. 노래가 시작되기 전 내가 느낀 그 사람의 이미지다. 하지만 노래가 시작되자 나는 숨을 멈췄다.

Back to the past.

순식간에 나는 32년 전, 대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가 있었다. 멜빵바지를 입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가슴에 안은 채 이제 막 입시생에서 벗어난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

고등학교 때까지 여자아이들만 바글대는 학교를 다니다 대학가서 처음으로 남자들과 어울려 수업을 듣고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 한 남자를 알게 됐다. 그 전에 고만고만하게 만났던 남자친구들도 있었지만 하루 24시간을 생각나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술을 마실 때 손가락에 담배를 끼우고 있는 모습도, 웃을 때 살짝 보이는 깨진 이빨도,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까지 내 눈엔 모두 멋있어 보였다.

만난 지 한 달 쯤 되던 어느 날, 대학로 학림에서 만난 그가 말했다.

“오늘 너한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

그가 무작정 데려간 곳은 김광석의 콘서트 장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마치 원숭이에게 카디건을 입혀 놓은 듯 숱이 많은 머리와 까만 눈썹, 턱 밑에 하모니카를 걸고 나와 노래를 부르던 그는 내가 아는 세상 어떤 가수보다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김광석과 안치환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내 세상은 자꾸만 달라졌다. 참고서를 팔지 않는 ‘노둣돌’이라는 서점도 가보게 되고 독립영화라는 것도 처음 보게 됐다. 그 중에서도 홍기선 감독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라는 영화는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살던 나에게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을 보게 해 준 것도 그 사람이었다.

만날 때마다 손 편지를 써서 책에 끼워주기도 했는데 직접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 그 편지가 너무 좋아 외울 정도로 들고 다니며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기쁘고 행복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마냥 좋기만 하던 시간이 지나고 잦은 다툼과 상처가 생겼다. 그러다 내가 먼저 대학을 휴학하고 학교를 떠났다. 지금은 이렇게 몇 줄로 요약 되는 스토리지만 그땐 세상이 몇 번은 깨부숴지고 멸망했다. 다시 내일이 올 것 같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절에 들어가 1년 가까이 처박혀 살았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절에서 한 시간을 걸어 내려와 공중전화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가 받으면 바로 끊어버렸다. 내가 있는 곳으로 그가 찾아오길 기다리며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창밖을 내다보고 앉아 있다가도, 며칠씩이나 머리를 감지 않고 폐인처럼 굴러다니기도 했다.

낭떠러지 끝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냥 여기서 콱 뛰어내려 버릴까 싶다가도 다리가 꺾이고 목이 돌아간 내 모습을 행여 그가 보게 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람 하나를 좋아하는 일이 이다지도 힘들고 고달프고 가슴 아픈 일인지 차마 몰랐다.

절에 주지 스님이, 이렇게 허송세월하며 살 바엔 그냥 비구니가 되어 절에 눌러 앉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가톨릭 신자라 그럴 수 없을 거 같다고 변명했다. 평생 눌러 살기엔 절은 너무 심심한 곳이었다.

그렇게 절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복학을 했다.

전화가 와도, 말을 걸어도 두 번 다시 상종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편지를 주면 그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리라. 내가 그토록 힘들어하고 방황하던 시간에도 혼자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을 그가 너무 미웠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다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한 마디 말에 무너져버렸다.

“같이 밥 먹자….”

웃기지 말라고, 기다려도 절대 안 나간다 해놓고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갔다. 나가서 술을 마시고 울었다. 이제 진짜 끝이라 생각하니 욕도 술술 잘 나왔다.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그날, 나한테 온갖 욕을 들어 먹은 게 충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이 있고 얼마 안 있어 그는 대학원을 휴학하고 강원도 오지 마을로 떠났다. 그리고 탄광촌에 있는 작은 공부방 선생님이 되었다. 첫눈이 오던 날, 털장갑과 목도리를 사서 학교 수업을 빼먹고 기차를 탔다. 4시간이나 걸려 기차역에 도착해 매표소에다 종이가방을 맡기고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얼굴을 보면 거기 눌러 앉아 살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소설 속 주인공처럼 그에게 미련을 남긴 채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게 끝이어야 했다.

영화처럼, 기적을 울리며 떠나는 기차 신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엔딩이어야 했다. 가슴 아프지만 평생 잊지 못할 사람으로 남겨지는 게 맞았다. 첫눈이 올 때마다 생각나고 팔짱을 끼고 가는 커플들을 보거나 누군가 맛있게 피우던 담배를 보면서도 그 사람을 떠올리며 살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아름답게 끝맺지 못했다. 내가 강원도 탄광촌까지 가서 맡겨놓고 온 목도리와 장갑을 청량리역에서 다시 만났고 우리는 결국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

회상 / 김성호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지
그녀는 조그만 손을 흔들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의 눈을 보았지 음
하지만 붙잡을 수는 없었어
지금은 후회를 하고 있지만
멀어져가는 뒷모습 보면서
두려움도 느꼈지 음

나는 가슴 아팠어
때로는 눈물도 흘렸지
이제는 혼자라고 느낄 때
보고 싶은 마음 한이 없지만
찢어진 사진 한 장 남질 않았네
그녀는 울면서 갔지만
내 맘도 편하지 않았어
그때는 너무나 어렸었기에
그녀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네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한두 번 원망도 했었지만
좋은 사람이었어 음
하지만 꼭 그렇진 않아
너무 내 맘을 아프게 했지
서로 말없이 걷기도 했지만
좋은 기억이었어
너무 아쉬웠었어

때로는 눈물도 흘렸지
이제는 혼자라고 느낄 때
보고 싶은 마음 한이 없지만
찢어진 사진 한 장 남질 않았네
그녀는 울면서 갔지만
내 맘도 편하지 않았어
그때는 너무나 어렸었기에
그녀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네 음….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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