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이슬람에 대한 간단한 논리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아프가니스탄의 무슬림

뉴스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야기가 한창이다. 20년 동안 주둔해오던 미군이 철군을 결정했고, 탈레반은 끝내 카불 공항을 점령했다. 아프간에서 탈출하려고 비행기에 매달린 사람들은 떨어져 죽었다. 갓난아이가 사람들 틈에서 죽기도 했다. 탈레반은 이전과는 다르게 덜 극단주의적인 정책을 펼치겠다고 예고했지만, 그들은 뉴스에 총을 들고 나타났다.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고 살해당했다는 여성의 이야기도 벌써 들린다. 불투명한 아프간의 미래 속에서 여전히 시민들은 나라를 탈출하려 하고 있다. 각국의 우려 섞인 반응들. 역시 우려 섞인 한국 시민들의 반응들. 그 중 눈에 띄는 댓글들. ‘이슬람교를 축출해야 한다.’ ‘이슬람교는 악 그 자체다.’

당신은 이슬람교에 대해 생각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시는지. 사막과 터번, 수염을 잔뜩 기른 중동 남자들과 머리카락을 히잡으로 감싼 여자들, 테러리즘, 인권 탄압, 광신주의, 카페트 위에서의 경건한 예배, 내전과 폭력? 어쩐지 모조리 이상하고 부정적인 것들. 한국에서는 이슬람교를 접하기도, 무슬림을 만나기도 어렵다. 우리가 접하는 것들이라고는 세계 뉴스에 한 칸을 장식하는 테러와 내전을 다루는 뉴스 뿐. 우리의 정의롭고 착한 ‘미국’을 위협하는 더러운 악의 축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이슬람은 그저 낯설고 폭력적인 광신주의의 이름으로 비춰지기 일쑤이고, 나도 사실 그렇게 다르게 느끼지는 못했었다.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으니까. ‘모르는 것’은 언제나 두렵거나 더러운 이름이 되기 쉬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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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내가 만나왔던 무슬림들을 생각한다. 무슬림 친구들과 그들이 살고 있던 이슬람 국가의 분위기를 생각한다. 그들은 두렵고 무서운 얼굴이었나? 친한 얼굴을 들이밀다 남몰래 테러를 획책했나? 억압적인 분위기의 거리에서 짙은 눈썹을 치켜 올렸나? 전혀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얼굴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슬람은 매우 다양한 문화권에서 어느 정도 각자의 사정에 맞게 받아들여진 종교다. 기독교처럼. 그렇기에 이슬람을 단순히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묶기는 때로 어렵다. 간단하게 말해, 이슬람에서 탈레반을 뺀 나머지 것들은, 너무나도 많다. 이슬람이 곧 테러집단과 같은 말이 아니란 말이다.

한국인들이 좋아해 마지않는 터키 국민의 대다수 역시 무슬림이다. 그들은 (명목 상으로는) 국가와 종교를 우리처럼 분리해서 이해한다. 술도 마시고, 할 거 다 한다. 히잡을 쓰지 않는 여성들도 많다. 도시를 중심으로 본다면 히잡 착용은 개인의 자유의 영역에 가깝다. 우리나라에 이른바 보수적인 유교 전통이 잔존하듯, 터키 역시 그런 면이 있을 뿐이다. 우즈베키스탄 역시 그랬고, 인도에서 보았던 이슬람 지역들도 그랬다. 다양했다. 더 보수적인 곳이 있었고, 덜 보수적인 곳이 있었다. 엄격하게 종교적인 사람이 있었고, 종교에 개의치 않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주중에 진탕 술을 먹고 주일에 모스크에 가서 회개하는 젊은 무슬림들도 있었다. 기독교도들처럼. 우리가 흔히 보는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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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슬람의 종교적 특질에 대해서까지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슬람은 당연히도 우리가 보아왔던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 당연하다. 다른 종교니까. 그들이 다른 종교보다 조금 더 보수적인 면이 많은 것도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다른가? 그들의 교리에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총칼로 위협하라고 써있는가? 그들의 교리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좋은 말씀’과 비슷하다. 살생하지 말고, 거짓말 하지 말고, 도덕과 윤리를 지키라는 말들. 우리가 듣는 좋은 훈화처럼.

그들의 종교서에 적힌 특이한 부분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든지, 이교도를 가혹하게 대하라든지, 하는 말들은 성경에도 유사하게 존재한다. 애초에 이슬람은 사막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와 같은 계통선에 놓여 있다. 역사에 따라서 교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수용할지가 변화해왔고, 기독교가 그래왔듯 이슬람교 역시 그래 왔다. 다만 아직까지도 보수적인 세력이 남아있고, 극단적인 단체가 테러 세력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슬람교가 곧 탈레반과 같은 테러 단체는 아니다. 오히려 탈레반 같은 단체야말로 진짜 이슬람교도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쿠란과 하디스의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역사적 시차를 무시하고 극단적인 이슬람주의 통치를 구축하고자 한다. 사람을 죽이고, 풍자와 웃음을 금지하고, 삶을 온통 경직된 종교로 떡칠하려고 한다. 그들이야말로 근본적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꿈꿨던 원래의 이슬람 정신을 배반하고 있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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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람의 얼굴

내가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세이’는 아프가니스탄 내전 이후로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아프가니스탄계 40대 캐나다인이었다. 20대에 캐나다로 떠난 그는 긴 시간 캐나다에 정착해 기업인으로 살고 있었고, 휴가를 떠나 중앙아시아 지역을 장기여행 중이었다. 그 또한 무슬림이었다. 다만 세속주의적인 무슬림. 모든 무슬림이 시간에 맞춰 카페트를 깔고 메카를 향해 절하는 것은 아니다. 세이는 술을 즐겨 마셨고, 여성들이 의무적으로 히잡을 착용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당연히 탈레반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만난 우즈베키스탄 역시 이슬람교가 대부분인 곳이었는데, 이곳의 분위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슬람이라는 광신주의적 종교를 여전히 믿는 우매한 사람들이 아니라 회당 안에서 경건하고 회당 밖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너무 간단한 논리인가?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다는, 모든 무슬림들이 그렇지는 않다는 식의 논리. 그러나 이 간단한 논리는 간단해서 진실이다. 모든 무슬림이 종교적 폭력에 심취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그 폭력의 첫 번째 피해자가 되는 것도 바로 그 무슬림들이다. 극단주의자들이 ‘자하드’라고 외치며 미군에게 박격포를 날리는 모습이 이슬람의 전모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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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터키에서는 또래의 무슬림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지크란은 내가 터키에서 만난 다른 여성들보다도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편에 속했다. 그녀는 시간에 맞춰 꼭 기도를 하러 갔고, 자신의 종교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종교에도 흥미와 관심을 보였다. 지크란에게 기독교는 비슷한 믿음을 공유하는 동료 종교인이었다. 자식을 낳으면, 다양한 종교를 설명해주고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 교육하고 싶다고 말했다. 늘상 문제가 되는 ‘히잡’에 대해서는? 지크란은 말했다. 쓰고 말고는 우리의 일이다. 무슬림 ‘여성’들의 일이라고. 무조건 쓰라고 하는 극단주의자들과 무조건 벗으라고 하는 자칭 인권주의자들 사이에서, 당사자인 무슬림 여성의 목소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쓰거나 벗게 하는 게 아니라, 쓰거나 벗을 자유를 보장하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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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많은 무슬림을 여행 중에 만날 수 있었다. 터키 가지안테프에서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었던 ‘오마르’의 까슬한 수염, 인도의 푸쉬카르에서 우리와 섞여 놀았던 ‘미키’, 다수의 힌두교도 사이에서 차별받아 거리 시위에 나섰던 흰 모자를 쓴 인도의 이슬람교도들 등등. 그들은 그저 그들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얼굴로 살아갈 수 있는. 억압적 폭력을 거부하고, 자신 가족의 안위와 나라의 평화에 신경 쓰는. 주류 민족이기도 하고, 소수의 부족이기도 했던 그들은 그렇게 다양한 무슬림들이었다.

밤마다 집으로 귀가하는 나의 길에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한 초록색 조명들이 줄지어 이어져 있다. 그 빛나는 초록색 빛무리를 바라보며 나는 인도의 이슬람 축제 때 보았던, 같은 방식으로 빛나는 초록 조명들을 떠올린다. 이슬람의 상징인 초록. 그 축제에서 사람들은 해맑게 웃었고 아이들은 어설픈 철제 놀이기구에 올라타 깔깔댔고 주변의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경건하게 기도했다. 이곳의 초록 불빛이 귀가자의 안전을 위한 것이듯, 곳곳에 사람들이 초록빛 속에서 자신의 안전을 향한 길을 찾기를. 아프가니스탄의 사람들, 시민인 동시에 무슬림이기도 한 그들이 자신의 운명과 안전을 보호해낼 방법을 찾기를. 내게는 종교가 없지만, 그것을 위해서라면 알라에게 기도할 수 있다. 알라는 그저 ‘신’이라는 뜻, 누구의 신이라도 될 수 있으므로.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인 날에 불빛은 계속 초록빛으로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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