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성어 ‘수구초심’을 거리에서 만났다
사자성어 ‘수구초심’을 거리에서 만났다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1.09.17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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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을이다
가을이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사람이란 역시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인가 보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옛 것들이 자꾸 그리워진다. 내 나이 아직 일백 실도 안 되었고, 일백 살을 채우기로 하자면 아직도 까마득하건만, 소년 시절이 오백 년이나 천 년 전의 일이었던 것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십 년 아니 오 년 전쯤의 일이었던 것처럼 선명하게 확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일시적인 환상일 뿐이다.

소년 시절의 명절은 설렘이었고, 아쉬움이었다. 최소한 보름 동안은 알 수도 없는 희망으로 가슴이 마구 부풀어 올랐다. 부푼 가슴이 여운을 남기며 쪼그라들기까지는 또 최소한 열흘이 걸렸다. 그러니까 그때의 명절은 대충 어림잡아도 한 달이었던 셈이다. 한 달여 동안 만들어지는 가슴 뭉클한 에피소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그것은 내 안으로 속속 들어와서 내 재산이 되어갔다.

오늘날의 명절은 길어야 하루 아니면 이틀이고, 가슴을 뭉클하게 살살 어루만지는 에피소드를 만나기도 어렵다. 어디에서 어떤 방식의 교통사고로 몇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 아니면 오랜만에 만난 형제자매가 상속 문제로 다투다가 살인에 이르렀다는 뉴스가 도처에서 흘러나오고 있으니 뭐랄까, 돈은 옛날에 비해 엄청날 정도로 많아졌지만 마음은 반비례로 엄청나게 가난해져 버렸다는 느낌이다.

그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며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꽃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린 것만 같다. 그대로 앉아 있으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벌떡 일어서서 여기저기 아무 데로나 좀 쏘다니자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길가에서 하늘거리는 코스코스가 우리 집 마당의 코스모스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뭐가 어떻게 왜 달라 보이는 거지? 의아해서 차를 세우고 문을 여는 순간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초로의 남녀 한 쌍이 쓰윽 다가온다.

“말 좀 물읍시다. 여기 어디에 저기, 옛날에 00국민학교가 있었지 않았을까요?”

질문을 받고서야 나도 알았다. 맞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지금은 정문조차 없어져서 건성으로 지나갈 때는 의식하기도 어렵지만, 지형지물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아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은색 콜타르를 칠한 판자와 함석으로 지은 건물 두 동과 뱀처럼 길게 늘어선 푸세식 변소간 그리고 소사동 한 채로 구성된 학교, 국민학교는 일제의 잔재라 해서 지금은 초등학교로 불리고 있지만, 그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에게는 역시 초등보다는 국민이 더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그런가 보다. 이들 부부도 그 시절에 이 학교를 다녔던 모양이다. 이십 년도 훨씬 전에 폐교가 돼서 지금은 형체조차 남아 있지 않은, 플라타너스와 벚나무가 운동장을 에워싸고 있었던 그 시절의 학교가 새삼 그립다.

 

옛날에는 화려했던 방앗간
옛날에는 화려했던 방앗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러고 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그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이 어른거린다.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누구지? 누굴까?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한 마디 두 마디, 한 문장 두 문장 말을 섞어가는 어느 순간 훅, 다가오는 그림이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알았다. 남녀 한 쌍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쌍이 아니라 남매지간이라는 것을.

머리채를 잡힌 채로 거칠게 흔들리다가 픽 쓰러진 엄마를 붙잡고 앙앙 울어대던 네 살이나 다섯 살 혹은 여섯 살쯤의 여자아이 둘과 남자아이 하나가 떠올라 온다. 그 아이, 그 아이들, 눈물과 울음소리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아이들이 저렇게 커서 저렇게 늙어가고 있구나.

학교 앞에 구멍가게가 넷 있었다. 넷은 언제인가 다섯이 되었다. 아직 학교도 다니지 않는 여자아이 둘과 사내아이 하나 그리고 어른 여자 한 명으로 구성된 가족이 새로 구멍가게를 연 것이었다. 있어야 할 어른 남자는 없었다. 어른 남자가 왜 없는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갑자기 나타난 그들이 다만 신기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새로 집을 지어서 구멍가게를 낸 것도 아니었다.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구멍가게 주인 남자가 그때만 해도 새로운 물질인 시멘트 벽돌로 자신의 구멍가게 옆에 새로 집을 한 채 지어서 세를 내준 것이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아이들은 새로 생긴 구멍가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학용품이나 군것질거리를 살 목적으로만 몰려가는 게 아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습관적으로 몰려가서 떠들어대며 상급 학년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때가 그런 시절이었다. ‘용천뱅이’이란 이름의 괴물이 아이들을 노린다는 소문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처에 호밀밭이 있었다. ‘용천뱅이’는 호밀밭에 숨어서 꼬맹이들을 기다린다. 커다란 칼을 숫돌에 쓱쓱 갈아대며, 기다리던 꼬맹이가 나타나면 재빨리 튀어 나와서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 먹는다는 거였다. 때문에 우리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엄두를 못 내고 상급 학년 형이나 누나들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곤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나오면 정문 바로 앞에 방앗간이 있어서 운수가 좋으면 떡을 얻어먹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방앗간에서 부대사업으로 운영하는 또 하나의 구멍가게 바로 앞 미루나무에 묶여 있는 커다란 황소가 흥미진진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황소는 당시만 해도 보기 드문 갈색 바탕에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고, 덩치가 어찌나 큰지 그야말로 집채만이나 했고, 커다란 생식기를 항상 절반쯤 드러내놓고 있어서 아이들은 날마다 보면서도 날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생식기 자체가 전부인 것은 아니었다. 황소는 아무 하는 일 없이 그냥 거기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서로 눈짓을 해가며, 키득거리며 내심 기다리고 있었다. 황소가 필요해진 암소가 찾아오는 그 시간을,

 

지금도 운영중인 방앗간
지금도 운영중인 방앗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소는 신기한 동물이어서 새끼를 낳아야 할 때가 되면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울부짖는 소리가 이틀을 넘어 사흘째 계속되면, 그때 황소에게 데려가서 이른바 ‘대붙이기’를 하면 정확하게 새끼가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 황소에게나 데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씨가 좋아야 했다. 방앗간 집 황소는 씨가 좋은 걸로 널리 소문나 있었고, 한나절씩이나 걸려 암소를 데리고 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고 볼 수는 없어도 어쨌든 심심찮게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동물의 짝짓기가 우리의 성교육이었던 셈인데, 토끼나 개, 닭들의 짝짓기는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뭐 구경할 것도 없는 시시한 일상의 한 풍경일 뿐이었다. 소는 같은 동물이라도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일단 덩치가 엄청나게 커서 액션이 거칠게 리얼했고, 간이 떨리게 무서우면서도 눈 한 번 깜빡거릴 틈이 없이 재미가 컸다.

그 좋은 재미를 날마다 맛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어쩌면 날마다 ‘대붙이기’ 행사가 벌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긴 하지만, 집에서 학교까지 오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왕복해야 하는 우리에게 허용된 자유시간은 하루에 두 시간 남짓일 뿐이었다. 때문에 잘하면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그 좋은 구경거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평상시의 우리는 막연히 그냥 기다리며 황소의 생식기나 지루하게 쳐다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우리에게 새로운 관심거리가 생겼다. 그 당시 구멍가게의 주인이란 대체로 친절과는 거리가 멀었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안 살 거면 나가’라거나 ‘함부로 만지지 마 이놈아’ 정도로 고정돼 있어서 가까이 할 수 없는 당신들이었지만, 새로 생긴 구멍가게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 마치 신세계에서 온 사람들 같았다.

일단 주인아줌마의 언행이 남달랐다. 자기네 가게를 찾아주는 아이라면 누구든 예외 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난 너희들 이모란다. 앞으로는 이모라고 불러 응?’ 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대번에 그 아줌마를 이모라고 여기게 되었다. 아직 학교도 다니지 않는 나이의 아이들 또한 아무에게나 언니, 오빠, 형, 누나 등등으로 불러주는 것이어서, 우리는 미처 몰랐던 가족이나 일가친척을 새로 발굴해낸 기분으로 열심히 그 가게를 드나들었다.

그런 어느 하루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집주인 아저씨가 작대기를 들고 서 있다가 아이들이 오면 무지막지하게 휘둘러대며 ‘다른 데로 가 인 마, 다른 데로 가’하고 악을 써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원래는 예쁜 초가였지만
원래는 예쁜 초가였지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우리는 도무지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했지만, 머잖아 그 뜻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집주인 아저씨는 계산을 잘못한 것이었다. 구멍가게를 하면서 옆에 따로 집을 지어 세를 내주면 이익이 두 배가 된다는 계산이었을 테지만, 세를 든 사람이 자기와 똑같은 구멍가게를 한다. 그리고 손님인 아이들은 그 집으로 몰려간다.

집주인 아저씨의 계산법이야 어떻든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작대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이면 머뭇거리며 딴전을 피우고, 안 보이면 재빠르게 달려 들어가곤 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있어서는 안 될 사건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셈이다.

우리는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새로 생긴 구멍가게 아줌마와 싸움 잘하는 집주인 남자간의 작은 싸움이 거의 매일같이 벌어졌다. 작은 싸움은 마침내 큰 싸움이 되었고,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방금 전의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나는 끔찍하게 무서운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아닌 그것은 사실 싸움이랄 것조차도 없었다. 오늘날의 용어를 차입해서 말하자면 갑질 중에 감집일 뿐이었다.

싸움 잘하는 집주인 남자가 세입자 아줌마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가게 밖으로 질질 끌어낸다. 아줌마는 끌려가면서도 안 끌려가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남자는 저항하는 아줌마의 여기저기를 발길질로 가격한다. 마침내 아줌마는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고, 남자는 주저앉은 아줌마의 뺨을 연타로 가격한다. 아줌마는 이제 축 늘어졌다. 그때 뒤에서 울부짖던 여자애 둘과 남자애 하나가 쏜살같이 달려 나온다.

다음 날 구멍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우리는 ‘우리의 이모’를 볼 수 없었고, 우리에게 오빠니 형이니 누나니 언니라고 불러주던 아이들 또한 만나볼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우리의 기억에서도 차츰 멀어져 갔다.

그 뒤로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가. 그때의 그 애련한 아이들이 지금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어 내 앞에 있다. 따지고 보면 나이 차이래봐야 다섯이나 여섯 살 정도일 뿐이건만, 나는 그들이 나보다 한참이나 아래인 것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반갑다. 너무 반갑다. 너무 반가워서 이것저것 마구 물어보았다.

암 투병 중인 어머니가 이제 곧 돌아가실 것 같단다. 당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고창의 인천강에 뿌려달라고 하셨단다. 살아서는 두 번 다시 생각도 안 하고 싶었던 고향을, 죽은 뒤에 가고 싶어 한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서, 고향을 떠난 뒤로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을 지금 와서 돌아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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