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위클리서울

[위클리서울=박석무] 1801년 신유년, 신유옥사가 일어나 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유배살이로 떠나야 했습니다. 한창 일할 나이이던 40세의 다산, 죄가 없음을 인정받고도 중상모략에 휩싸여 풀려날 기약 없는 귀양살이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유배 초기에야 마음의 안정을 못 얻어 괴롭고 아픈 시간을 보냈지만, 오래지 않아 마음의 안정을 얻어 좌절과 낙망의 마음에서 훨훨 털고 일어나 학문연구에 생애를 바칠 각오로 독서와 저술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쓸쓸하고 외롭기 그지없던 때가 많았지만, 독거생활의 편안함을 오히려 책 읽고 글쓰기 좋은 환경으로 여기면서 본격적으로 수기(修己)의 학문과 치인(治人)의 학문에 온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다행히 찾아오는 제자들이 있어, 그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참으로 난해한 중국의 고경(古經)들에 대한 연구는 흑산도의 중형(仲兄)과 토론하면서 유교철학의 진리를 밝혀내고 있었습니다. 복잡한 가정사나 세상일에 개의치 않고 고요하고 적막한 주위 환경에 불평이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래도 풀려나는 일에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여기면서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했고 그리운 아내와 가족, 속세의 일에 대한 그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금년에 다섯 가지 대사면이 이루어졌는데 탐관오리와 살인강도범까지 석방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합니다. 그러나 사헌부의 탄핵안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국사범이나 역적죄인)은 거론조차 할 수 없었답니다. 이것은 그런 사람들을 엄하게 단속하려는 것이 아니라 까마득히 잊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득세한 사람과 실세한 사람은 본래 서로 잊어먹기 마련이니 한탄할 것 있겠습니까?(「答仲氏」: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고 말하여 권력자들은 모략중상으로 내친 국사범들은 아예 생각하지 않고 석방에 대한 문제는 거론하지도 않아 잊어먹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사면령이 내리지 않아 모든 죄수들이 혜택을 받지 못할 경우야 자신들의 누락을 한탄할 필요도 없지만, 살인강도범이나 흉악범 같은 범죄자들은 풀어주고 죄질이나 범죄 정도가 더 나쁘지 않는 사람들은 풀어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고 쓰리겠는가요! 기록으로 보면 다산도 여러 차례 사면령에 해당되어 곧 풀려난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반대파들의 저지로 끝내 풀려날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대사면령을 내려 대부분의 범죄자들을 풀어주면서도 자신들은 거론조차 안했다니, 같은 처지에 있는 중형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그런 아픔을 실토하고 있었습니다.

갇힌 사람들이야 언제라도 풀려나기를 바라고 유배 사는 사람들이야 언제라도 해배되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18년의 긴긴 세월, 행여라도 해배의 소식이 오기를 그렇게도 기다렸지만, 그 길던 세월, 그런 해배명령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산은 참고 참으며 학문하는 재미로 갇힌 자의 괴로움을 이기면서 끝까지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결과가, 지내놓고 보니 위대한 학문적 대업을 이룩할 기회를 얻었으니, 위기를 기회로 바꾼 다산의 정신력은 그래서 만인의 귀감이 된다고 여겨집니다. 남은 기쁘고 즐거운데, 나만 슬프고 외로우면 상쇄할 수 없는 비애가 더 가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은 풀려나는데, 우리만 갇혀 지내야 한다는 불행, 그것까지 이겨낸 다산의 풍모에 마음이 기울여집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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