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아메다바드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간디 때문이 아니라

아메다바드, 라는 낯선 이름의 도시에서 나는 하루 이틀을 보내고 있었다. 인도의 서쪽 겨드랑이에 툭 튀어나온 듯한 반도에 자리 잡고 있는 ‘구자라트’라는 거대한 주. 그곳의 수도 격인 아메다바드는 간디가 태어나 활동하기도 한 인구 500만이 넘는 대도시였지만, 처음 도착했을 때 내가 이 도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힌두어와 다른 말과 문자를 쓴다는 점 정도? 간디에게 특별히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길게 머물다가는 도시는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간디의 발자취를 따라온 사람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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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낯선 도시에 온 까닭은 간단했다. 호수로 유명한 도시인 우다이푸르에 머물 때 만난 한 버스 회사 아저씨 때문이었다. 그는 푸근한 웃음으로 사람을 안심시키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도시에서 어지러워하고 있던 내가 골목 구석에 있는 작은 버스 회사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사장은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내게 따뜻한 짜이를 한 잔 권 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주겠다는 양 그는 보고 있던 컴퓨터의 화면을 돌려 수 백 개의 연이 떠있는 한 들판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이제 곧 아메다바드라는 도시에서 인도 최대 규모의 연 축제가 열린다고, 내일 바로 출발하면 시간이 딱 맞을 거라고, 쾌적한 도시라고, 지금 티켓을 사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수많은 연이 하늘에서 일렁이는 장면에 매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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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다바드에 도착하고 나서야 축제가 일주일 전에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시 어디에서도 축제의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연을 보러 도시에 왔는데 연 비슷한 것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정말 우다이푸르의 아저씨가 착각했는지, 아니면 그저 아메다바드행 버스표가 잘 안 팔려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나는 햇빛이 쏟아지는 번듯한 대도시에 왔고, 길가의 매대 앞에 서서 코카콜라를 마시며 마음의 안정을 찾아 갔다. 어디에 있든 변하지 않는 것은 늘 마음의 불안을 줄여주고 대도시는 그런 것들로 가득하다. 맥도날드, 코카콜라, 버거킹 같은 것들. 물론 인도의 패스트푸드 점에는 소고기 버거가 없는 대신 채식주의자용 버거가 있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여행 중에 정말 힘에 부칠 때는 한식도 아닌 맥도날드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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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가 기거하며 정치 운동을 이끌었던 집이 조금 먼 강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상하게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간디는 그냥 간디로 두고 싶었다. 대신 그저 이 도시의 분위기를 겪으며 걸었다. 콜카타 이후로 관광객이 드문 대도시는 처음이었는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걷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긴 강변은 한강만큼이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으며 누군가 빨래하는 장면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세련된 유리 빌딩들이 곳곳에 있었고, 한국어와 약간 닮은 동글동글한 구자라트 문자들이 분분했다. 이슬람 제국이었던 무굴 제국의 주요 도시답게 거대한 모스크들이 중간 중간 잘 보존되어있는 데다가 하얀 양파망 같은 모자를 쓴 무슬림들도 더 자주 눈에 띄었다. 버스는 지하철이나 트램처럼, 정해진 역에서 정차하는 식으로 움직였다. 빌딩이나 강변, 정류장은 멀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 바깥은 여전히 북인도스러운 혼잡함이 함께 했다. 그 간극으로 구자라트를 느꼈다. 우리나라의 전주처럼 ‘맛’으로 유명한 지역이라기에 각종 반찬, 커리, 난, 빵이 리필되는 유명한 ‘탈리’집에 들리기도 했다. 인도 사람들이 저녁을 비교적 늦게 먹는다는 것은 서서히 알아가고 있었지만 오후 7시에 한국의 뷔페만큼 큰 탈리집에서 수많은 종업원들의 눈길을 받으며 홀로 밥을 먹었다. 이름도 잘 모르는 연고도 정보도 없는 도시를 혼자 천천히 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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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여행자, 마크

관광객들이 자주 들리는 도시가 아니라 그런지, 여행객들이 묵는 느낌의 게스트하우스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최저가로 찾아 들어간 도미토리는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드넓은 공간에 이층 침대 수 십 개가 들어찬 구조였다. 바닥과 벽과 천장이 모두 하얀 타일로 되어 있었는데, 고시원 같기도 하고 거대한 화장실인 것 같기도 하고 깨끗한 수용소 같기도 했다. 잠만 자고 지나쳐 갈 사람들이 묵는 곳이었다.

아메다바드를 혼자 돌아다니다 깬 아침, 먼 구석에서 익숙한 영어 억양이 들렸다. 그 목소리는 숙소 직원에게 나지막하지만 분노에 찬 채 항의하고 있었다. 분명히 아는 목소리인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싶어 소리를 더듬다가 한 명의 얼굴을 떠올렸고,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향했고, 그곳의 침대에는 그 앞에 서 있는 직원 한 명과 침대에 모로 누워 있는 마크가 있었다. 내가 마크 아니야? 물었고 그는 눈이 동그래진 채로 나를 올려다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당황했고, 그 당황은 곧 반가움으로, 어떻게 이렇게 만날 수 있는지 하는 황당함으로, 이 숙소에서 베드버그가 나온다는 마크의 성토로 이어졌다. 너는 안 물렸어? 가려워 죽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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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넓은 인도 땅에서 한 번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실은 그렇게 낮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넓은 땅을 무작위로 다니는 게 아니니까. 여행자들은 어느 정도 비슷한 루트와 기간과 도시를 경유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도시마다 마주치며 면을 익히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아메다바드는 한국인이 아주 많이 오는 도시는 아니라서 숙소 침대에서 이뤄진 이 갑작스러운 만남은 어쩔 수 없이 신기했다.

나와 마크는 우리가 아메다바드에 오기 몇 주 쯤 전, 바라나시에서 처음 만났다. 그와 나는 함께 긴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작은 방의 바로 옆 침대에 묵었고 함께 사르나트를 반나절 여행하기도 했다. 따로 연락처를 교환한 것도 아니라서 그 이후에 그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거대한 유적지를 사랑하는 마크는 큰 석굴을 보기 위해 인도 중부의 아우랑가바드로 향했고, 그곳에서 가끔씩 앓던 지병이 도져 2주 넘게 앓아 누웠다고 했다. 아무 것도 제대로 못 먹고, 그저 병상에 있듯이 누워만 있었다고.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에서 호기롭게 수영한 게 병의 사소한 이유 쯤은 되었을까. 안 그래도 그는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마크는 지금까지도 몸이 좋지 않지만 그곳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는 없어 어떻게든 새로운 도시로 향해 왔다고 했다. 그렇게 온 것이 이곳, 아메다바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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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마크는 열정적인 여행자였다. 영어를 갈고 닦고 싶어 했고, 모든 사람에게 정확한 영어 문장을 구사하고자 노력했으며, 한국 이름을 쓰지 않고 ‘마크’라고 불리고 싶어 하는 군 장교를 막 제대한 청년이었다. 그의 투명한 플라스틱 여행자 명함에 새겨져 있던 귀여운 제복 캐릭터를 나는 아직까지도 기억할 수 있었다. 병을 겪고 돌아온 마크는 몇 주 전 같지 않았다. 원래도 인도의 소음을 못 견뎌 하던 그는 이제, 주변의 모든 것을 견디기 버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몸이 지쳐있을 터. 걷기를 좋아하던 그는 짧은 거리도 릭샤를 탔고, 거의 프랜차이즈 햄버거만 먹었다.

나는 다시 만난 그와 또 하루 이틀을 보냈다. 거대한 모스크 앞을 걸었고, 빌딩이 많은 곳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코카콜라를 먹었다. 제국 시절의 우물을 찾아가 공원의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맥주를 한 두 잔을 계단에 앉아 먹었다. 마크는 다시 기력을 찾아가고 있는 듯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에서는 원래는 없던 불안과 두려움이 미세하게 풍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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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재회 이후 나는 아메다바드를 먼저 떠났고, 마크는 다른 도시를 조금 더 돌아보다 지인이 있다는 다른 국가로, 또 그곳에서 조금 지내다 한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원래는 년 단위로 계획된 여행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코로나가 곧 발발해 여행은 힘들어졌을 것인데, 어떤 이유이든 마크의 세계여행은 조금 빨리 끝났다. 그리고 한참 후, 그가 그의 여행을 ‘실패’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세계여행을 무사히 마친 청춘들의 수기들은 많은데 왜 실패한 자들의 이야기는 없나. 여행 중에 여행을 중도 포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 그들은 이후에 여행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좋았던 기억은 아니었다는 듯이. 못 견디게 힘들었던 기억 이야기, 버티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외지의 경험 이야기는 왜 거의 없나. 1년 후에 돌아오겠다고 떠나 놓고 몇 달을 못 채우고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왜 드문가. 당연히 드물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누가 실패를 자랑하고자 하겠는가. 그러나 여행은 자랑을 위한 것만은 아니기에, 또 끝내 성취해야만 하는 어떤 도전인 것만도 아니기에, 이야기는 남는다. 여행은 그저 여행일 뿐. 그렇게 각자의 여행이 있을 뿐. 겪어낸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후회와 기억이 있을 뿐. 이렇게 쓸 때면 여행과 인생을 섞어 쓰고 싶다는 촌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 각자의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기억. 나는 여전히 마크와 앉아 함께 먹었던 코카콜라와 아메다바드라는 여전히 낯선 이름의 도시를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 도시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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