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탐방기] 서울독립영화제 3편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2년 전, 내게는 코로나 이전의 마지막 영화제였던 2019년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의 세 번째 이야기다. 한 해의 마무리로 서울독립영화제를 택했던 나는 다가올 팬데믹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늘 그랬듯 여유롭게 영화를 예매했다. 지금에서야 말하자면, 정말 호시절이었다.

 

영화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 포스터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와 소설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경쟁률이 치열하지 않으니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하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내가 고른 건 4개의 단편 영화가 묶인 상영작으로, 그중 한 영화의 제목을 보자마자 선택했다. 바로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2019)다. 띄어쓰기가 의도적으로 엉망인 것도 심상치 않은데, 영화와 소설만 있으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끌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감독이 분명 오래 전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을 고민해왔을 것이고, 그 철학과 삶의 정수가 일부라도 영화에 담겼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마치 영화 ‘다가오는 것들’(2016)처럼 말이다.

그 영화에서는 노후를 꾸려나가던 여성이 예상치 못한 인생의 어려움이 들이닥칠 때, 자신이 평생 해온 철학 공부를 계속 하며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안정되기만 할 것 같은 노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인생은 쉽지 않다는 것, 그럼에도 자신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고 이전에 걸어온 것과 동일하게 계속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 영화였다. 불안한 시대를 잔뜩 흔들리며 살아가는 청춘으로서, 나이가 많은 인생 선배가 현명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점점 좋아지고, 필요해진다. 영화와 소설이야말로 이를 응축한 핵심이니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설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클리서울/
영화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서로 다른 세 이야기가 연결될 때

아쉽게도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는 그런 부류의 영화는 아니었다. 철학과 지혜가 조금도 담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삶을 잔잔히 관찰하기 보다는 카메라와 서사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영화에 속했다. 여운을 즐기기보다는 영화적 즐거움을 생생하게 느끼는 장르랄까. 우선 영화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서로를 이으며 진행되었다. 모두 같은 배우로 일인다역을 연기하였는데, 첫 번째 이야기는 헤어진 연인인 경수와 유진이 주인공이다. 이별 후 유진(임선우)의 집에 찾아온 경수(박종환)가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챙기면서 시작된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며 매달리던 경수는 유진의 단호한 거절에 막막해진다. 결국 자신을 칼로 찌르면 그냥 가겠다고 말하며 강수를 두지만, 자신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유진 때문에 제 손을 스스로 찌른다. 러닝타임 내내 관객의 불안함을 고조시키는 분위기로, 예상하기 힘든 갑작스러운 장면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를 영화로 본 인호(박종환)와 은정(임선우) 커플이 나누는 대화다. 두 사람은 제 손을 찌르는 마지막 장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 의견이 충돌한다. 서로의 생각은 다르지만, 첫 번째 이야기만큼 긴장이 되거나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아니다. 서로가 익숙하고 편안한 연인의 분위기가 계속되다, 민호는 은정이 쓴 책 중 빈집에 인물들이 들어가는 부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영화의 세 번째 이야기가 이어진다. 책의 내용대로 빈집에 들어가는 종구(박종환)와 영주(임선우)는 연애 직전의 상태다. 우연히 영주가 살았던 집에 몰래 들어간 후, 실은 영주가 이 집에서 동거를 한 적이 있고 종구는 오른손에 상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두 사람이 동거를 했었고, 경수가 제 손을 찔렀기 때문에 두 이야기의 커플이 서로 같은 사람들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수가 왼손을 찌른 반면 종구는 오른손에 상처가 있어 위치가 다르고, 그 증거만으로는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고 보기 어렵다. 관객이 혼란을 느끼는 사이, 종구와 영주가 키스를 하며 마음을 나누고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사랑은 모순을 극복하는 것

서로 같은 듯 다르게 이어지는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연애 이후, 연애 중, 연애 이전을 다루고 있다. 시점 상으로는 미래, 현재, 과거로 정리될 수 있기도 하다. 인물들의 이름, 성격, 말투와 스타일, 관계의 형태가 모두 달라 동일인물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이야기들을 잇는 연결고리들로 인해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만약 이들이 동일인물이라면 스토리의 순서와 실제 인물들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순서가 달라 다시 맞춰보고 정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동일인물인가의 여부를 결정하고 정답으로 확정하는 것보다는, 일부러 혼란을 야기한 장치의 본질적 의도를 생각하며 여러 가정을 해보는 것이 영화를 즐기는 데 도움이 된다. 만약 모두 다른 사람들이라고 가정했을 때는, 세 커플이 각각 비슷한 과정과 문제를 겪는다는 점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찰할 수 있다. 각자의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이 오직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묶여 갑작스레 하나가 될 때 벌어지는 수많은 갈등과 모순들. 세 커플이 겪는 크고 작은 갈등의 이유는 다를지언정 그 핵심에는 결국 서로가 동일하지 않은 타인이라는 점이 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의견이 충돌하고(두 번째 커플의 경우), 마음의 속도가 다르고(첫 번째 커플의 경우), 이전의 경험과 연애사가 다르다(세 번째 커플의 경우). 그 누구도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좁힐 수는 없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변화하고 맞춰나가야 하는데, 그렇다고 서로가 완전히 동일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사랑은 이 모순을 계속 극복해야 한다.

 

영화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우리는 다름을 이겨낼 수 있을까

더 재밌는 해석은 우리가 계속 변화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물들을 다른 시간에 위치한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먼저 우리가 계속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는 하고 있는 생각이 다르고, 느끼는 감정과 감각이 다르며, 끊임없이 죽고 새로 생기는 세포들로 인해 몸도 달라진다. 즉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는 동일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시간이다. 내가 동일한 사람이 아닌 것은 어제와 오늘이라는 시간의 차이 때문이다. 영화 속 동일한 인물이 다른 시간에 위치한 것이라면, 3개의 이야기 속 연인의 모습이 다른 이유도 시간 때문이다. 연애 직전의 달콤한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결점이 드러나도 개의치 않다가, 중반엔 편안함과 갈등이 뒤섞이고, 후반엔 완전히 갈라서 상대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다. 그러니 서로 다른 점이 있었음에도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고, 후에는 끝맺음이 합의되지 않아 파국에 이른다. 모두 시간 때문이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우리 때문이다.

연애라는 관계 속에서 우리의 모습은 더 다채롭게 변화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경수는 이별 후 데이트폭력을 자행하는,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다. 두 번째 이야기의 인호는 다정하지만 공감할 수 없는 부분에는 강하게 이견을 표출하는 인물이고, 세 번째 이야기의 종구는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며 젠틀한 면모를 보이지만 상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행하며 무례한 질문을 쏟아내는 인물이다. 종구에 대해 더 설명하자면, 그는 이전에 살던 집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아하는 영주를 무작정 이끌었고, 이 집에서 전 연인과 동거를 하고 스킨십도 했냐며 불편한 질문을 쏟아낸 적 있다. 앞서 세 이야기의 분위기와 장르가 다르다고 말했듯, 세 남성의 언행은 영화의 분위기와 상대의 리액션을 통해 공포와 로맨스로 장르가 나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세 인물은 자기중심적인 성정과 폭력성이 있고, 그것이 얼마나 드러나고 감춰지는가의 차이 정도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연애 초에는 애정의 방식 중 하나로도 보일 수 있는 질투와 집착의 감정이 연애 후에는 공포로 변질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세 이야기의 인물이 동일인물이라고 가정했을 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데이트에서 ‘폭력’이 뒤따르는 것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우린같이 영화를보고 소설을읽어’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상처는 지워질 수 있다

지금까지 영화에 등장한 이들이 동일인물인지, 아닌지에 따라 여러 해석을 시도해보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을 야기한 장치, 바로 손에 난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경수는 자신의 왼손을 찔렀고, 종구는 오른손에 상처가 있었다. 영화는 왜 두 사람에게 동일한 모양이지만 다른 위치에 있는 상처를 설정했을까. 이 역시 정답은 없겠지만, 상처 또한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장치를 해석해보고 싶다. 우리는 흔히 상처를 ‘씻을 수 없는’, ‘지울 수 없는’과 같은 수식어와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너무 깊은 상처는 회복하기에 어렵고 시간이 지나도 불현 듯 아려올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상처의 회복에 제한을 두고 절대 지워질 수 없다고 못을 박는 태도는 이롭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변화해 사랑의 종말을 야기하기도 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상처 역시 옅어지고 끝내는 사라질 수 있다고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타인에게 받은 상처이든, 스스로 낸 상처이든 말이다.

영화에서 신체적 상흔으로 상징된 이 상처는 아마도 내면의 상흔을 의미할 수 있다. 경수는 연인과의 이별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자신에 대한 자책, 혹은 상대가 자신을 봐 주도록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자신의 손을 찔렀다. 의도가 무엇이던 연인과의 이별로 다친 마음이 자기파괴적인 감정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경수의 데이트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죽도록 괴로운 지금의 감정이 언젠가 회복될 수 있다는 긍정적 믿음이 있었다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 한때 사랑했던 연인에게 이를 목격하게 하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순간의 감정에 휩싸이면 파괴적인 욕구와 광기에 매몰되지만, 이를 행한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오히려 해결과는 반대 방향으로 더욱 악화된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괴롭다면 그 감정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변화하고, 상처와 힘든 마음들 역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며 지친 마음이 도저히 회복되질 않고, 변화를 받아들이기엔 지금 갖고 있는 작은 것들마저 놓칠까 불안하고 걱정스러울 때가 많다.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변하고, 변하길 바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 절망스럽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오롯이 짊어져야 하는 인생의 무게처럼 느껴져 모든 것을 내려놓고만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짊어진 것들이 변하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며, 희망이 있다.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희망이 생긴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자. 우리에게 삶의 가치와 지혜를 알려줄 소설과 영화는 아직도 무궁무진하다. (4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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