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탐방기] 4회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2021년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다

이제 2022년이라는 숫자도 슬슬 익숙해지고 있다. 폭죽이 터지는 화려한 카운트다운 덕분에 머릿속에 금박의 글씨로 확실하게 각인이 된 건 아니고, 새로 일을 하면서 계약서를 쓰거나 코로나로 인한 직원 건강 명부 따위를 작성하다보니 절로 익숙해졌다. 새해 첫 글로는 너무 퍽퍽한 서두이려나. 2021년에 작별 인사를, 2022년에 환영 인사를 제대로 하지는 못한 사람은 별다른 도리가 없다. 사실 작별인사는커녕, 그 해가 지나간다는 사실에는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좋은 일들도 많았지만 이 모든 것이 몰래카메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이 나를 들들 볶던 해였다. 많은 이별이 있었으나 그걸 충분히 슬퍼할 만큼의 여유도 없었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그때는 매년 이미 굳어져버린 숫자를 영영 버리고 새로운 숫자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잔인하도록 슬펐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다시는 사용할 일이 없는 단어를 통해 죽음이나 소멸의 의미를 체화할 정도였다. 모두가 신나는 새해에 혼자 이별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센치해지는 어린아이였던 시절이 이제는 전생처럼 아득하다. 그저 바쁜 날들이 연속되는 요즘은 그런 걸 느낄 겨를이 없다. 표지에 년도가 박힌 다이어리를 쓰거나 학년이 올라간다고 교과서가 바뀌는 소소한 이벤트도 없으니, 똑같이 회전하고 있는 지구처럼 똑같이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나이 드는 걸 실감하는 때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늘어간다는 것, 몸은 이것들을 모두 해낼 수 있도록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다. 욕심과 의무로 점철된 일상은 지침과 짜증이 들어설 뿐, 외로움과 센치함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마음과 생각을 비우고 내려놓는 연습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성과중심주의, 아득한 불안함, 질투심 같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부정적 에너지가 가득 차오른다. 이건 단순히 나만의 특성은 아닌 것 같다. 잘 가다가도 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친구 M은 또 넘어졌다며 전화를 걸어오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최근엔 아예 사라지기까지 했다. 웬일이냐고 묻자, 너무 바빠서 힘들 겨를도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리 세게 넘어졌더라도 일단 빨리 털고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 하는 사회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단 오늘 보고서를 써야 하고 내일 또 출근을 해야 하니 전화를 끊었다. 주말에 다시 연락을 하기로 했다.

1월에는 이래도 되나 싶어 꺼림칙한 기분이 내내 들었다. 끝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컨테이너 벨트에 올라 뒤를 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한풀이를 하지 못한 2021년이라는 망령이 어깨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고나 할까. 내가 보낸 연휴를 돌아보며 지금이라도 새해를 제대로 맞이해야겠다는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월력을 뜯으면서 시간의 흐름을 물성으로 느끼고 그래도 한 달을 잘 살아냈다고 스스로 위안할 수 있는 것처럼, 한해를 잘 떠나보내고 새해를 잘 준비해서 맞이하는 과정을 통해 평소엔 느끼기 힘든 시간의 흐름을 만끽하며 결국엔 허송세월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다져야 했다. 그렇게 급하게 나의 연말연초부터 되짚어보았다. 참 별 것 없었다. 사실 새해맞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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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언제부터 파티의 민족이었나

이제 연말연초는 뭔가 특별한 날이 될 것이라는 기대보다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 든다. 연휴는 그리 특별하지 않고, 매번 다르게 보내기도 어렵고,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커진다는 것을 아는 나이다. 그런데 이건 정말 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인 것 같다. 다들 참 열심이고 진심이다. 송년회, 해돋이, 안부 인사, 신년 계획처럼 오래된 전통도 계속되고 있고, MZ 세대는 거기에 파티 문화까지 더했다. 숙소를 잡아 케이크를 특별 주문하고, 파자마를 맞춰 입고, 카드와 선물을 교환하는 식이다. 특별히 여유롭거나 부유한 사람들, 혹은 대가족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 주변에는 알바비의 반을 파티 준비에 썼다는 친구도 있고, 이브에 퇴근하자마자 이름도 어려운 요리를 위해 고기부터 재워놨다는 친구도 있으며, 나름 빨간색 와인을 사놓았더니 연인은 크리스마스 에디션이어야 한다며 루돌프 모양의 와인을 주문했더라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 커서 조립할 수도 없는 트리가 선물로 온 순간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시작되었다는 예감이 들었다. 곧 디즈니 캐릭터들이 캐롤을 부르는 대형 오르골이 좁은 테이블을 가득 채웠고, 한 달 동안 스티커를 떼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달력(어드벤트 캘린더라고 한다)을 사용하던 언니는 케이크를 미리 주문해뒀으니 당일엔 데이트를 적당히 하고 집에 돌아올 것을 당부했다. 나도 크리스마스를 꽤 좋아하는 편이지만 주변의 장단을 맞추기는 점점 힘들어졌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 모든 게 한심한 유행으로 보였다. 함부로 평가하는 것이 두렵고 부끄럽지만 그게 진짜 내 감상이었다. 분위기와 구색을 갖추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신세대의 과시적 욕구가 너무 빠르게 대중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파티의 민족이었다고.

대체로 유행이란 건 성가시고 환경 보호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너도나도 파티를 즐기는 문화는 그보다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는다는 감상이 앞섰다. 내게 파티는 미국 영화에나 나오는, 드레스를 차려 입고 거대한 홀에서 춤을 추거나 수영장이 있는 드넓은 자택에서 피자를 시켜 먹는 이미지라 이걸 우리가 한국에 들여와서 일상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치르진 않고 현실적인 어떤 양식이 생겼다는 건 알고 있다. 앞서 묘사한 것처럼 예쁜 공간에서 예쁜 옷을 입고 예쁜 음식을 먹는 소규모의 파티. 차라리 파티의 원조격 정도로 어쩌다 한번 크게 치르면 정말 특별하고 재밌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이 파티 문화는 무슨 의미와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가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그래도 파티를 할까? 인증 사진을 찍지 않고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파티가 있을까? 심보가 뒤틀린 질문뿐이다.

 

이성애자와는 친구가 되고 싶지 않아

다들 정말 이런 파티를 좋아하기만 하고, 나와 비슷하게 느끼는 사람은 없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런 의미에서 잠깐 다른 이야기로 새보려 한다. 돌잡이, 환갑잔치 같은 잔치도 따라가기 벅찬데 파티까지 추가된 우리네 생활양식에 대해서 말이다. 이를 테면, 요즘엔 친구가 결혼을 할 때 마지막 공주 놀이를 즐길 수 있게 드레스를 맞춰 입고 전문 컨셉 숙소에서 ‘브라이덜 샤워’를 치러줘야 하고, 임신을 하면 미리 아기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는 ‘베이비 샤워’를 또 진행해야 한다. 부케를 전문 업체에 맡겨 평생 보관할 수 있도록 화려하게 꾸며주는 일이나 청첩장을 주고받기 위한 식사 자리, 행사 때마다 당연시되는 사진작가 역할도 잊어서는 안 된다. 입사, 퇴사, 생일 등 이벤트가 한두 개가 아닌데, 결혼 하나만으로 파생되는 것이 이렇게나 많다.

글만 쓰는데도 지친다. 최근에 만난 한 친구는 이성애자인 사람과는 더 이상 새로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말까지 털어놓았다. 그 사람이 결혼을 할 경우 챙겨야할 수많은 것들이 떠올라서다. 언젠가 결혼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친구의 말이 속상하고 다소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모두 부담인 게 사실이다. 스몰 웨딩이 잠깐 유행하는가 싶더니, 우리는 새로운 허례허식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내 주변엔 그런 걸 해줄 여자애들도 없지만, 만약 친구들이 해준다 하더라도 한사코 사양할 것이다. 각자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에 충분히 바쁘고 빠듯하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고, 결혼하지 않을 대부분의 친구들에겐 그걸 어떻게 돌려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 혹 결혼을 하더라도 식은 치르지 않거나 최소 축의금은 받지 말아야겠다는 이른 다짐이 생긴다. 적어도 지금의 우린 그런 게 다 사치스럽다.

사실 이 모든 유행을 모두 허례허식으로 치부하는 건 성급하다는 걸 안다. 인생의 새 막을 여는 친구에게 요란하게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 이제 가정에도 의무와 책임이 생길 자신에게 마지막 휴가와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을 나쁘게 볼 순 없다. 파티 문화 또한 이전부터 SNS를 따라 유행의 조짐이 보이긴 했지만, 코로나 이후 대규모 축제가 전무해지며 어쩔 수 없이 소규모 파티에 눈을 돌린 것 같기도 하다. 인원 제한 수칙을 지키면서도 노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과시욕, 일탈에의 욕망, 우정 등 어떤 욕구가 기저에 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팍팍한 현실에서 잠깐 벗어나 멋진 주인공이 되어 신나게 놀아보는 경험을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한다는 건 알 것 같다. 나 역시도 그 욕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그 방식과 크기가 조금 의아할 뿐이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인생 최초의 패키지를 끊다

다시 연말 이야기로 돌아오자. 계속 힘주어 말하지만, 이런 날들이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지구가 1년이 지났다고 빠르게 돌아준다거나 하는 이벤트를 만들어주진 않으니, 우리가 인위적으로 세리머니를 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그 하루를 위해 준비할 것이 너무 많은 것은 벅차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것과 파티 사이의 중간 지점이 필요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다들 어쩜 그리 계획이 명확한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 부럽다.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명확하게 알아서, 평소에 그런 날만을 기다리며 열심히 살아서 그런 걸까. 둘 다 해당되지 않는 나는 매년 고군분투 중이다. 작년인 2021년엔 고민을 한창 하다, 결국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고민이 있으면 여행으로 도피하는 습관을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2017년 6월 2일 “나, 지금 제주에 살아있어!” 기사 참조.) 추위에 약하고 여유도 없는 편이라 대단한 여행은 아니고, 그냥 ‘호캉스’(호텔+바캉스)에 바람 쐬기가 추가된 정도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이 있어 안락함, 편안함, 로맨틱이 기준이었다. 창문 끝에서 사선으로 보면 간신히 호수가 보이는 호텔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예약하고, 저녁과 와인, 아침 뷔페가 포함된 패키지를 끊었다. 내 인생 최초의 패키지였다.

패키지는 열정과 취향이 없는 대신 돈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일일이 알아보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번거로우니, 적당히 좋은 곳과 음식을 알아서 앞에 대령하라는 주문. 깃발을 따라 정해진 시간대로 우르르 움직이기도 싫을 뿐더러, 비싼 패키지 여행을 다닐 비용으로 여행 일을 하루 추가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무려 크리스마스 패키지를 끊은 건, 추위를 많이 타지만 자동차가 없는 여행객은 달리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걷는 것도, 관광지를 가는 것도, 비싼 카페를 계속 가는 것도 쉽지 않다. 가진 게 많지 않아 선택권이 줄어든 사람에게도 패키지가 유용하다니. 어쩌면 그동안의 편견은 세상물정을 몰라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역시 잘못된 생각인데, 호캉스는 자본주의에 굴복하는 선택인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복잡한 심경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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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하나씩 가져가세요

김영하 작가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호텔은 일상의 근심과 그동안의 상처가 없는 공간이라 휴식에 적합하고, 그래서 새로운 세대가 호텔로 바캉스를 떠난다는 것. 그 말이 맞았다. 호텔에 도착하니, 새로운 공간에 대한 설렘에 더해 말 그대로 스트레스가 제로에 수렴했다. 여기엔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없었다. 침대 위에서 과자를 먹으며 부스러기를 흘려도 되고,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아도 됐다. 읽어야 하는 책과 할 일이 가득 담긴 노트북이 펼쳐져있던 책상도 없으니 그저 침대 위에서 마음 편히 뒹굴 수 있었다.

호텔과 함께 패키지로 끊은 뷔페도 오랜만의 재미를 선사했다. 어떤 음식을 그릇에 담는지를 보며 연인과 서로의 취향을 눈여겨보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과 색다른 조합을 추천하며 일반 식당에서보다 많은 대화를 여유롭게 나눌 수 있었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들의 신경이 더욱 예민해지면서 밥을 다 먹은 후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눈치가 보인다. 영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있고, 그 안에 최대한 많은 손님을 받아야 하니 당연한 수순이다. 오랜만에 어떤 눈치나 제한 없이 밥을 먹고 대화하는 것은 생각보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거기다 뷔페의 가장 큰 장점은 나눠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상대가 정말 배가 부른지, 이걸 먹고 싶은데 내가 너무 많이 먹은 것은 아닌지 등의 고민을 일절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풍족함이 주는 삶의 질이구나. 그동안의 일상이 서글퍼지다가도 일단은 충분히 누리고 즐기기로 했다. 연인은 오랜만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풍경, 모두 들뜬 분위기와 행복한 표정들 사이에 있는 것이 이렇게 즐거울 줄 몰랐다고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잃고, 잊은 모습이었다.

자, 이제 여유는 여기까지. 놀랍게도, 바캉스였던 여행은 다음날 서바이벌이 되었다. 기록적인 폭설로 인해 차들은 발이 묶이고, 사람들은 허리 높이까지 쌓인 눈을 치우는 데 손을 모았다. 포크레인 같은 공사용 차량들이 눈을 한 쪽으로 밀어야 겨우 치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호텔 가까운 거리에 바다가 있어 간단히 들리자던 계획은 차도를 도보로 걷는 한 시간 반의 마라톤이 되었다. 바다로 이어지는 대교를 건널 땐 출애굽기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어렵사리 바다에 도착한 후에는 거센 바람 때문에 방파제보다 높이 치는 파도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히치콕의 영화처럼 매섭게 달려들다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어쩐지 이상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 이게 자연이고 파도지. 자연의 힘에 손도 쓰지 못한 채 패배하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아름답고도 편안했다. 도시가 주는 패배감과는 달랐다. 걸어오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버려 예상치 못하게 근처 식당에서 대충 배를 채웠다. 완벽하고 안락했던 어제와는 너무나 달랐다. 마치 네가 원하는 새해는 어제 같았지만 인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자연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무렴요, 마땅히 그렇겠죠. 덜덜 떨며 가르침을 받아들이니 도시에서 펼쳐질 내 인생, 어김없이 닥쳐올 고난의 파도들에 자신감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자연재해를 함께 통과하며 더 끈끈해진 연인과 좌충우돌 끝에 무사히, 그러나 오랜 시간이 걸려 서울에 도착했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얼렁뚱땅 헤어지고는 집에 오는 길에 눈과 파도로 가득한 사진첩을 멍하니 들여다봤다. 어디에도 자랑할 수 없는, 특별하지 않은 사진들이었다. 연말을 너무 이상하게 보냈나 싶어 약간의 후회와 허무함이 들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연말연초에 느껴야 마땅할 감정들을 죄다 진하게 느끼고 온 것 같다. 파티라기엔 가성비가 좋은 저가 호텔의 뷔페였고, 호캉스와 서바이벌을 오가는 정체성이 불명확한 연휴였음에도 말이다. 사실 그날 어디서 무엇을 했건, 나는 또 적당히 만족스럽고 적당히 아쉬웠을 것이다. 완벽한 하루란 건 없다. 인생이란 으레 그런 것이 아니던가. SNS에 올라오는 친구들의 파티 사진에도 ‘좋아요’를 누르며 그들의 노력과 아름다운 추억에 미소를 지어본다. 여전히 나와는 거리가 먼 풍경으로 보이지만, 일단 행복하면 그걸로 된 것 아닐까. 우리가 원하는 연휴는 그저 바쁜 일상을 잠깐 멈추고 행복을 누리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대단한 이벤트이든 소소한 파티이든 간에,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찾아 누리면 된다. 폭설 속에서 눈사람을 잔뜩 만들어놓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하나씩 가져가라며 친절과 행복을 베풀던 어느 노부부가 있었다. 그들을 기억하며, 그런 마음자세로 살아야겠다고 금방 잊힐 새해 다짐을 해본다. 내 새해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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