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터키 안탈리아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관광이냐 휴양이냐

형은 여기서 뭘 하고 있어요? 이스탄불 해협이 건너 보이는 고등어 케밥집에서 대학생 B가 물었을 때 나는 생각에 잠겼다. 노을이 지고 있었고, 우리 앞으로 웬 닭 한 마리가 머리를 흔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 닭이 있네? 정말 뜬금없이 닭이 있다. 애완용 닭인지, 어디 양계장에서 도망친 닭인지 닭은 계속 우리 주변을 돌고 있었고, B는 그가 지나온 날들을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 여행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광 중. 그는 휴학을 하고 워터파크에서 안전요원으로 오래 일했다고 말했다. 한번도 물속으로 뛰어내려가 사람을 구한 적은 없었다고 말하며 웃었지만, 그의 탄탄한 몸을 보면 사람 한둘은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워터파크에서 오래 일하며 모아놓은 돈으로 이제 막 긴 휴가를 떠나온 참이라고, 이 휴가가 떠나면 다시 대학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는 내게 말하며 웃었고 노을은 여전히 지고 있었고, 닭은 우리 곁을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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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에게 여행은 간명했다. 관광이거나, 휴양이거나. 무언가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보거나, 굳이 무언가를 보려고 하지 않고 누워서 쉬거나. 그는 한국의 워터파크에서 휴양객을 상대하며 일을 했고, 이제는 터키에서 낯선 외국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며칠 후에는 지중해에 가서 한참 누워있을 생각이라고, 다시 휴양을 시작할 거라고 웃으며 내게 말했다.

왜 그의 질문에 답하기 어려웠을까? 그에게 여행은 정확히 두 분류로 명쾌하게 쪼개졌다. 관광 혹은 휴양. 관광이라면 좀더 열심히 둘러보아야할 테고, 휴양이라면 좀더 명확하게 쉬어야할 텐데, 내게 그런 구분은 없었다. 그렇다고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체험만을 중시하는 유형도 아니었다. 적당히 둘러보고, 적당히 걸어다니고. 새로운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고, 때로는 일부러 외로워져 궁상 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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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B는 나의 미적지근한 대답을 듣고 답했다. 듣고보니 형은 관광 중이네요. 그냥 세상 구경하러 나온거잖아요? 나는 끄덕끄덕했고, 우리는 그동안 고등어케밥을 다 먹었고, 그렇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가벼워보였다. 어디 휴양지에나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터키 서남부는 지중해에 면해 있어 여름이면 바다를 즐기러 오는 사람으로 북새통이라고 했다. 여름의 바다는 언제나 북새통. 물 구경 사람 구경하러 바다에 가고 싶었다. 여행이 꼭 관광이나 휴양일 필요도 이유도 없겠으나, 명확한 게 편할 때도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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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탈리아 물소리 나를 뒤집고

처음에는 좀더 작은 도시에 가려고 했다. 보드룸이나 페티예 같은 도시는 다른 곳에 비해 아담한 편이라서, 더 휴양지 느낌이 난다고 했다. 그런데 어쩐지 안탈리아에 갔고, 안탈리아는 남부에 있는 휴양도시 중 가장 큰 도시였다. 지금 와서는 왜 내가 안탈리아에 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작은 도시들은 물가가 더 비싸다고 들어서였던 것 같다. 패러글라이딩 같은 액티비티를 즐길 생각은 없었고, 단지 바다에서 누워 있고 싶은 마음이었으므로 안탈리아로 향했을 것이다. 이스탄불에서 재회한 진도 나를 따라 며칠 후에 안탈리아로 온다고 했다.

그를 기다리는 며칠의 하루가 내게 남아 있었다. 오래되고 커다란 여름의 휴양지에는 로마 시절 유적이 군데군데 있었고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걸어다녔다. 해변이 지척에 있지는 않았고, 바위나 포구 같은 곳이 많았다. 넓은 해변은 중심지를 벗어나야 길게 이어졌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여름 같았다. 햇볕이 내리쬐고, 열기가 오르고, 과일주스가 매대에서 자꾸 팔리고, 바위 틈새에 누워 벌게진 백인들…. 여름에 압도 당하는 기분. 중심지는 절벽 위에 있고 바다는 절벽 아래에 있어서, 바다로 가기 위해서는 절벽을 내려가야 했다. 또 절벽인 만큼 넓은 바다의 풍경을 관망하기 좋았다. 어쩌면 안탈리아는 바다를 관광할 수 있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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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찾아보다 잡은 저렴한 숙소는 바다 근처에 있었다. 숙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람들 뛰노는 광장이었고, 그 광장의 아래로는 절벽이, 그 절벽에 서면 바다가 쫙 펼쳐졌고, 내려가면 더운 바람이 부는 포구였다. 분명 좋은 위치였지만 문제는 숙소의 컨디션이었다. 내가 예약한 방은 창문이 달린, 적어도 지하는 아닌 방이었는데 주인은 나를 지하로 안내했다. 정확히 말하면 반지하방으로. 하나 작게 달린 창은 사람들의 발끝이 보이는 지상을 향해 있었다. 심지어 바깥도 아니라 세탁실로 뚫린 창이었다. 쥐가 다니는지 여러 대의 세탁기 아래로 지저분한 무언가가 굴러다니고, 꽉 막힌 방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바다를 지척에 둔 반지하의 세탁기방에서 습기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주인 할아버지는 모르쇠했고, 나는 잠만 잘 생각인데 뭐 어떤가하는 생각으로 그곳에 며칠 묵었다. 진이 안탈리아로 오면 숙소를 옮기자고 할 요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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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가 있으면 세탁기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우리라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주스도 사먹고, 포구에 가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햇볕을 쬐고 돌아와 방에 누웠다. 꿉꿉한 방에 겨우 누워 선잠에 들었다가, 방에 물이 쏟아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깼다. 진짜 홍수가 났거나, 누가 물을 퍼붓거나 하는 줄 알고 소리를 지르며 새까만 어둠 속에서 깨어났는데, 물은 온데간데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니 세탁기 소리였다. 수많은 세탁기가 동시에 물을 뱉어대는 소리…. 계곡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분이었다. 누렇던 콘크리트 벽은 새까맣고, 물은 굉음을 내지르며 어딘가로 흘러갔다. 그날 밤에 어떻게 잠에 들었는지 알 수 없다. 깨어나니 다 지나있었다. 물소리도 없고, 어둠도 없었다. 여전히 벽은 누렇고, 문틈으로 들어오는 지중해의 빛이 칼처럼 방 안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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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온 한낮에 사람들은 웃으며 걸어갔다. 아이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뛰어 놀았다. 파라솔 아래에 앉은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바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렬한 햇볕 속에 멀리 펼쳐진 바다는 파도 하나 없이 잠잠했다. 밤의 계곡에서 나와 소리 없이 묵묵한 바다의 햇볕을 바라보는 듯했다. 관광인가, 휴양인가? 관광이라면 꿈같은 물소리를 다 겪어낸 기분이었고, 휴양이라면 꿈속에서 며칠 젖다 나온 마음이었다. 내가 관광한 이 도시는 너무 쨍쨍해서 마음 하나 눕힐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를 가더라도 마음의 문제일지도 몰라. 길거리의 돌멩이를 차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 숙소의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있는 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너르고 굳은 그의 등. 나는 어딘가 기댈 구석을 찾은 사람처럼 그에게 인사했고, 그는 나와는 다르게 햇볕이 드는 3층 방을 배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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