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시데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브락 같은 이들

지친 마음으로 숙소의 문을 열었을 때, 막 체크인 중인 진의 익숙한 등짝과 그의 커다란 배낭이 보였다. 내 것보다 훨씬 큰 배낭이었다. 어쩌면 그의 배낭이 그렇게 큼직했던 이유는 그가 1년 넘게 계획된 긴 여행을 다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때는 진의 크고 탄탄한 몸이 버텨낼 수 있는 무게를 생각했다. 나는 못 들고 다닐 배낭. 나보다 몸도 마음도 튼튼한 사람과 함께 할 때의 편안함이 있었다.

몇 달 전에 몽골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이스탄불에서 하루를 보내고, 안탈리아에서 그를 다시 마주한 셈이었는데, 그의 다부진 몸을 보고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지나다니는 터키 사람들은 그를 보면 중국 무술 영화들이 생각났는지, 브루스 리, 브루스 리, 하며 장난스럽게 권투 자세를 취했다. 그와 다니면 딱히 시비를 걸릴 일도, 누군가 심각하게 인종차별을 시도하는 일도 없었다. 묵묵하지만 섬세하게 마음을 살필 줄 아는 진이 종종 떠오른다. 막상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나고보면 진은 나의 상태를 다정하게 살펴주었다. 무엇보다, 누군가 옆에 함께 있다는 게 꽤 든든하다는 것을 오랜만에 다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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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 나름 오랜만에 만난 나를 보고 격하게 환영해주거나, 크게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오래 버스를 타고 한여름의 지중해에 도착한 그는 약간 지쳐보였다. 그래도 반가웠고, 그냥 그가 있어서 좋았다. 이 숙소의 이상한 지하방에서 잠 한 숨 제대로 못 잤다고 그에게 한참이나 투덜대었으나 그는 나와는 달리 같은 값에 좋은 방을 얻어서, 약간 당혹스럽기는 했다. 마치 컴퓨터가 안 된다고 아빠를 불렀더니 막상 갑자기 잘 작동되는, 어린시절의 이상한 억울함 같은 것. 카운터에 선 노인은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니겠나, 네가 운이 나빠서 남은 방이 그게 다였을 뿐이야, 말은 안 했지만 그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진은 나를 위해 다음날 다른 곳으로 숙소를 같이 옮겨주었다.

수영을 즐기는 진을 따라서 도시에서 약간 떨어진 콘얄트 해변으로 향했다. 하얀 자갈이 길게 이어져 있는 아름다운 해변이라고 했다. 옆으로는 거대한 산맥이 보이고, 자갈 해변은 옆으로 길게 이어져 길을 이루는 곳. 구글맵 시대의 여행자들은 어디든지 쉽게 갈 수 있다. 검색하면 무엇을 타야하고, 어디에서 내려야하는지 거의 정확히 나온다. 지도를 보고 다녀야 했을 시대였다면 여기저기 물어가면서 어렵사리 향했겠지만, 핸드폰 속 지도만 제대로 볼 줄 안다면 어디로든 금세 갈 수 있다. 때로는 그렇기 때문에, 한 도시를 겪어보기 전에도 이미 다 알아버린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는 서울에서도 지도를 키고, 안탈리아에서도 지도를 킨다. 가라는 대로 가는 마음은 똑같아서, 때로는 이 손쉬움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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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도도 실수를 하는 법. 핸드폰 속 정보도 오락가락한다. 해변으로 향하는 길에서 어느 버스를 타야할지 잘 가늠이 되지 않을 때, 자기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있던 대학생이 다가와 길을 알려주었다. 자기 이름을 브락, 이라고 소개하며 길을 알려주었던 그는 자신의 번호를 쥐어주며 터키에서 곤란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다. 그 이후로 그에게 연락할 일도, 그와 메세지를 주고 받은 일도 없었지만, 안탈리아의 해변에 대해 쓰려고 하는데 그 브락의 더벅머리가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호의는 기억 속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지 모른다. 여행을 다니며 브락 같은 친절한 이들을 종종 만나왔다. 여행자만이 느낄 수 있는 낯선 곳에서의 환대 때문에, 여행을 계속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브락 덕분에 진과 나는 해변에 도착했고, 진은 수영을 하고 나는 첨벙댔고, 홍합에 밥을 넣어 찐 음식을 맛있게 먹었고(미디예돌마, 라는 음식인데, 길거리에서 흔하다), 맥주를 먹고 파라솔 아래에 누워있다가, 빨갛게 익어가는 흰 피부의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돌아왔다. 파라솔은 모두 붉은 색. 해변의 자갈은 모두 흰 색. 분명한 그 해변에서 한참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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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 가는 먼 길

진과 안탈리아에서 그렇게 하루이틀을 보냈다. 무더위 속에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숙소를 옮기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백화점에 들어가 스타벅스 커피를 마셨다. 진이 수영하러 가고 싶어했던 근처의 계곡은 사실 물에 들어갈 수는 없는 곳이어서, 어디를 다녀올지 고민했다. 안탈리아 근교 ‘시데’라는 마을에 오래전 그리스 시절 즈음 세워진 아폴론 신전이 남아 있다고 했다. 정확히는 아폴론 신전의 기둥 몇 개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해질녘에 찍으면 사진이 무척 잘 나오는, 유명한 곳이었다. 기둥도 직접 보고 싶고, 석양도 보고 싶고, 석양에 비치는 기둥도 보고 싶어서, 시간에 맞춰 시데로 향하기로 했다.

그러나 어떻게 갔다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순조로운듯 보였다. 적당히 저녁쯤 도착해 밥을 먹고 석양을 보고 돌아올 시간에 맞춰 버스에 올랐다. 30분에 한 대 씩 있는 작은 버스를 터미널에서 잡아서 타 1시간 쯤 갔는데, 둘 다 약간 졸았나, 누군가 시데! 시데! 외치는 소리에 버스에서 후다닥 내렸다. 그렇게 내렸더니, 아무것도 없었다. 정류장도 제대로 없고, 어딘지 알 수 없는 곳. 구글맵을 찾아보니 우리가 가야하는 유적까지는 다소 떨어진 곳이었다. 어떻게 해야하나 싶었는데 한 10명쯤 타는 작은 밴인 ‘돌무쉬’가 종종 지나갔다. 잡아서 타려는데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차 있었고… 우리는 망연히 도로 위에 서서 돌무쉬를 4대쯤 보내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겨우 낑겨 탄 채 유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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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데는 물가가 비쌌다. 여유로운 사람들이 한적한 곳에서 쉬러 오는 휴양지의 느낌이 났다. 자주 사먹던 케밥은 두세 배 비쌌고, 찾아가본 유적지에는 정말로 신전 기둥밖에 없었다. 찬찬한 마음으로 와서 기둥도 보고, 바다도 보고, 노래도 틀고 했으면 좋았을 곳이지만, 조급한 마음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하고보니 기둥밖에 없어서 약간 허탈했다. 그래도 다섯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신전의 잔해는, 원래의 신전을 상상하게 할 만큼 잘 남아 있었고, 고대 그리스의 시간이 여기 이렇게 끈덕지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어디 사리지지 않고, 시간 속에 남는 것도 있다는 듯 기둥이 있었다. 아름다운 석양은 없었지만 점차 푸르게 흐려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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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탈리아로 돌아가는 막차 시간이 아홉 시 언저리라고 해서, 앉아 있다가 금세 다시 길을 나서야 했다. 먼저 시데 근처의 버스터미널로 돌아가야 했는데, 우리가 잡아 탄 돌무쉬에는 사람이 가득가득 차 있었고, 무언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 같아 영어를 하는 청년에게 물어보니 너네는 지금 잘못 탔다고, 당장 내려서 길 건너서 새로 타라는 말을 들었다. 정신 없이 내려서 다른 돌무쉬를 탔는데, 터미널로 직접 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가다 터미널 근처 어딘가에 내렸을 때는 막차 시간이 촉박했다. 진과 나는, 이제는 어두워진,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 교외의 거리를 처음에는 걷다가, 조금씩 뛰다가, 결국에는 달렸다. 달리고 달려 온몸이 땀으로 젖었을 때 도착한 버스 터미널, 안탈리아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막 출발을 재촉하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버스 구석에 구겨지듯 몸을 뉘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후 구글맵을 보니 버스가 안탈리아의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한밤에 어디로 가는 걸까… 짐 하나 없이 어디에서 자야 할까… 승무원에게 급하게 묻자, 어 안탈리아 가는 거 맞다하는 대답이 들려오고, 버스는 유유히 유턴해서 안탈리아 방향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밤 늦게 숙소에 돌아 왔을 때, 나는 이 정신없는 하루를 꽤 오래 기억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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