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룬을 타도 좋았겠지만...
벌룬을 타도 좋았겠지만...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2.09.30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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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괴레메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괴레메의 뜻

괴레메의 돌은 꼭 곡괭이로 패면 패일 것 같은, 거대하지만 충분히 단단하지는 않은 인상의 돌이었다. 이 지역 대부분의 지형이 이런 돌로 가득했다. 바람인지 사람인지 돌들을 깎아 놓아 만들어진 기암괴석들. 버섯을 닮은 돌들부터 뾰족하게 솟아있는 돌들까지, 터키 중부 괴레메는 돌의 고장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근방을 카파도키아, 라고 불렀고 괴레메는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마을 중 한 곳이었다. 터키 여행하면 떠오르는, 돌무더기 너머 떠오르는 아름다운 벌룬이 뜨는 곳이 괴레메였다. 날씨가 좋은 새벽에만 뜰 수 있다는 벌룬. 수십 개의 벌룬이 함께 떠서 장관을 이루는 벌룬. 중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서인지, 값이 너무나도 올라 결국 나는 탈 수 없었던 벌룬…. 꼭 벌룬을 타기 위해 괴레메에 간 것은 아니었는데도, 가끔 떠오른다. 눈 딱 감고 한번 타볼 걸 그랬나? 후회하지는 않지만, 벌룬은 ‘눈 딱 감고 한번 해볼 걸’ 리스트에 분명 올라 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지중해 도시 안탈리아에서 하루 나절을 버스로 달려왔다. 이 이후의 여행에서는 밤에 이동하는 쪽을 더 선호하게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낮에 이동하는 편이 더 좋았다. 어쩐지 밤에는 편한 곳에서 자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밤에 버스를 타고 자면서 이동해 봐야, 컨디션이 좋지 않아 시간을 많이 아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막상 나중에 겪어보니 밤에 하는 이동이 여러모로 편했지만 터키에서는 주로 낮에 이동했다. 동행했던 진은 밤 버스를 타고 싶은 눈치였는데, 나를 배려해 낮의 버스를 함께 타주었다. 거의 8시간 넘게 걸렸던가. 버스의 좌석은 좁았고, 차창의 풍경은 점차 바뀌어갔다. 창밖을 보다가, 수목의 변화를 보다가, 다시 핸드폰을 뒤적거리다가, 다운받아온 한국드라마를 보다가, 휴게소에 들려 스트레칭을 하다가, 졸다가, 차창을 보다가, 아침에 출발한 버스는 저녁때가 좀 지나서야 괴레메에 도착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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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해둔 숙소에 짐을 풀었다. 정말이지 ‘기암괴석’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기기괴괴한 돌들 사이로 집들이 있었고, 돌의 모양은 조금씩 다 달랐다. 어두운 거리에 얕은 조명들 사이로 돌들의 전모가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기묘했다. 영화 세트장 한 가운데 들어온 느낌이었다. 다른 어느 곳에도 없는 이곳만의 지형. 진과 나는 말로만 들었던 이 특이한 곳에 떨어져 두리번거리다가, 그래도 늦은 저녁을 챙겨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밥집으로 향했다. 이 지역 음식으로 유명한 ‘항아리 케밥’을 먹었다. 작은 항아리에 담겨 나오는 고기 스튜 같은 음식을 테이블에서 항아리를 직접 깨 서빙하는 모양이었는데, 퍼포먼스가 중요한 음식인 것 같았다. 온갖 관광객이 모여드는 곳이니, 이런 유의 음식은 특히 제대로된 곳을 찾기 힘들었다. 우리가 먹었던 음식점도 그저 그런 곳이었고, 맛은 어디서 먹어보았던 스튜와 비슷했다. 모든 게 특이했지만, 음식만큼은 특이하지 않았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숙소에 돌아가니 마당에서 사람들이 맥주를 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예수라고 소개하는 숙소 주인 같은 남자와, 우리 또래의 중국인 여자애, 독일에서 여행 온 커플들, 팔레스타인에서 떠나와 터키를 떠돌고 있는 데이터 엔지니어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숙소는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판자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아무렇게나 놓인 타이어들, 군데군데 자라나있는 잡초들, 그 한중간에 꽤 거대한 캠프파이어.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며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봉준호, 김기덕, 김기영의 영화를 좋아하던 이스라엘 아저씨도 있었고, 자기 딸이 요새 한국 아이돌에 미쳐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게 걱정이라는 터키 현지인 아저씨도 어느 순간 나타났다. 영어를 배워야 하는데 한국어를 배우고 있으니 걱정이라는 아저씨의 호방한 웃음이 좌중을 지나가고, 나는 독일의 쾰른에서 왔다는 폴과 한참을 이야기했다. 내가 읽은 독일의 책들과 사회운동과 그가 한국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 등등, 그날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러갈 때까지 계속 이야기를 했던 것만, 그 앞에서 타들어가는 불꽃만 선명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지적으로 보이는 폴에게 무언가 인정받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 아무튼 대화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다 새벽쯤 끝이 났다. 그는 이 마을 괴레메의 뜻을 아냐고 물었다. 잘 모르겠다고 답하자, 그는 ‘볼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이라고 말해주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볼 수 없는 곳

볼 수 없는 곳이다. 고대부터 사람들은 이 땅의 밑으로 숨어들었다. 이 기암괴석들은 정말 곡괭이로 파면 팔 수 있는, 부드러운 돌이었다. 사람들은 돌 안으로 동굴을 팠고, 돌 밑으로 지하를 팠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지형은 사람들이 숨어드는 곳이었다. 지금 터키의 주요 민족인 튀르크인들이 이 땅을 차지하기 이전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지나갔고, 싸웠고, 섞여들었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초기 기독교인들부터 그 후 숨어들 만한 이유 있던 많은 이들이 숨어들었다. 기암괴석 사이의 동굴과 지하도시. 거의 2천 년 전부터 활용되었던 도피처. 그들이 동굴에 그려놓은 성화들과 작은 교회들은 꽤 많이 남아있고, 성지순례를 위해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곳에 들린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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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나는 원래 다른 투어를 신청할 생각은 없었는데, 워낙 이곳의 지형이 넓다보니 한 군데 정도는 투어를 신청해서 다녀와도 좋을 것 같았다. 대부분의 투어는 색깔로 불렸다. 그린 투어, 레드 투어, 로즈 밸리 투어…. 우리는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데린쿠유 지하도시와 근처 명소들을 들려 보여주는 그린 투어를 신청해 다녀왔다. 카파도키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파노라마 포인트를 지나고, 데린쿠유 지하도시 안을 다녀왔다. 들어가면 방에 방이 계속 연결되는 이 동굴은 8층까지 이어진다고, 기원전 700년부터 사람들이 대규모로 자리를 잡았을 거라고, 가이드 아저씨는 말했고 나는 땅 밑에 사는 사람들의 아득함에 대해 생각했다. 이 땅 밑 동굴에서, 천 년 넘게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살다가 떠났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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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특이한 으흐랄라 계곡은 20km 사이로 비잔틴 시대의 수도사들이 만들어 놓은 동굴 교회들이 이어졌다. 그 사이를 걸어가는데, 비가 계속 내렸다. 너무 많은 흔적들이 이곳에 있었다. 사람 한번 살지 않았을 것 같은 기암괴석의 지형에, 역사의 겹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스타워즈를 촬영해갔는데 정치적 이유로 상영은 못했다는 촬영지, 비둘기가 수백 마리는 있던 언덕. 그냥 아무 언덕이나 스타워즈 촬영지라고 해도 믿을 만했고, 어디에서 비둘기가 수백 마리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수 천 년의 사람 살던 역사도 그대로 남아 있는 이 이상한 동네. 그 동네 위로 자꾸만 뜨는 벌룬. 벌룬 위에서 보면 밑의 지형은 정말로 다른 행성처럼 보일 것이다. 딴 나라 이야기처럼, 다른 이야기는 안 보일 것이다. 벌룬을 타도 좋았겠지만, 땅 밑에서 볼 수 있는 것도 많았다. 비둘기가 앉은 자리에서 두 팔을 폈고, 수백의 비둘기는 한 번에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다시 돌아왔다. 같은 돌에 앉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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