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을을 삼킨 저수지
마을을 삼킨 저수지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내가 참 많이도 무식해서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사자성어를 한쪽으로만 생각했었다. 여우도 죽을 때가 되면 고향 쪽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얘기를 액면 그대로만 파악했던 것이다. 이제 나이가 제법 들어서 다시 생각해보니 아하 그렇구나,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 그림도 같고 꿈도 같고 환상인 것만도 같은, 가난이 흡사 직업이나 직위처럼 여겨질 정도로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그 지독한 가난을 차라리 그리워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일종의 깨달음 같은 것이 폭탄처럼 머릿속에서 터졌다.

사십 여년 만에 만난 옛 친구가 옆에 없었다면 그런 신박한 생각도 어쩌면 해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뭐라고나 할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까지는 아니라 해도, 우리는 그날 그 시간 매우 수상한 서정에 젖어 있었다. 서정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물질처럼, 따뜻한 물처럼 우리의 몸을 타고 줄줄 흐른다는 느낌이었고, 슬픔과는 전혀 무관한, 어쩌면 지상 최대의 행복감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를 눈물이 금방이라도 펑펑 쏟아질 것만 같았다.

옛 친구와 나는 그때 물에 잠긴 옛 친구의 동네를, 동네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저수지의 한 지점을 내려다보며 시장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5일마다 돌아오는 고창 장날에 관한 에피소드는 많고도 많아서 일단 입을 열었다 하면 끝을 낼 수가 없을 정도였지만, 그 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우리의 나이 다섯이나 여섯 살 때의 기연가미연가 희미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는 복숭아에 관한 추억들이었다.

골짜기가 너무 깊고 가팔라서 흙은 대부분 빗물에 쓸려가 버리고 자갈이 절반 이상인 마을, 그래서 농사다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닥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생계유지의 핵심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무더운 여름은 제1차 수확의 계절이었다. 제2차 수확은 늦가을 닥나무를 베고 삶고 걸러서 종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어쨌든 제1차 수확의 계절 여름이 되면 그 모습이 볼 만했다.

잘 익은 복숭아를 아버지는 지게에 지고, 어머니는 바구니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큰누나 혹은 큰형은 멜빵을 해서 등에 지고 일렬횡대로 가파른 산골짜기 오솔길을 힘겹게 걷는다. 그 뒤로 멀리 꼬맹이들이 울고불고 온갖 괴성을 질러대며 따른다.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큰형이나 큰누나가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돌멩이를 집어 던지는 자세를 취하며 큰소리로 위협한다.

“아 저런 오살헐 것들이 참말로, 집에 안 가, 얼른 집에 가서 집 봐.”

 

물에 잠긴 고인돌
물에 잠긴 고인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러면 꼬맹이들은 더 크게 한없이 슬픈 소리를 내며 돌아서는 자세를 취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순간뿐이다. 잡아서 꽁꽁 묶어놓지 않는 한 아이들은 일편단심 집요하게 일관된 행동으로 어른들의 속을 후벼놓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을 잡아서 묶어놓을 생각까지는 차마 해보지를 못한다. 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아이고 저놈 새끼들, 저놈 새끼들” 소리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처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다.

그렇게 저렇게 빽빽한 숲길 산등성이 하나를 넘고, 개구리 소리가 요란한 오뱅이골 진창길을 건너서, 우람한 병풍바위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서 애장골을 지나면 등장하는 또 하나의 산등성이, 이 고개를 넘어서면 나무꾼들이 쉬어가는 산왕등이 거대한 느티나무 저편으로 눈앞이 제법 환해지는 논밭이 보이고, 고창의 대표적인 인천강 상류가 아스라이 펼쳐지고, 그 모든 것들을 감상이라도 하는 형태로 길게 늘어선 마을 매산이 나온다. 지금은 고인돌공원으로 명명돼서 사람은 한 명도 거주하지 않는 매산, 거기가 바로 우리 마을이다.

우리 마을 매산에 들어서면 복숭아 마을 어른들은 마당에 사람이 있는 아무 집으로나 들어가서 복숭아 보따리를 내려놓고, 물 한 바가지씩을 얻어서 벌컥벌컥 들이켜고, 온 몸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훑어 내리며 집 주인에게 꼬맹이들을 부탁한다.

저만치 멀리 길모퉁이에서 아닌 척 고개를 돌린 채 딴전을 부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는 꼬맹이들이 더 이상은 따라오지 못하게 붙잡아두고 있으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를 굳이 따져 묻지도 않는다. 부탁이란 새삼스런 인사치레일 뿐이다. 내 마음을 네가 알고 네 마음을 내가 아는 뭐 그런 이심전심이 작동하는 순간인 것이다.

왜 모르겠는가. 다 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이 왜 가난한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지만,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눈빛만 보아도 그 마음을, 그 난처한 슬픔을 즉각 파악해서 그에 맞는 대처를 해주기 마련이다. 복숭아를 팔아서 쌀과 보리 등 곡물을 구입해야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지금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부득부득 쫓아오는 꼬맹이들을 떼어놓는 일이라는 것을, 그 절박한 심사를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무도 알고 있겠지
나무도 알고 있겠지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첩첩산중 골짜기 복숭아 마을에서 우리 동네 매산까지는 십 리가 훨씬 넘는다. 그리고 우리 마을에서 고창 장까지는 십 리가 약간 넘는다. 그러니까 복숭아 마을 사람들은 하루에 최소한 이십 리 이상 삼십 리 가까이를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왕복하는 셈이다. 만약에 꼬맹이들을 중간에서라도 떼어놓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십 리도 훨씬 넘는 산골짜기 언덕배기 오솔길을 울며불며 정신없이 쫓아오는 동안 꼬맹이들은 지쳤고, 만약에 어머니나 아버지가 부드러운 말 한 마디라도 건네주면 즉시 달려와서 힘들어죽겠다고, 업어달라고 보챌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그럭저럭 어떻게 장터까지 데려간다 해도, 꼬맹이들은 떡 사 달라 사탕 사 달라, 정신없이 졸라대는 방식으로 어른들의 복숭아 팔기를 방해할 것이고, 최악의 경우 아무 데로나 마구 뛰어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런 최악의 사태를 예방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꼬맹이들을 떼어놓는 것뿐이다.

내가 지금은 제법 세상물정을 알아서 이렇게나마 해석을 하지만, 다서여섯 살 시절 그때는 천만에 말씀이었다. 그 시절에 우리 동네 아이들의 관심은 오직 복숭아에만 쏠려 있었다. 우리 동네는 감나무와 대추, 그리고 밤나무와 살구나무가 집집마다 한두 그루씩 서 있었을 뿐 복숭아나무는 구경조차 해볼 수 없었다.

게다가 복숭아는 그 맛이 뭐랄까, 대추나 살구, 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신비한 맛을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우리 동네 아이들은 복숭아 농사를 짓는 산골짜기 마을 아이들을 은근히 선망하고 동경하는 한편 복숭아 농사도 지을 줄 모르는 우리 동네 어른들을 내심 얕잡아보고도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름 한철 장날만 되면 입안에서 맴도는 복숭아 향기를 그리워하며 그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고향 잃은 사람들의 망향정
고향 잃은 사람들의 망향정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복숭아를 팔러 가는 어른들 또한 우리 동네 아이들의 그런 심사를 잘 알고 있었다. 벌레가 뜯어먹었거나 상처가 생겼거나 너무 익어서 짓무른 복숭아를 따로 챙겨 와서 우리 동네 꼬맹이들 품에 안겨주는 복숭아 마을 어른들은 뭐랄까,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 마음을 헤아려볼 생각조차 못 해본 채로 그저 그것을 당연하게만 여겼었지만, 인간사를 조금이나마 볼 줄 알게 된 오늘날 그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고맙고 감사하기만 하다. 장에 팔 복숭아를 지고 가기에도 힘겨운 판에 남의 동네 아이들 입맛까지 알아서 챙겨주고자 한다는 게 이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말이다.

어쨌든 여름 한철 장날은 우리 동네 아이들의 축제날이었다. 벌레가 뜯어먹었건 상처가 났건 너무 익어서 짓물렀건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먹어대고 나면, 그러면 배가 너무 불러서 숨을 쉬기조차 어려운데 그런 와중에도 슬슬 잠이 온다. 산골짜기 복숭아 마을 꼬맹이들은 이미 잠이 들었다. 그 옆으로 아무 데나 되는대로 픽픽 쓰러져서 한숨 자고 나면, 그때부터 새로운 축제가 시작된다.

산골짜기 복숭아 마을과 우리 마을의 중간쯤 되는 곳, 그곳을 오뱅이골이라 부르는데 여름은 물론 겨울에도 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다. 여기저기 사방에서 물이 자작자작 조금씩 솟아오르는 습지였다. 이 습지에 크고 작은 돌들이 깔려 있는데 그 속에 보물이 있었다. 돌을 들어내면 가재가 불불불 달아나고, 돌에는 고둥이 붙어 있는 것이다.

고둥은 엄마들이 된장국 끓일 때 쓴다고 좋아했지만, 아이들은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가재였다. 가재를 잡아다가 불에 구우면 빨갛게 매우 아름다운 빛을 내며 익어 가는데 맛이 엄청 좋아 보인다. 하지만 온통 껍질뿐이어서 삼킬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삼킬 만한 것은 없어도 씹을 때의 맛은 진짜로 황홀하다. 된장국에서도 멸치 한 마리 구경하기 어려운 시절에 가재는 그야말로 침을 질질 흘리게 하는 그 무엇이었던 거다.

하지만 아무 때나 달려가서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재가 있는 오뱅이골을 가자면 애장골을 지나야 하는데 애장골이란 무엇이냐. 크고 작은 항아리와 동이가 수도 없이 엎어져 있었고, 그것은 곁눈질로 슬쩍 훔쳐보기만 해도 금방 귀신이라든가 그 어떤 요사한 것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으스스함이 있었다. 꼬맹이들이 멋대로 지나가면 ‘용천뱅이’가 나와서 간을 빼 간다는 호밀밭만큼이나 무서운 곳이 애장골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서 젖을 떼기 전에 죽으면 동이나 항아리에 담아서 장례를 치른 곳이라는 얘기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 꼬맹이들에게는 이름조차 듣기 싫을 정도로 무서운 곳이었다.

 

망향비
망향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골짜기 복숭아 마을 꼬맹이들은 애기귀신 따위 나올 테면 나오라는 식의 대단한 용감성을 장착하고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들의 그런 용감성을 마치 경호원처럼 앞세우고 달려가서 가재 잡이를 하는 것이었다.

한참 정신없이 가재 잡이에 몰두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하고, 산골짜기 특유의 으스스한 그림자와 함께 알 수 없는 소리가 은밀하게 온 몸으로 느껴진다. 그러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겁을 먹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침묵으로 들어가지만, 산골짜기 복숭아 마을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의연하기만 하다.

큰일났다. 어떻게 돌아가지? 우리 동네 아이들이 차마 입으로 말은 못하고 내심으로만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쯤이면 장에 가서 복숭아를 다 팔고 쌀이며 보리쌀을 사서 등에 지고 돌아오는 복숭아 마을 어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이때다 하고 있는 힘껏 달음박질을 치는 것이었다. 마치 그 목소리가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 돌아가고 싶다. 눈을 떠도 감아도 그리운 그 시절로.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서 그것을 처리하는 기술을 개발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이 시대는 아무리 좋게 보자 해도 좋아 보이지가 않는 걸 어쩌랴.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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