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유튜브는 책을 집어 삼킬 것인가' / 김성호, 엄기호, 따비, 2021

ⓒ위클리서울/ 이주리 기자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책의 제목이 묘하다. '집어삼킬 것인가?'라고 물었다는 것은 최소한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사실 그렇다. 유튜브/영상은 기존의 텍스트를 통해 이루어지던 많은 것들을 잠식하고 있다. 어쩌면 이 상황을 '잠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펜대를 굴리고 있는 아저씨들의 관점일지도 모른다. 책을 쓴 두 학자는 이 지점부터 시작했다. 왜 어떤 세대는 책이 읽히지 않는 세대를 보며 혀를 차는가? 우리에게 책/텍스트는 무엇인가?

제목만 알고서는, 텍스트를 읽지 않는 이 시대에 대한 끌끌거림일 줄 알았는데 결코 그렇 지 않았다. 그렇다고 '텍스트'의 미래를 우려하는 사회분석서 느낌도 아니었다. 오히려 전반적인 소통 능력, 그들이 삶의 리터러시라고 부르는 ‘리터러시’가 무엇이며 어떻게 생기고 또 길러져야 하는지를 천천히 셈 해보는 부드러운 대담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좁은 의미에서 책/텍스트가 왜 소중한지에 대한 저자들의 어쩔 수 없는 생각과 마음 역시 녹아들어 있다. 사람들은 영상을 보고, 책을 덜 읽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 그래서 '러터러시'가 감퇴한 걸까? 책은 어떤 과거를 거쳐 현재를 보내고 미래를 겪을까?

ⓒ위클리서울/ 따비
ⓒ위클리서울/ 따비

우선 나는 책에 관해서 적어도 두 가지를 믿는다.

1. 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 책은 예전보다는 덜 읽힐 것이다.

누군가나 무엇의 죽음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문학의 죽음이니, 주체의 죽음이니, 종이책의 죽음이니 그런 소리들은 약간의 과장이 섞인 충격요법에 가깝다. 이미 있던 것들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물론 허망하게 죽을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나, 특히 인간이 오래 해온 것들이 '죽는다'고 이야기할 때는 보다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유사 이래로(유사라는 말이 전해주듯) 텍스트를 사용해왔고, 문명은 텍스트를 기반으로 실현되었다. 인간에게 조금 더 본연적인 것은 ‘말’이지만, 그 말을 물질로 뉘여 놓는 '글'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텍스트를 담는 그릇인 '책'은 그 형태가 변할지언정, 어쩌면 종이책이 아닐지언정(물론 나는 종이책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덜 읽힐 것이다. 어쩌면 텍스트는 너무 많은 것을 담당해오고 있던 것은 아닌가? 텍스트만이 모든 것을 적합하게 담아내는 형식인가? 분명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텍스트에 의존했던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게 텍스트뿐이었기 때문은 아닌지. 예전에는 요리도 책으로 배웠다. 지금은 거의 없다. 인간이 사용하는 매체들은 분명 변화를 겪는다. 사진이 생겼고, 이제는 영상이 생겼다. 나아가 근 몇 년 사이에는 유튜브가 방송 매체보다 삶에 더 밀착하고 있다. 이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단순한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방구석에 앉아 요즘 사람들은 책을 안 읽어서 바보가 되었다며 끌끌거린다면, 그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는다.

저자들은 텍스트에 집착하는 4050 세대의 마음을 먼저 들여 본다. 그들이 막 교육을 받던 때는 한국에서 '교육'이 부흥하던 때였다. 그때는 모든 것을 책으로 배워야 했다. 교과서에서는 텍스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좁은 의미의 문해력을 키웠고, 지루한 교과서 밖에서 흥미를 붙일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책'밖에 없었다. 교육 좀 받았다는 4050 세대는 사회적 상황상 책의 수혜를 받은 세대라는 것. 그러니 그들이 보기에 그 윗세대는 책을 안 읽어서 멍청하고(노인네들 유튜브 보지 말고 책이나 좀 읽지), 아래 세대는 유튜브 영상이나 뺑뺑이 돌리고 있는 문해력 딸리는 세대다(요즘 애들은 책을 안 읽어서 점점 더 멍청해). 그러나 그들은 전후를 겪은 윗세대의 열악한 상황과, 텍스트 아닌 매체가 이미 많은 아래 세대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러터러시'를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문해력'으로 좁혀 이해하고, 그 관점이 얼마나 권력화 되었는지를 모른 체한다.

문제는 '러터러시'를 단순히 텍스트를 읽고 정확히 이해하는 개인의 '능력'으로 좁혀 이해하는 데에 있다. 텍스트, 그 외의 매체를 적절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사용하고, 표현하는 진정한 의미의 리터러시는 그 사이에 유야무야되었다. 모두가 '측정 가능한 해석력'을 보여주는 데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왜 측정 가능해야 하는가? 그래야 공정하니까. 과잉된 경쟁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공정' 담론은 '텍스트'에 대한 관점을 거의 화석처럼 딱딱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이 책의 요지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교육에 닿는다.

책 읽기가, 공정한 경쟁을 위한 문제/답 찾기가 되어버린 상황. 그래, 물론 꼭 책일 필요는 없다. 다양한 매체들이 부상하고 있고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며 꼭 모든 영역에서 책 읽기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그 고집은 잘못하면 아집이다. 책이 영상을 강화하고, 영상이 책을 강화하는 선순환을 상상해 보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책'을 통해, 글 읽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이점들이 분명 있었다. 글은 영상만큼 특별한 물리적 사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고(아직까지는), 기록의 특성상 수많은 정보들은 문자의 형태로 남아있다. 편집과 인용, 참조와 조언이 용이한 텍스트의 세계는 얽히고설킨 세계를 풀어 이해하고 맥락을 짓고 다시 만드는데 인간에게 오랜 영향을 끼쳐왔다. '읽기'를 통해 만들어진 근대적 주체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한다. 그 읽기의 근대성으로 우리는 개인이 되었지만, 점점 더 폭압적으로 구는 근대성은 읽기를 답 맞히기 게임으로 만들었다. '읽기'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던, 복잡한 세계를 섬세하게 한 올씩 풀어 이해할 수 있는 비유적 의미로서의 독자들은 사라져 갔다.

다양한 맥락 속에 놓인 사람과 사물의 맥락을 파악하고, 적절한 언어로 말을 걸고 듣고 이해하는 일. 그것이 저자들이 생각하는 '리터러시'인 셈인데, 그런 힘은 점점 쇠퇴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듣고 말하는 의사소통이 없다. 쓰는 사람은 자기 이야기만 하느라 너무 길게 쓰고, 보는 사람은 요약된 것만 보고 싶어 하며 더 짧은 동영상만을 원한다. 동전의 양면다. 상황은 - 소통 없음.

'읽기'가 여러 의미에서 쪼그라든 이후, 인간이 읽기를 통해 얻고 있던 소통력도 옅어졌다는 것. 사람들이 영상으로 향하고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전반적인 상황 자체를 보라고 저자들은 말하는 듯하다. 종이책이 안 팔리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읽는 사람의 풀은 점점 더 고여 가고, 영상의 세계에서 '소통의 리터러시'를 기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보인다. 텍스트 읽기의 즐거움을 복원하는 교육을 통해, 읽기에서 얻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고, 단순히 '텍스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을 접하고 익혀나가며 각 매체들 간의 차이에 대한 메타적 인지를 배워가고,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 큰 틀에서 당연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한 대목. 언어학자 김성우의 이야기. 김성우는 어머니와의 일화를 책으로 썼다. 그는 평소에 글을 거의 읽지 않는 그의 어머니가 당연히 그의 책을 쉽게 읽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의 책이 나오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게 읽었다고 했다. 김성우가 놀라 묻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이야기잖아.” 문해력은, 맥락과 상황과 위치에 따라 다르다. 결코 완전히 고정된 '독해 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