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반1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동쪽으로 가면 길이 있다

터키 동쪽에 있는 커다란 호수의 이름은 반(van)이었다. 지도를 펼쳐 놓아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호수였다. 그렇게 큰 호수가 있으면 가야지, 마침 우리는 터키의 동쪽에 있다. 진과 나는 자연스럽게 호수가 있는 도시로 향했고 그 도시의 이름 역시 반(van)이었다. 다른 터키 동부처럼 쿠르드족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란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다고도 했지만, 이란으로 가려면 비자가 필요했다. 꽤나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여권에 이란에 다녀온 흔적이 있으면 미국 입국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누군가에게 들었다. 미국에 갈 생각은 없었지만 어쩐지 고민하게 되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란에 가야지, 테헤란로를 보다가 정말로 테헤란에 가보기도 해야지 생각하기만 했다. 지금은 히잡을 벗고자 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시위를 하고 있을 그 테헤란. 아직까지는 이란에 가보지는 못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면, 더군다나 중국의 신장위구르자치 지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면, 나는 그 도시들을 차례차례 지나 육로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평생을 아시아 동쪽에 살아왔지만 나는 아시아에 대해 너무 몰랐다. 단지 육로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신기해 할 만큼 아시아를 몰랐다. 국경의 경계가 희미하고, 지금처럼 어떤 국가가 막혀 있지 않았을 시절에 사람들을 느릿느릿하게 긴 길을 지나 터키와 유럽으로까지 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시절에 여행은 여유 있는 이들의 유희가 아니라 삶을 건 고난이었겠지만, 나는 그 시절이 궁금하다. 우리가 잊어버린 그 길들과, 아시아의 역사가 궁금하다. 궁금해서 여행을 다녀온 것은 아니었지만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더 궁금했다. 마주칠 때마다 모르는 얼굴들로 가득했던 아시아 여행은 그래서 내 기억 속에서 중요하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물론 기억하는 것은 고작 사람들의 얼굴이다. 아시아의 잊힌 역사 같은 것들은 전부 다 나중에 덧붙여진 말이다. 반으로 향햐는 버스에서 진과 나에게 말을 걸어왔던 사람은, 히잡을 둘러싸고 눈을 반짝거리던 지크란이었다. 너희는 어디에서 왔냐고, 나는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고, 그렇다면 대화를 하자고 말했던 지크란. 지크란은 일종의 임용 시험을 보러 반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자기도 반에 처음 가는데 설레는 마음이라며 지크란은 웃었다. 지크란과 이야기할 때 내 옆에 앉아 있던 남자도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디야르바크르에서 법을 공부하는 대학생으로, 지금은 고향인 반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어딘가 시니컬해 보이는 남자를 지크란은 조금 경계했다. 그의 이름은 오마르였다. 집에 새로 산 폭스바겐이 있으니, 내일이 되면 너희를 태워줄게. 도시와 호수를 둘러보게 해줄게. 빈말인지 아닌지 던진 오마르의 말에, 지크란이 그의 핸드폰 번호를 받았다. 둘은 모두 쿠르드인이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반에서 뺨 맞기

늦은 밤, 반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아침에 일어났다. 지크란과는 점심에 만나기로 했고 오마르에게서는 연락이 늦었다. 호기롭게 관광을 약속했지만 아무래도 집에 누워보니 귀찮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모든 약속이 다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은 알았다. 지크란이 온다는 점심때까지 진과 나는 도시 이곳저곳을 걸었다. 서쪽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파챠’라는 설렁탕 같은 음식을 아침으로 먹었다. 나보다 한국 음식을 그리워했던 진은 만족스러워 했다. 빵이 아니라 밥을 말아 먹어야 하는 건데, 빵을 쪼개 국물에 적시며 진이 말했다. 부드러운 빵이 국물에 젖어 더 부드러워졌다. 라임을 짜서 넣으면 이국의 맛이 났다. 터키에서는 음식에 실망한 적이 거의 없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이 도시에서도 역시 모스크에 갔다. 한 여름의 터키에서 그늘진 모스크는 역시나 시원했다. 챙 없는 모자를 쓴 할아버지들이 열심히 쿠란을 외우고 공부하는 모습이 보였다. 여름쿠란학교네, 여름성경학교처럼. 독실한 사람들의 자세는 충분히 경건했다. 경건한 자세로 앉은 사람들과, 자유롭게 누워서 자는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 보였다. 대부분의 모스크에서는 우리를 신경 쓰지 않거나, 반갑게 맞이 해주었다. 이슬람은 낯선 사람을 환대한다고, 모스크는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라고 그들은 자주 말했다. 지난 환대의 기억을 떠올리며 새로운 도시에 가면 모스크에 갔다. 모스크도 열려 있고 화장실도 열려 있어서, 급할 때마다 찾는 모스크는 나에게 작은 구원을 주기도 했다. 그 작은 구원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반의 모스크에서도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에 가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화장실에 갔는데, 또 모스크의 화장실에서 나는 대개 편안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뒤로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찰나, 누군가 내 뺨을 때렸다. 그는 계속 눈을 까뒤집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나를 보고 왜인지 흥분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침이 계속 되었다. 정신의 이상을 겪는 사람인지, 내 곁에 있던 터키 사람들도 당황했고, 물론 그를 제지하고 나를 보호해준 것은 아니었지만, 당황한 사람들 사이로 나를 때린 정신이상자는 유유히 사라졌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흘끗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얼떨떨한 기분에 아프지도 않았다. 끝내 화장실에 다녀와서 진에게, 방금 뺨을 맞았다고 말했더니 진도 얼떨떨해 했다. 아무튼 그 사람은 사라졌고, 붙잡았어도 말이 통하지 않았을 것이며, 경찰이 온다고 해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아프게 맞지 않아서 그런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되레 신기했다. 뺨을 맞아본 기억이 너무 오랜만이라, 전혀 모르던 감각을 발견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마지막이 도대체 언제였지. 이렇게 맞을 수도 있는 거였구나. 회초리도, 주먹도 아니라 뺨이라니. 점심에 만난 지크란에게 뺨 맞은 이야기를 했더니, 지크란이 너무 미안해했다.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자기도 모르겠다며, 참 알 수가 없다고, 아무튼 자기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냥 웃었고, 우리가 함께 먹은 케밥은 충분히 맛있었다. 근처 모스크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가 울렸다. 지크란은 밥을 먹다가, 잠시 양해를 구하고 식당 내 기도실로 기도를 하러 갔다. 웬만한 식당이나 건물에는 기도실이 있었다. 기도를 하고 돌아온 지크란과 밥을 먹으며 한참 이야기했다. 히잡은 선택이 되어야 한다고, 이슬람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밖에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할 거라고, 지크란은 말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기독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며, 언젠가 자식을 낳는다면 여러 종교를 모두 알려주고 그중에 선택하라고 할 거라며, 지크란이 말을 이어나갔다. 지크란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에게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어떤 열의 같은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