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인생의 역사, 신형철, 난다, 2022

ⓒ위클리서울/ 정다은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한 번도 문학평론가 신형철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에 대해서라면 추억할 거리가 많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요즘처럼 추운 겨울이었다. 대학교 기숙사 벤치에서 떨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고, 으레 그렇게 술에 취해도 괜찮은 날이 이어졌다. 이제는 그럴 자격을 얻었다는 듯 삼삼오오 모여 앉아 삶에 대해 꼭 한마디 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는 듯 우리는 연애나 진로에 대한 비교적 작은 고민부터, 배우고 있는 교과목이나 사회에 대한 무거운 질문까지 끊이지 않고 서로에게 묻고 따졌다.

어떤 문제이든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요원해 보였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는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우리에게 무거웠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의 하루를 어떻게 먹고 사느냐에 대한 문제는 아니었기에 우리는 덜 아파도 더 아픈 척하며 스스로 속고 속이며 울더라도 추운 겨울에 붉어진 사람의 볼처럼 아직은 괜찮았다. 성기고 어설펐다. 아픔은 아픔이었고 기쁨은 기쁨이었던 겨울의 벤치에 앉아 친구들과 나는 그렇게 숱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형철 님의 '인생의 역사' ⓒ위클리서울/ 난다

그때쯤 막 친해졌던 대학동기 B는 내게 신형철이라는 문학평론가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자신은 늘상 ‘정확한 것’만을 좋아했기에 두루뭉술하게 말하곤 하는 문학에 이입하기 어려웠는데, 문학을 아주 정확하게 풀어내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있더라고. 고등학교 때부터 그를 알고, 그의 글을 따라 읽어 왔다고. B는 나의 글을 보고, 너도 신형철을 읽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한참 B의 태도나 몸가짐에 큰 인상과 호감을 받던 중이라 B가 추천해주는 책이라면 어떤 책이든 읽고 싶었다. 그렇게 신형철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처음 읽게 되었고, 연달아 그전에 나왔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마저 읽었다.

그때 B와 나는 대부분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했다. 우정이든, 연애이든 어떻게 관계를 지속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지금 당장은 좋을지라도 혹은 아무런 문제없어 보일지라도, 어떤 관계 아니 대부분의 관계는 처참히 부서지고 만다. 그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이랬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 관계는 어떻게 성립될 수 있었는가? 나아가 그 관계는 왜 부서질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면 부서지거나 부스러지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가? 모든 관계에 사랑의 맥이 끼어 있다면 그때 나와 B가 한참 물었던 것은,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사랑 속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고, 정확히는 그것들을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해서였다. B는 더 ‘완전한 사랑’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뾰족하게 아파했고, 나는 ‘완전한 사랑’ 같은 것은 없다고 쉽게 인정하며 두루뭉술하게 아파했다.

우리의 질문에 비교적 정확하게 대답해 주었던 사람이 신형철이었다. 그의 글에는 우리의 질문이 논리적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인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목차 구분에 따르자면 이렇다. 사랑이 어떻게 성립되는지를 다루는 ‘사랑의 논리’, 우리가 왜 그렇게 병적으로 일그러지는지를 다루는 ‘욕망의 병리’, 그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길인 ‘윤리와 사회’. 우리가 한참 묻던 사랑의 성립과, 욕망과, 윤리에 대해 그는 정확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많은 문학 작품들을 경유해서, 논리적이지만 뾰족하지 않고, 차갑지 않지만 두루뭉술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는 우리를 달랬다. 신형철이 이야기한 게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때 내게는 그 말들만 들렸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었던(혹은 그때 내가 그렇게 이해해버리고 말았던) 사랑과 욕망의 정신분석을 어설프게 간추리자면 이렇다. 관계는 언제나 비대칭적이다. 나는 나에게 없는 것을 그에게서 욕망하고, 그는 그에게 없는 것을 나에게서 욕망한다. 우리는 우리의 결핍을 욕망한다. 그렇게 관계는 성립된다. 주고받음이 확실하다. 관계는 일종의 거래이기도 하다는 것. 그러나 주고받는 마음은 물건이 아니고, 우리의 결핍은 비어 있는 서랍장이 아니다. 퍼즐이 맞는 것처럼 완벽하게 충족되는 관계는 없다. 결핍과 충족을 통해 성립되었던 관계는 변화한다. 그가 모든 것을 채워줄 리 만무하고, 애초에 그 결핍이 무엇인지 되묻게 되는 순간도 온다. 어느 순간 대칭이 맞지 않는다. 때로 사랑은 잴 수 있다. 사랑의 크기는 언제나 비대칭. 그렇게 흔들린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말자. 우리가 잠시라도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 우리가 무언가를 발명할 순간을 찾아보자.

문학에는 하나의 가치를 위해 ‘몰락’하는, 진정으로 삶을 살아내는 자의 ‘윤리’가 있고, 완벽할 수는 없는 관계 속에서 서로의 ‘느낌’을 향해 겨우 가는 ‘공동체’가 있다. 그는 풀리지 않는 것을 왜 풀리지 않는지 정확히 이야기하며, 닫힌 문틈 사이로 보이는 빛을 더듬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신이 없어 답도 없어 보이는 이 세상, 우리가 쪼개진 신이 되자고, 사랑을 발명하자고, 그는 말했다. 그의 인식은 비극의 현실성과 구원의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신형철의 눈매는 언제나 조금씩 쳐져 있고 진중했지만, 결코 완전히 무너질 것 같지는 않은 인상을 띄었다. 그때의 나와 B는 우리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정리해주는 신형철이 좋았다. 나아가 그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되살아나는 문학 작품들에 쉽게 매료됐다.

신형철의 사랑/관계 풀이에 나와 B는 모두 큰 인상을 받았지만, 그다음은 명쾌하지 않았다. 신형철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한 꼭지에서 아마도 이렇게 썼다. ‘없음은 결코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결핍’은 서랍장 같은 것이 아니어서, 채워지고 끝이 아니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결핍을 남모르게 충족해주는 너를 영원히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 그때 나는 감동했지만, B는 어딘지 석연치 않아 했다. 신형철의 말은 그때 뭐라고 해야 할까, 낭만적이고 젊었다.

이후에 나온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부터 그가 조금은 늙었다고 생각했다. 눈매가 조금 더 내려가 보였다. 어쩌면 풀리지 않는 현실을 너무 오래 바라보았기 때문인가 싶었다. 그를 읽으며 나도 함께 나이를 먹어 갔다, 그렇기에 이번에 나온 책 ‘인생의 역사’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변했을까, 또 변해가고 있을까 궁금했다.

이번에 읽은 책에서, 신형철은 예전보다 늙어 있었다. ‘늙음’이라는 말에서 찐득찐득한 주름들을 빼고 남는 어떤 성숙 같은 것이 있었다. 브레히트와 그의 연인의 일화를 다루는 책의 프롤로그에서, 신형철은 여전히 문학 작품의 의미를 능란하지만 자연스럽게 펼쳐 보여 주었다. 브레히트와 그의 연인의 사랑을 말하는 부분에서 그는 여전히 ‘사랑의 비대칭’을 발견해 낸다. 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고, 그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단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결국 자신을 내어주는 이는 언제나 더 사랑하는 이고, 어쩌면 패자다. 예전의 그라면 여기서 관계의 비극성을 끄집어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에 신형철은 길을 튼다. 사실, 그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닮지 않았냐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앞에 서기 위해, 스스로를 다치지 않게 ‘빗방울 까지도 두려워하면서’ 조심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 아니냐고. 사랑은 그저, 사랑하는 대상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는 일이며, 그 조심이 가능하도록 나를 조심하는 일이라는 것. 사랑의 이유를 파헤치던 신형철은 이제 사랑의 태도를 더 많이 말한다. 신형철은 프롤로그의 마지막에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음을 멋진 방식으로 알린다.

B와 내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 우리는 ‘성숙’에 대해서도 오래 이야기했다. 무엇이 과연 성숙인가, 하면서. 아직도 정확히 대답할 수 없지만, 이제 나는 어떤 ‘문제’는 그 답을 찾았기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잊히거나 다른 문제로 대체되어 해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찾아 헤맸던 완전한 답은 없다. 그러나 계속 멈춰 있는 문제도 없다. 문제는 몸을 비틀며 새로워진다. 때로는 한 자리에서서 끝없이 정확해지는 것이 미덕일지라도, 어떤 성숙은 이전의 문제를 지나 새로운 문제를 따라 나아가는 방식으로 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뒤바뀜을 너무 아프지 않게 바라보며 걸어가는 것이, 어쩌면 성숙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역사’가 나온 이후, 신형철 평론가의 출간 기념 강연에 들렀다. 그는 새로 태어난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나는 이제 그의 글이 약간은, 때로는 많이 느끼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만 그의 웃음이 좋았다. 그의 조심스러운 결의가 좋았다. 그는 이제 '인생' 다음에 무엇을 쓸 거냐는 질문에 그냥 웃었다. 아까 정리했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마지막 목차는 이렇다, ‘성장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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