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라오족 마을을 가다
꺼라오족 마을을 가다
  • 장영식
  • 승인 2023.03.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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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뉴스지금여기] 장영식의 포토에세이

[위클리서울=가톨릭뉴스지금여기 장영식] 베트남의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꺼라오족 마을을 가는 길에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시장에 들렀습니다. 베트남 국수와 ‘반미’라고 부르는 바게트 종류의 빵과 베트남 맥주 한 캔을 마셨습니다. 동행하는 이들에게 한국말로 ‘반미’는 ‘양키 고 홈’이라고 말했습니다. 동행하던 이들이 놀라면서도 웃었습니다. 마트를 나오는 길에 햇살 가득 담은 한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눈부신 역광으로 그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나에게 담배를 권했습니다. “노 스모킹”이라고 정중하게 사양했지만. 그는 계속 담배를 권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노 스모킹”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모습은 특이했고, 나는 마을의 건달쯤으로 이해했습니다.

 

꺼라오족 마을을 가는 길은 첩첩산중이었다. 오토바이가 유일한 교통수단일 수밖에 없었다. 사진에서 왼쪽 길이 꺼라오족 마을로 가는 길이다. ⓒ장영식
꺼라오족 마을을 가는 길은 첩첩산중이었다. 오토바이가 유일한 교통수단일 수밖에 없었다. 사진에서 왼쪽 길이 꺼라오족 마을로 가는 길이다. ⓒ장영식

우리는 마트를 떠나 꼬불꼬불 비탈진 산길을 따라 오토바이로 이동했습니다. 베트남 서북부 산악지대가 그렇듯이 자칫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소름 돋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의 풍광이 너무 좋아서 잠시 쉬어 숨을 고르는 사이에 오토바이 한 대가 다가왔습니다. 시장에서 봤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가슴을 “툭” 치며 반갑게 대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호 아저씨’도 애연가였습니다. 그는 담배 대신 사탕수수를 권했습니다. 그가 건넨 사탕수수는 나그네의 갈증을 축이는 데 아쉬움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또 한 남자가 왔습니다. 그들은 언어를 짧게 사용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이방인을 따뜻하게 반겨 주는 듯했습니다. 뒤에 온 남자는 나와 함께 걷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안내를 맡은 이의 눈치를 봤습니다. “같이 걸어가도 될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시간 관계로 오토바이를 타라고 권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들과 헤어졌습니다.

 

마트에서 만났던 한 남자는 끝까지 우리를 따라왔다. 나중에서야 그가 꺼라오족 사람인 것을 알고 웃었다. 용모는 투박했지만, 따뜻하고 친절했다. ⓒ장영식
마트에서 만났던 한 남자는 끝까지 우리를 따라왔다. 나중에서야 그가 꺼라오족 사람인 것을 알고 웃었다. 용모는 투박했지만, 따뜻하고 친절했다. ⓒ장영식

꺼라오족이 살고 있는 마을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습니다. 비탈진 길을 따라 내려가니 마을이 보였습니다. 전기도 없고, 와이 파이도 되지 않는 외진 곳이었습니다. 잠시 있으니 아까 만났던 두 남자가 왔습니다. 그들도 다름 아닌 꺼라오족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친절하게 마을을 안내했습니다. 담배를 권했던 사내는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따뜻한 차를 권했습니다. 식탁도 없는 마당 같은 컴컴한 거실에서 작은 의자 하나에 앉아 권하는 따뜻한 차를 마셨습니다. 그의 아내는 어두운 곳에서 옥수수를 털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쌀농사가 불가능한 험한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옥수수는 가장 중요한 식품이었습니다.

 

꺼라오족 마을은 비탈진 산악 지형에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옥수수와 채소가 주요 작물이었지만, 그 수확량은 많지 않아 보였다. ⓒ장영식
꺼라오족 마을은 비탈진 산악 지형에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옥수수와 채소가 주요 작물이었지만, 그 수확량은 많지 않아 보였다. ⓒ장영식
전기도 없는 컴컴한 곳에서 옥수수를 털고 있는 모습. ⓒ장영식
전기도 없는 컴컴한 곳에서 옥수수를 털고 있는 모습. ⓒ장영식

낯선 이방인이 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구경 삼아 모였습니다. 한 할머니는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꺼라오족 고유 옷을 곱게 차려입고 나왔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할머니를 촬영하는 중에 다른 세 분도 전통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전통 옷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명절이나 의미 있는 날에만 입었습니다. 낯선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옷을 곱게 차려입고 사진 촬영을 허락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웠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들이 모시는 제당을 안내했습니다. 절벽 같은 돌산에 모신 제당은 물소의 머리뼈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며, 마치 이방인인 우리가 마을을 방문한 것을 조상님들에게 고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이번 여행의 안전을 위해 향을 피우고 절을 했습니다. 그는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무덤을 가리켰습니다. 무덤 앞에는 술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술을 권했습니다. 아버지는 1947년 출생이었고, 2009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무덤과 마주 보는 먼 산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엇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저 산 너머 계신다는 것일까요.

 

꺼라오족 전통 복장을 하고 나온 사람들. 웃음기 없는 얼굴이 너무 딱딱해서 촬영 중에 미소를 담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색하기만 했다. 아무도 권하지 않았지만, 촬영을 위해 그들의 고유 복장을 입고 나왔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장영식
꺼라오족 전통 복장을 하고 나온 사람들. 웃음기 없는 얼굴이 너무 딱딱해서 촬영 중에 미소를 담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색하기만 했다. 아무도 권하지 않았지만, 촬영을 위해 그들의 고유 복장을 입고 나왔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장영식

우리는 따뜻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옥수수로 담은 술을 권하셨습니다. 나는 한 잔을 마셨습니다. 독했지만, 맑고 향기로운 술은 달콤한 맛까지 있었습니다. 동행했던 이는 “해피 워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웃었습니다. 베트남 서북부 소수민족 중에서도 가장 가난했던 꺼라오족 마을을 나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와 동행했던 한 사진가에게 “이 마을에 물탱크를 놓아 주면 좋겠다”라고 제안했고, 그도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많은 것이 필요했던 가난한 마을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원활한 식수 공급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가난은 사랑과 연대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문제는 관심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우선적 선택을 하지 않기 때문에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신앙처럼 추앙하고 있는 호치민은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라고 말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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