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를 즐기는 방법
찰나를 즐기는 방법
  • 김일경 기자
  • 승인 2023.04.20 09: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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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새벽의 찬 기운이 아직은 낮게 깔린 이른 아침이었다. 게다가 한가롭고 평온한 일요일이었다. 출근하는 사람도 없고 학교 갈 사람도 없으니 그야말로 해가 중천에 도착할 때쯤이나 일어나도 된다. 누룽지를 한소끔 끓여서 멸치 볶음과 함께 늦은 아점을 먹고 잠시 멍을 때릴 것이다. 밀려 있는 빨래들은 세탁기를 두어 번 돌리면 될 것이고 새내기 MT를 떠난 아들이 돌아 올 때를 기다리며 간단한 청소를 하고 저녁을 준비하면 그럭저럭 보람찬 일요일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 하루를 위해서 치열한 평일을 보내지 않았던가. 매일매일 짜인 일정들을 소화해 내며 버티어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평소의 기상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몸뚱이는 여느 아침과 다름없는 시간에 내 의식의 상태를 명료하게 데려다 놓았다. 어제 MT를 떠난 아들이 첫 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다는 문자도 함께였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위클리서울/ 김일경

아들은 작년 한 해 재수를 해서 새내기 대학생이 되었다. 기숙학원에 꼼짝없이 갇혀서 공부만 해야 했던 시절을 마치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입학하기 전까지는 놈팡이처럼 먹고 자고 놀고를 반복했다. 하루에도 몇 번 씩 학교 홈페이지를 기웃거리며 본인이 이루어 낸 성과에 한껏 흥분하여 들떠 있었다. 입학식이 얼마 남지 않자 미용실에 가서 펌을 하고 옷을 사러 쇼핑도 하는 등 겨우내 동면에서 깨어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모나 패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놈이 내 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알아서 머리 펌을 하고 입학식에 입고 갈 옷을 고민했다.

이러한 아들의 행동이 가소로웠던지 먼저 대학생이 된 딸아이는 새내기가 갖추어야 할 나름의 덕목과 자세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 동갑내기 선배를 대하는 방법이나 술을 먹되 절대 꽐라가 되어서는 안 되며 고등학생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채 교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르면 안 된다는 등의 꿀팁을 전수받은 아들은 여느 때 보다 진지했다. 입학식에 입고 가겠다며 긴 코트를 꺼내 들자 딸아이는 꾸안꾸(꾸미지 않은 듯 꾸밈)를 강조하며 새내기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새내기다운 패션을 강조했다. 도대체 어떻게 입어야 새내기답지 않은 새내기일 수 있을까.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술이라면 그저 좋다고 덤비는 나와는 다르게 적당한 선에서 잔을 내려놓을 수 있는 강단을 알려 줄 때는 나도 그 옆에서 귀를 쫑긋하게 되었다. 내가 비록 술에는 자주 지지만 아이들을 잘 키운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 둘을 가만히 바라보니 웃음이 나왔다. 각자의 나이에 맞는 충실한 삶을 살고 즐기는 아이들이 내가 낳은 자식인데도 내심 부러웠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경험해 보지 못한 그들의 나이였다. 20대 초반 갓 대학을 입학한 새내기만이 즐길 수 있는 느낌과 감정들을 난 알지 못한다. 그 때의 나는 살기 바빠서 돈을 벌어야 했고 뒤늦게 찾아 온 사춘기를 견뎌야 했다.

성적도 나빴고 형편도 어려웠으니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학업에 대한 미련은 끝내 버리지 못해서 한참이나 지난 나이에 방통대에 들어갔지만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느라 새내기인지 헌내기인지 구별할 수 없는 대학생활이었다. 일반 대학과는 달리 미디어로만 강의를 수강하는 시스템이라 솔직히 대학생활에 대한 설렘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니 입학식 패션을 신경 쓰는 아들이나 적당한 새내기스러움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딸아이가 나는 마냥 부럽기만 하다.

새내기스럽지 않은 패션으로 무사히 입학식을 치른 아들은 동아리를 가입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학식을 먹으며 대학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어느 날은 과에서 새내기를 위한 환영회를 했다며 얼큰한 얼굴로 들어오더니 또 어느 날은 동아리에서 회식을 했다며 얼큰한 얼굴로 희죽희죽 웃으며 들어 왔다. 대학생 회식이 남편 회사의 회식보다 더 잦다.

얼큰한 얼굴로 들어 온 날은 회식하며 있었던 온갖 에피소드들을 신나게 늘어놓아 주었다. 자기소개는 어떻게 했으며 안주로 먹은 음식의 종류는 무엇이고 간혹 꽐라가 되어서 업혀 나가는 학우가 있었지만 자기는 멀쩡했다며 뿌듯해 한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새내기의 대학생활을 간접 체험하는 기분이 들면서 그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인생에 두 번은 찾아오기 힘든 찰나의 아름다운 새내기 순간들을 열심히 즐기고 있구나 싶은 생각에 진심 부러웠다.

어제 과 MT를 떠난 아들은 아침 첫차를 타고 왔다. 얼큰함에서 다소 톤이 다운 된 채 시큰한 냄새와 함께 현관문을 들어섰다. 밤을 꼬박 새웠다는 말에 매우 바람직한 MT였다고 칭찬해 주었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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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입학한 방통대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동아리 MT를 간 적이 있었다. 단소를 부는 동아리였는데 딱 봐도 느낌이 오지 않는가. 막걸리와 김치만 있으면 되었다. 숙소 앞 강가에 둘러 앉아 중무림(단소의 율명)을 외치며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단소 한 곡조를 뽑아내면 그곳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가 되었다. 게다가 선배들의 대금 소리는 강가의 서늘함을 잠재우고 어느새 여명을 틔웠으니 술과 함께 한 희뿌연 새벽은 MT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느지막이 일어나 따끈한 누룽지로 아점을 하려던 나의 계획은 틀어졌다. 콩나물을 씻고 고춧가루를 풀어 얼큰한 해장국을 끓였더니 아들은 해장국에 코를 박으며 한껏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아직도 MT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하다. 나와는 또 다른 세대여서 대부분이 다음 날 첫차로 귀가를 한단다. 나 때만 해도 밤새 술을 푸고 꾀죄죄한 몰골이 되어 아침을 준비하고 그것도 모자라 학교에 복귀를 하고도 뒷풀이까지 했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달라진 풍경인 듯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봄꽃들이 모두 져버렸다. 올해는 친구들과 반드시 꽃구경을 가자고 다짐했는데 또 놓쳐버렸다. 아직은 가족들 뒷바라지와 생업에 더 집중을 해야 하는 때인가 보다. 올해는 유독 봄꽃들이 일찍 개화하고 낙화를 하였다. 꽃들이 피어있는 시기는 정말 찰나인 것 같다. 꽃잎이 낙화한 자리에 푸릇한 잎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말이다. 마치 순식간에 지나간 나의 첫 MT처럼, 반추할 시간도 없이 흘러가버린 나의 청춘이 그러하다.

해장국에서 잠시 코를 건진 아들은 동아리 MT가 다음 달에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풋풋한 청년들의 찰나와 같은 봄날은 한동안 계속 될 것이다.

인생의 봄날은 화려한 만큼 짧고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래서 더욱 그립고 아쉬운 시간들로 가득하다. 되돌아보는 나의 20대 청춘은 지금 우리 아이들만큼이나 화려하지도 않았고 즐겁지도 못했지만 그래서 아픈 기억들로 점철된 어두운 시간들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가 그립고 아련하다. 어둡고 침침했지만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고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 두 대학생은 중간고사를 앞두고 열공모드에 진입하였다, 자신들의 본분에 충실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에 진심을 다하는 열혈 청년들이다. 시험이 끝나면 아마도 회식은 다시 시작될 것 같다. 무엇을 하든 20대의 봄날은 찰나처럼 휘리릭 지나갈 것이니 매순간 최선을 다하며 후회없이 살기 바란다. 그것이 쏜살같이 지나갈 찰나를 즐기는 방법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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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ru 2023-04-20 15:36:18
대성리는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MT의 성지인가봅니다.
글을 읽다보니 저도 젊은 시절의 설레임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미소를 짓게 되네요. 두 젊은이의 빛나는 청춘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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