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도덕성’ 치명타

[위클리서울=이주리 기자] ‘공정성’이 생명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직격탄으로 휘청하고 있다. 자녀 특혜 채용 의혹이 불거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고위 간부들이 전격 사퇴한 것이다. 선거의 공정한 관리를 하는 독립기구로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가운데 정치권에선 이번 의혹에 대해 제3기관에 의한 검증과 외부 견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최근 보도자료를 통해 "자녀 특혜 의혹의 대상이 된 박찬진 사무총장과 송봉섭 사무차장은 현 사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중선관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힌 이번 사태가 어떤 파장을 남길지 전망해 봤다.

 

ⓒ위클리서울/ 선관위 홈페이지, 디자인=이주리 기자

중선관위의 공정성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다.

박 사무총장의 딸은 광주 남구청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선관위에 채용됐고, 송 사무차장의 딸도 충남 보령시에서 일하다 지난 2018년 선관위에 채용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자녀 특혜 채용 논란이 제기된 이유다.

이에 앞서 김세환 전 사무총장도 강화군청에서 일하던 아들이 2020년 선관위로 이직한 뒤 반년 만에 7급으로 승진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여기에 제주 선관위 상임위원의 아들, 세종 선관위 상임위원의 딸, 경남 선관위 총무과장의 딸의 채용 사실이 드러나면서 선관위 간부 자녀의 경력 채용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특히 특혜채용 의혹이 불거진 김 전 사무총장과 박 사무총장, 송 사무차장, 제주 선관위 상임위원 등 4명은 채용 당시 공무원의 4촌 이내 친족이 직무 관련자인 경우 기관장에게 신고해야 한다는 '사적이해관계 신고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연일 드러나는 중앙선관위원회의 자녀 특혜채용 의혹은 고용세습을 넘어 2023년에 등장한 '선관위판 음서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선관위판 음서제”

선거의 공정한 관리를 위한 헌법상 독립기구인 선관위는 다른 공적 조직보다 구성원들의 공정성과 윤리의식이 더욱 요구된다는 점에서 이번 자녀 특혜 채용 논란이 더욱 문제가 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약 10개월 앞두고 공정성 논란에 휩싸인 선관위가 총선을 제대로 치를 수 있겠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이 사태가 처음 불거졌을 때 노태악 선관위원장이 기관장으로서의 조치를 취했어야 마땅하다"며 "그런데 어디에 숨어있는지 일언반구없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노 위원장이 사퇴해야 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우선 선관위의 '셀프감사' 대신 제3기관에 의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선관위는 외부인사가 포함된 특별감사를 통해 선관위 자녀의 재직 현황을 조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의 자체 조사로는 의혹을 벗기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사무처 직원들이 행정을 독점하는 구조적 문제도 지적된다. 선관위의 수장인 중앙선관위원장은 관례상 9명의 중앙선관위원 중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선관위원이 맡는데, 법적으로 비상임이며 대법관도 겸한다. 이 때문에 선관위원장이 내부 일을 속속들이 알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한편에선 감사원 등 외부 견제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권 관계자는 “다른 정부기관과 달리 독립기관이고, 정치권 선거를 담당하며 파워가 커지면서 권력기관으로 군림해 온 상황에서 기강이 무너진 것"이라며 "앞으로는 감사원을 통한 강력한 통제가 이뤄져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선관위는 이에 대해 "국민께 큰 실망과 걱정을 끼쳐드린 점에 대해 책임을 깊이 통감한다"며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박 사무총장 등의 자진사퇴에 대해 "선관위는 어느 국가기관보다도 공정성과 투명성이 높아져야하는 기관"이라며 "앞으로 업무 처리 과정에 있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선관위 고위직들의 이른바 ‘고용 세습’은 선관위가 ‘헌법상 독립 기구’임을 내세워 감사 등의 견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선관위의 조직과 권한이 실력 이상으로 비대해지면서 사실상 ‘그들만의 세상’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선관위는 1963년 창설할 때만 해도 직원이 348명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 17시도와 249시군구에 모두 사무실을 두고 직원을 총 2961명 거느린 매머드 조직으로 변했다. 행안부와 경찰 등을 제외하고 전국 풀뿌리까지 조직을 갖춘 행정 조직은 거의 없다.

선거가 있는 해에는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 공관 수십 곳으로 1년씩 파견관이 나가 선거 관리까지 한다. 여기에 각종 공공 기관이나 조합·단체 대표 선거도 선관위가 관리하게 되면서, 선출직 기관치고 선관위 입김을 안 받는 곳이 없다는 평가다.
 

‘독립성’ 방패 논란

정치권조차 그동안 ‘선관위 눈치’ 보기에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지역 정치 행사에 선관위 직원들이 참석하기 때문이다. 정치권 인사는 ”선거법을 항상 의식하지만, 생각지 못한 법 위반의 경계에 서는 발언을 할 수도 있다”며 “이때는 현장 선관위 직원들이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사실상 생사를 좌우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 초선 의원들이 국회에 들어오자마자 선배들에게 처음 듣는 조언이 “선관위 직원들을 적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이라고 한다.

선관위의 선거 범죄 조사권은 사실상 검찰·경찰의 수사권보다 세다는 평가다. 범죄 혐의가 있다고 생각될 경우 선관위든 수사기관이든 사람을 데려오거나 장소를 수색하고 물건을 압수할 수 있다.

수사기관은 사전·사후에 관련 영장을 청구해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선관위에는 그런 제한이 없다. 계좌를 추적해 자금 흐름을 보려고 할 때도 선관위는 금융기관의 장에게 ‘요구’만 하면 된다. 2016년 국민의당에 치명타를 안긴 리베이트 의혹도 선관위 고발에서 시작됐다. 2019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선관위는 아무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도 선관위는 그동안 각종 논란 때마다 “헌법상 독립 기관인 만큼 자체적으로 해결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선관위는 작년 대선에서 투표용지를 소쿠리 등에 담아 운반하는 관리 부실 논란이 벌어졌을 때도 감사원 감사를 거부했다. 당시 선관위는 “헌법상 독립 기구인 선관위는 감사원의 직무 감찰 대상이 아니다”라고 이유를 들었다.

이번 고용 세습 논란도 마찬가지다. 국회 행안위 관계자는 “선관위는 워낙 정보가 제한적이어서 내부 사정도 알기 쉽지 않다”며 “최근 자녀 채용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시도 선관위 결재로 끝났다고 했다가, 사무차장 결재까지 난 것으로 뒤늦게 드러나서 문제가 된 것”이라고 했다.

대법관이 선관위원장을 돌아가면서 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선관위가 ‘헌법상 독립 기구’라지만 사실상 사법부에 종속되는 구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대법관이 상징적 역할을 하면서 선관위 직원들은 더더욱 스크럼을 짜고 통제받지 않는 조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선관위의 정치적 독립성도 의심받고 있다. 이번에 퇴임한 박찬진 사무총장은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거의 매년 승진해 3급에서 장관급까지 올라가는 데 약 5년이 걸렸다.

이 때문에 선관위의 권한과 업무 범위, 위원회 구성 방식 등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정치적 색깔을 가진 인사들이 선관위원이 되지 않도록 하고, 선관위 내부 조직도 서로 견제가 가능하게끔 개편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선관위는 입장문에서 "최근 드러난 미흡한 정보보안 관리 및 고위직 간부들의 자녀 채용 특혜 의혹 등으로 국민께 큰 실망과 걱정을 끼쳐 드린 점에 대해 그 책임을 깊이 통감하며, 앞으로도 계속해 진상 규명 및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선관위는 "이에 따라 자녀 특혜 의혹의 대상이 돼 온 박 사무총장과 송 사무차장은 사무처의 수장으로서 그동안 제기돼 온 국민적 비판과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고 현재 진행 중인 특별감사 결과에 상관없이 현 사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선관위는 또 "사무총장·차장의 사퇴와 상관없이 현재 진행 중인 특별감사 및 자체 전수조사를 통해 전·현직 공무원의 자녀 채용 관련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징계 또는 수사 요청 등 합당한 모든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 "그와 동시에 이미 합의한 선관위 정보보안체계에 대한 국가정보원,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등 외부기관과 합동 보안컨설팅 절차도 신속하고 차질없이 진행하기로 했다"는게 선관위의 입장 표명이다.

선관위는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후속 사무총장·차장 후임자를 인선해 조속히 조직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공정하고 중립적인 선거관리라는 헌법적 책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능력과 도덕성을 갖출 수 있는 헌법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개혁 조치들을 지속적으로 단행함으로써 내년 실시하는 제22대 국회의원선거를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재 구조에서 선관위가 자체적으로 개혁을 단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장 내년 총선에 대한 공정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의 중립성을 공정성을 책임지고 있는 선관위가 현재의 파고를 넘어 개혁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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