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병에 적힌 그 마을을 찾아서
수병에 적힌 그 마을을 찾아서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3.07.25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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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카즈베기2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2층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남자들

방에서 쉬다가 밖으로 나가려 걸을 때마다 바닥의 나무가 약간씩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페인트칠이 약간 벗겨진 창틀 사이로 빛이 있었고, 그 너머를 보면 초록색 산 풍경이 보였다. 작은 풀들이 길가 옆으로 나 있는 흙 오솔길, 언덕이 많지만 트여 있는 마을, 그 너머에는 더 거대한 산, 또 더 거대한 산, 그리고 끝에 보이는 만년설. 우리가 잡은 카즈베기의 숙소는 정말 헐렁하고 편했다. 사람도 별로 없었고, 별다른 서비스도 없었고, 그저 누군가 잠깐 쉬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나무 집 같았다. 유명한 관광지이니 좋은 숙소도 있었겠지만, 돈이야 그렇다치고 이런 곳이 더 편했다. 지금도 조지아를 생각하면 몇몇 숙소들의 나무 삐걱거리는 소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너머로 비치는 햇빛이.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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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고 있던 방에는 2층 침대가 세네 개 있었는데, 진과 나는 각각 1층을 썼다. 다른 침대 2층에는 혼자 여행하고 있는 모양인 사람 둘이 각자 차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둘 다 2층에서 내려오지 않아서 얼굴도 모르고 지냈다. 카즈베기 산골에 틀어박혀서 이 좋은 자연은 내버려두고 침대에 틀어박힌 사연이 궁금했다. 둘 다 무언가 열중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는데, 갑자기 밖을 걷다가 진이 그중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창 쪽 2층에 있는 사람은 한국인이라는 것. 살짝 비치는 얼굴이나 실루엣으로 동양인인 것은 알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한국인인지 알았나 싶었는데, 예전에 혼자 여행할 때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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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였나, 인도에서였나, 혼자 이런 게스트하우스를 돌아다니며 여행하고 있는데 그는 지금처럼 2층 침대 위층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하여 진이 말을 걸었더니 말을 시키지 말라며 짜증을 냈다고도 했다. 사람과 전혀 교류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고 진은 말했다. 종종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여행자야 있으니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진은 그때 그 사람이 풍기는 어떤 적의와 완고한 폐쇄성을 기억했고, 순간적으로 그의 눈빛과 가방을 기억했다.

그리고 우연히도 카즈베기의 산골에서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2층 침대의 위층에서 위층으로 이동하며 그는 무엇에 열중하고 있었을까? 무언가 영영 잊고 싶은 것이 있어 어딘가로 계속 떠나는 것일까? 혹은 그저 사람이 귀찮은 여행자일 뿐이었을까. 나는 그의 사연을 홀로 생각해 보았는데 당연히 답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떠날 때까지 그는 계속 2층 침대의 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어떤 여행의 시간은 저렇게 묵묵할 수도 있다는 걸 새삼 생각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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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내려오지 않는 한 명은 체코 아저씨였다. 그는 종종 1층으로 내려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무척 지적인 느낌을 풍겼지만 약간은 지쳐보이는 그가 침대에 누워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게 국적을 묻더니 한국 드라마를 아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죠, 저는 한국인인데요. 체코에서 역사 선생님을 하고 있다는 그 아저씨는 눈을 반짝거렸다. 사실 그는 여행을 떠나와 2층 침대에 누워 한국 드라마를 챙겨보고 있을 만큼 엄청난 한국 드라마 팬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게 재밌는 한국 드라마를 추천해달라고 이야기했다. 그에게 새로운 발견을 선사하고 싶어 머리를 굴리며 재밌게 본 드라마를 이야기했지만, 그는 이미 그 드라마를 거의 다 본 상태였다. ‘비밀의 숲’이라든지, ‘미스터 선샤인’이라든지··· 그는 모조리 섭렵했던 것이다. 카즈베기 산골에서 준 명예 한국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왜 한국 드라마를 그렇게 좋아하냐는 물음에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감정이 직접적이어서 좋다고 했던가, 그는 내게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자 다시 드라마를 보러 2층 침대로 올라갔다. 그가 보고 있던 드라마는, 나도 처음 보는 드라마였다. 콘텐츠의 힘은 대단하다···.

 

생수의 마을, 조각하는 남자

날이 좋으니 어디로든 나가 걷고 싶었는데 마땅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각종 트레킹 코스가 많은 곳이었는데도 체력과 돈을 셈해보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진은 아마 트레킹을 하고 싶었을 텐데, 나를 따라 그냥 이곳저곳을 걸어보기로 했다. 우리는 정말 그냥 앞으로 계속 걸었고, 걷다가 케밥을 샀고, 케밥이 없었으면 도대체 여행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하면서 유럽이나 아시아를 여행하며 먹었던 수많은 케밥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러다가 목이 말라 생수 한 병을 샀다. 생수병에는 ‘스노’라고 적혀 있었다. 생수의 브랜드 이름인 줄 알았던 그 이름은, 사실 ‘스노’라는 마을 이름이었다. 진과 함께 걸으며 생각나는 대로 아무 이야기를 하다가, 만약 어느 나라로 여행을 가서 그 나라의 진짜 자연을 보고 싶다면, 아무 생수병이나 산 다음에 거기 쓰여 있는 ‘수원지’로 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를 태면 한국에 여행 온 외국인이라면 삼다수를 산 이후에 제주도 깊은 산골로 향하면 되는 것이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유튜브 콘텐츠가 될 법한 생각인 것 같지만, 그때 우리는 엄청난 발견을 했다고 느껴져서 서로의 말에 웃었다. 그리고 들고 있는 생수병의 이름을 보았고, 수원지를 찾았고, 수원지를 검색해 보았더니, 걸어서 몇 시간 안 걸리는 곳에 수원지가 있었다. 생수병의 이름과 같은 ‘스노’였다. 진과 나는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스노 마을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단순한 길을 계속 걸었다. 양 옆으로 풀밭이, 들판이, 그 너머로는 가파른 산이 동산처럼 절벽처럼 펼쳐지는 길을 걸었다. 2차선 차도가 산과 산 사이를 가르는 아름다운 들판을 우리는 계속 걸었다. 꽃밭 속에 파묻힌 아름다운 집을 보며, 저곳에서 살아가는 누군가의 평생을 떠올리기도 했다. 아름답고 벌레가 많이 나올 그 집에는 누가 오래 살았을까 싶어하며.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스노로 향하는 길 구석에서 거의 사람 몸만한 사람 얼굴 조각성 여러 개가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적, 혹은 성경의 인물들일까 싶은 얼굴 조각들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고 그 가운데에는 간이로 세워 놓은 작업실 같은 것이 있었다. 뒤로는 산이 보이는 아름다운 풀과 꽃의 밭에서 멀뚱히 서 있는 10개 남짓의 조각상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신성해 보였다. 얼굴들 근처로 다가가자 인상 좋은 백발의 노인이 다가왔다. 그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우리를 환대하는 눈치였다.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하며 안 사실은, 그는 한때 트빌리시에서 일했지만 다리를 다친 이후로(그는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이곳에 머물며 조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눈은 차분하게 내려 앉아 있었고, 부드럽고 행복해 보였다. 이곳에서 스스로를 오래 치유해 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조각상의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언어의 한계로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우리에게 작업실을 보여주었으며 우리와 함게 그 앞에 걸터 앉아 잠시 바람 부는 들판의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우리가 스노 마을에 대해 말하자, 마을은 근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부드럽게 내저었다. 이 얼굴로 충분하다, 마을에 다다르지 않아도 더 걸을 이유는 없다, 우리는 몇 시간을 걸어온 길의 끝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조용한 미소로 만족했다. 그리고 왜인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드러운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카즈베기로 돌아왔고, 그때 찍은 할아버지의 사진은 여전히 내 방 한구석에 붙어 있다. 그날의 바람이 그 사진에서 불어온다는 귀한 착각을 남겨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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