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 1학년 때부터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그렇게 바빴던 것도 아닌데 시간은 훌쩍 흘러 벌써 3학년도 2학기를 맞이하고 있다. 작년 이맘때도, 재작년 이맘때도, `아 그 때 배웠으면 지금쯤 어느 정도는 연주할 수 있었을 텐데`하며 후회만 되풀이 했었다. 악기하나 배울 여유가 없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평상시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도 아니거니와 친구와 별 할 말도 없이 만나 그저 수다나 떨고 심지어는 혼자서 멍 때리며 웹서핑으로 시간을 때우기도 하는, 그야말로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다. 그런

물고기. 최소한으로 절제되어 있는 신체로 매끄럽게 움직인다. 인간이 자랑하는 섬세한 다섯 개의 손가락 따위가 없어도 전혀 결핍이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다. 넓은 바다에서는 그 이점을 톡톡히 보았을 방추형의 몸체 덕에 지느러미, 꼬리짓 몇 번에 저어만치 나아간다.그러나 좁은 수족관 안에서 그 특기는 되레 한계를 실감하게 할 뿐이다. 벽에 가로 막히어 몸을 튼 지 얼마 안 되어 물고기는 다시 벽을 만난다. 그네들의 약간은 풀이 죽은 색깔이며 반짝임, 움직임, 또 수족관 바닥에 눈처럼 쌓인 비늘 조각들을 조금 구경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날씨가 아직까지도 덥다. 방학도 끝이 났는데도 이렇게 더우면 학교 다니기가 왠지 억울한 느낌이다. 시원한 음료수나 아이스크림으로 마지막까지 밍기적거리고 있는 여름을 버텨낸다. 선풍기도, 에어컨도, 냉장고도 없었던 옛날에는 대체 여름을 어찌 보냈을까 생각만으로도 덥다. 과거에는 ‘석빙고’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의 ‘냉장고’와 같은 개념이다. 겨울철에 강가에 얼어있는 얼음을 가져다가 돌로 만든 지하창고에 저장해 여름철에 그 얼음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나마도 귀한 것이라 아무나 그 얼음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냉장고 문

내가 언어 과외를 맡고 있는 아이는 지금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앞둔 대한민국의 슬픈 수험생이다. 스스로 성적을 올려야겠단 열의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아 아이를 앞에 두고 잔소리를 했다. 지금 다른 친구들이 달려가고 있는데 넌 걸을 생각은커녕 일어나 앉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내가 널 물가에 데려다 준대도 물을 마시는 건 너다. 내 다그침에 늘 느긋하게 싱글싱글이던 녀석의 눈가에 금방 물기가 핑 돈다. 당황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사실 아직 1절도 채 못했는데. 중간 평가에서의 부진한 성적이나,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복습하지 않

너무 더운 날이다. 껴안은 책의 무게가 영 짜증스럽다. 집을 나선 김에 겸사겸사 도서관도 들릴 생각으로 반납할 책을 가지고 나온 것 까진 좋았는데, 지옥 같은 더위에 무거운 책 몇 권까지 짊어지고 오려니 책커버에 땀이 옮을 정도다. 이글이글한 태양에 달궈진 까만 아스팔트. 이렇게 더워서야 머리위에 떠 있는 태양이나 딛고 선 땅이나 다를 것이 뭔가 말이다. 은행이 4시 반에 문을 닫지만 않았다면, 태양이 작열하는 이 시간에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괴로워 할 일은 없었을 텐데.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겹다. 신발 밑창이 피자치즈마냥 녹아

도서관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다. 한껏 잡아당긴 고무줄마냥 팽팽하게 긴장감이 서려있는 얼굴. 그리고 휴양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여유로운 얼굴. 준비하는 시험이 코앞이든, 혹은 그저 순수한 학구열에 불타오른 것이든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하기위해 도서관을 찾는다. 조용하고 쾌적한 도서관이야 말로 공부하기에 최적인 공간이니까. 그리고 그들만큼이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휴식을 위해서 도서관을 찾는다. 근육들을 한껏 이완시키고, 편안하게 걸터앉아 책을 읽는 여유를 갖는다. 에어컨도 빵빵하겠다, 조용하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만의

내가 조그만 했을 때, 귀엽게도 나는 시 쓰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엄마가 사준 작은 노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혼자서 이런저런 동시들을 써놓고 흡족해하곤 했었던 것 같다. 내 유일한 독자이자 팬이었던 부모님의 찬사에, 난 내가 매우 글을 잘 쓰는 사람인줄 알았다. 물론 부모님의 찬사가 꾸며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께서도 내 딸이 천재가 아닐까 하는, 왜 부모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고슴도치병을 앓고 계셨던 것 같다. 부모님의 칭찬에는 진심과 약간의 호들갑이 담겨 있어 어린 나는 진지하게 시인이 될 것을 고려해보았었다. 그렇지만 당

키. 대한민국에서, 아니 비단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키는 꽤나 민감한 문제다. 얼마 전 모 TV 프로그램에서 한 여대생이 180cm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고 언급했다가 큰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었을 만큼 사람들은 키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여자보다 남자의 경우가 훨씬 심하다. 내 남동생은 어릴 때부터 항상 반에서 키 작은 걸로 꼽으면 1~3등 사이에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보다 한 두 살은 어려보일 정도로 성장이 더딘 편이었다. 애가 워낙 입도 짧고 말라서 엄마의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같은 반 아이들이 내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햇빛이 짜증스럽게 정수리에 따라 붙었다. 어느덧 땀이 나 이마에 앞머리가 들러붙는 느낌이 들었다. 끔찍하게도 바람조차 없었다. 손바닥으로 만든 조그만 그림자에 얼굴을 밀어 넣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연스럽게 미간에 빗금이 생긴다. 지나는 사람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빨리 에어컨 빵빵한 실내로 들어가는 것만 생각하며 초조하게 신호등의 녹색불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워 죽겠는데, 원래 이렇게 빨간불이 길던가. 크게 효용도 없을 게 분명한 손부채질만 연신 해댔다. 횡단보도 앞에는, 어느덧 나와 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암기과목에 특히 약했다. 맥락 없이 암기만 하는 것은 내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내게 사회 과목은 특히 큰 골칫거리였다. 다른 친구들을 보면 그냥 통째로 외워버리던데, 난 그럴 수가 없으니 하나하나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암기가 되곤 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였나, 사회시험 범위가 세계사였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 때 같이 앉았던 짝과 얼마나 쿵짝이 잘 맞는지, 그 학기의 수업시간은 내내 수업은 뒷전이고 둘이서 소곤소곤 떠들어댔었다. 유난히 자

새벽 두시 반. 내일 오전 수업이 걱정되지만 잠자리에 들 순 없다. 당장 내일인 프리젠테이션 준비가 완벽하게 안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수님께 따로 제출할 핸드아웃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자료 조사를 맡은 조원들의 업데이트가 예정보다 늦어졌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원들이 올린 자료를 종합해 프레젠테이션 시청각 자료 제작을 맡은 나로서는 그들이 맡은 바를 지연함으로 인해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설상가상 내 작업이 끝나는 대로 핸드아웃을 정리하고,

6월 12일, 대한민국과 그리스의 월드컵 첫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2:0의 통쾌한 승리에 대한민국은 다시금 2002년으로 돌아간 듯 축제의 분위기였고, 그 들뜬 분위기 속에서 나만 괜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왜 월드컵이 지금이란 말인가. 당장 다음 주부터 시험이 시작이라, 방에 콕 박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좋은 날 시험공부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도 서러운데, 친구놈은 계속 유혹의 문자를 보내왔다. 뭔 공부냐, 나와라, 놀자…. 텔레비전 속의 상기된 붉은악마들이 마냥 부러운 나였지만, 방

한동안 연애의 달콤함을 만끽하느라 얼굴 보기 힘들었던 친구 녀석이 ‘커플지옥 솔로천국’을 외치며 다시 날 찾기 시작했다. 꽤나 힘들어 하는 모습에 맘이 편치 않아 밤새 같이 술잔도 기울이고, 난 잘 알지도 못하는 전 남친 험담도 열심히 경청해주고, 내용이라곤 하나도 없는 문자에도 열심히 답장해 줬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어느덧 이 친구가 솔로로 복귀한지도 한 달이 되어간다. 같은 처지인 내게 외롭다고 찡얼거리는 것도, 심심하다고 내용 없는 문자 보내는 것도, 하다못해 가끔 술 마시자고 쳐들어오는 것도 참을 수 있겠는데,

하이에나 새끼는 자신의 형제를 물어 죽인다. 브라운관 안에서 철저하게 건조한 내레이션과 함께 형제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어린 하이에나의 송곳니가 클로즈업된다. 마침내 붉은 선혈과 함께 늘어진 새끼 하이에나의 시선 앞에 어미 하이에나의 얼굴이 와 닿는다. 인간의 시선으로 하이에나의 생태를 바라보는 것은 우습지만, 어미 하이에나의 표정이 지나치게 냉랭하여 과연 저것이 자신의 자식의 죽음을 바라보는 모정의 표정이 맞는 건가 미간이 찌푸려진다. 기존에도 그다지 좋지 못했던 하이에나의 이미지가 더욱 부정적으로 고착되는 순간이다. 자신의 핏줄의

공강 시간, 집에서 점심을 먹고 시간이 좀 남아 컴퓨터를 켰다. 메신저의 로그인 버튼을 클릭하고, 채 화면이 전환되기도 전에 메시지가 도착하는 알림음이 띠롱띠롱 울렸다. 누군지 몰라도 성격 참 급하시군. 로딩이 끝나기 전까진 확인 할 수도 없는 그 메시지들 때문에 로딩시간만 더 길어지고 있었다. 더딘 로딩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들이 화면을 도배한다. 그 메시지들을 바라보며, 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패륜녀 누군지 아냐? 너네 학교잖아.” “니네 학교 이제 패망ㅋㅋㅋㅋ” “학교 대자보에 사과문 붙었어?” 이게 대체 무

빨간 펜으로 열심히 별을 그리고 있는 아이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다시금 교과서로 시선을 던진다. 중간고사 성적을 위해서 내가 과외를 하고 있는 학생의 내신 정리를 해주고 있는 참이다. 아이가 시선을 들어 날 본다. 다음을 재촉하는 눈으로. 『형식은, "옳습니다. 교육으로, 실행으로 저들을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누가 하나요?" 하고 형식은 입을 꼭 다문다. 세 처녀는 몸에 소름이 끼친다. 형식은 한 번 더 힘있게, "그것을 누가 하나요?" 하고 세 처녀를 골고루 본다. 세 처녀는 아직도 경험하여 보지 못한 듯 말

“…So, I never do it again.”“Good job! Thank you Brian. Um, Sujan! How about you?”“네? 아… 그러니까.”친구의 얼굴이 붉어진다.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녀가 노트에 빼곡히 적어둔 것들을 그저 읽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선생님의 푸른 눈과 자신의 노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점점 더 패닉에 빠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도와준답시고 옆에서 무어라 속삭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눈동자만 바람 앞의 촛불처럼 일렁거렸다. 선생님도 그녀만큼 당황

이야기 하나: 선입견오른쪽 이마부터 뺨을 지르는 큰 흉터가 있는 사내가, 그 흉터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인상으로 무언가 한 손에 묵직한 자루 하나 짊어 메고 할머니 홀로 사시는 외딴 집에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큰일이 나기 전에 신고를 해야겠다고? 하지만 알고 봤더니 그는 사실 강도가 아니라 할머니의 하나뿐인 말동무이자, 행여 쌀독에 쌀은 떨어졌는지 매일 같이 들러 살펴드리는 심성 고운 사내였다. 이 이야기는 어릴 때 ‘어린이를 위한 명심보감’의 일부이다. 비록 만화로 되어있고 명심보감의 모든 내

날이 점점 따뜻해진다. 춘삼월의 폭설로, 대체 언제쯤 따뜻해지냐며 툴툴거렸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봄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꽃봉오리가 새침하니 바라보고 있는 하늘도 어쩜 저리도 따뜻한지. 몇 조각 구름이 졸음에 겨워 느릿느릿 움직인다. 이렇게 좋은 날씨엔 샌드위치라도 얼른 싸들고 나들이라도 나서야 하는데. 집구석에서 창밖이나 바라보고 있는 내 신세가 스스로 처량하다. 과제의 쓰나미로 내 눈에서도 쓰나미가 몰려온다. 이걸 언제 다한담. 창문을 경계로 저쪽과 이쪽은 확연히 다른 세상인 것 같다. 반짝반짝한 이상과, 꿀꿀한 현실의 세계.

벚꽃이 만개했다. 학교에 흐드러진 벚꽃이 퐁실퐁실 귀염성 있게 살랑인다. 요 며칠 날씨가 변덕이 심하더니, 과연 추위가 샘할 만한 풍경이다. 커플들이 팔짱 꼭 끼고 벚꽃 길을 걸으며 마냥 신나 상기된 표정을 감추질 못한다. 부모님 손잡고 따라나선 꼬마도 팔짝 팔짝, 학교 안이 온통 벚꽃 잎 같은 봄이다. 교정에 가득 한 봄내음이 열린 창문을 타고 들어온다. 분수대와 색색의 꽃마다 떨어지는 반짝이는 햇빛이 스크린에 상영되고 있는 영화보다도 현실감이 떨어진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어디서 3D안경이라도 주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