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점심으로 초밥을 사왔다. 동네에 새로 생긴 초밥집인데 먹어본 사람들이 맛있다는 평을 써놓아서 한번 가봐야지 했던 곳이다. 마트에서 파는 초밥은 가격이 저렴한 대신 밥알이 왠지 뚜룩뚜룩 한 게 편의점 햄버거를 먹은 것처럼 만족도가 떨어진다. 그에 비해, 신선한 회를 부드럽게 뭉쳐진 밥 위에 올려 정성스럽게 만든 초밥은 가격이 조금 비싸긴 해도 먹고 나면 대접을 잘 받은 손님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다. 어쨌거나 얇게 저민 분홍생강과 미소시루 된장국을 곁들여 맛있는 초밥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이런 호사는 누릴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난타에 처음 입문한 장소이자, 강사로서 첫 활동을 시작한 지자체 관할 센터가 올해 초 코로나19 예방 접종 장소로 지정 되었다. 진행되던 모든 프로그램들은 전면 휴강에 들어갔고 같은 교실을 시간대별로 나눠 사용하면서 얼굴을 익히고 안부를 묻고 각자의 프로그램들에 대한 정보와 홍보를 나누던 강사들, 회원들은 더 이상 만나보기 어렵게 되었다.이제는 방역과 위생관리가 익숙해지고 생활화가 돼서 예전과 같은 상황까지는 아니다. 어느 정도 원래의 시간으로 복귀를 조심스레 시작하려는 찰나에 센터의 갑작스런 휴강 결정은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이동하는 즐거움사람들마다 여행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각기 다를 테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동하는 것’ 자체를 좋아한다. 이동할 때면, 어딘가를 향해 떠나고 있다는 기분과 어딘가로 부터 떠나는 기분이 동시에 든다. 움직이는 사람은 늘 어딘가에 가까워지고 있는 동시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느낌이 오래 쌓이다 보면 결국 이동 자체만 남는다. 그저 움직일 따름. 출발지와 목적지도 잊고 그저 버스나 기차의 좁은 공간만이 앞에 남는다. 어디에 속하는지도 모르겠는 시간과 공간의 감각. 각각의 행선지를 향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1. 벵갈루루라는 발음나는 처음부터 이 도시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벵갈루루, 벵갈루루. 뱅글 돌며 혀끝에서 가볍게 튕겨 나오는 산뜻한 기분. 걸어 다니며 도시의 이름을 자주 불렀다. 나를 이 도시로 이끈 친구 마노즈는 도시의 이름이 ‘방-갈루’에 가깝다고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 발음조차도 마음에 들었다. 인도 남부의 대도시에는 거리마다 야자수들이 가득했고(우리는 야자수를 볼 때마다 어쩐지 진짜 ‘이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햇빛이 쨍쨍했다. 사람들은 인도 북부의 번잡한 대도시들보다 여유로운 표정으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둘째가 내일 전역을 한다.조금 전에 전화가 와서 한 시간 넘게 수다를 떨며 자기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얘기해주었는데 한 마디로 종합해 보면 이거였다.‘이유 불문하고 그냥 무조건 기분 째진다.’성격이 원만한 편이라 군대생활도 잘 해내리라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너(군대)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그냥 다 힘들었단다.“동환아, 너 그거 생각나니?”“엄마. 그거 생각나요?”우리는 이런 말로 시작되는 밑도 끝도 없는 얘길 한참이나 주고받았다.어렸을 때 얘기, 사춘기 때 속 썩였던 일, 외할머니와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1.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이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못 될 것도 없지만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친구들은 대개 나와 실생활에서 오래 만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인터넷에서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던 내게는 직접 만나보지 못하고 친한 친구가 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상의 친구들 또한 가까워졌다 또 멀어지기 마련이고, 자주 봤던 이들 중 몇몇은 아예 보지 않게 되는 경우 역시 있었지만, 미지근한 만남부터 극적인 만남, 적당히 요원해지는 관계부터 치고 박고 싸우는 이별 같은 다양한 관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예전에(결혼 전) 압구정동 H아파트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우리 가족이 거기서 살게 된 이유는 돈이 많아서였다거나 8학군, 혹은 투자를 위한 목적이 아닌 순전히 택시 기사의 실수 때문이었다. 압구정동이 지금처럼 유명한 동네가 되기 전,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됐는데 그때 집을 보러 서울에 올라온 엄마가 서울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 분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서울에서 (살기)좋은 동네가 어디죠?”택시기사는 그 말을 ‘잘 사는 동네’로 오인해 엄마를 압구정동의 한 부동산 앞에다 내려줬고 그 부동산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얼마 전이었다. 난타 연습실의 조명이 어두워서 전기공사를 의뢰했다. 작업이 끝나간다고 연락이 와서 급히 연습실로 향하던 길이었다. 집에서 연습실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빠른 걸음으로 5분, 천천히 걸어도 1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 다만 도로를 하나 건너야 한다. 그 날도 급하게 잰 걸음으로 걸어서 큰 길 횡단보도 앞에 도착했다. 신호등은 빨간 불이고 오가는 차량은 제법 되었다.보행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길 건너편의 차로로 걸어가고 있는 초로의 노인이 눈에 띄었다. 행색은 남루해 보였고 굽
[위클리서울=이선희]딸에 대하여,1970년 6월 20일 딸을 낳았다. 그 시절에는 웬만하면 집에서 애를 낳았다. 올케가 와서 도와주었고, 순산이었다. 다행히 산모도 아기도 건강하게 잘 회복했다. 아이가 백일 정도 지났을 때 나는 돈을 벌어보겠다고 택시 운전을 배우러 자동차 학원에 갔다. 운전면허를 막 따고 연수도 별로 받지 않은 상태에서 중고차를 샀다. 그렇게 운전을 시작하다 하인천 파출소 앞에서 지게를 지고 머뭇거리는 노인을 치었다. 다행히 2주 진단이 나왔으나 이를 엄마가 알자 내 운전면허증을 찢어버리고는 다시는 운전하지 말라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1. 오래된 새들새들은 이 도시가 세워지기 전에도 여기에 있었다. 레비와 나는 그런 사실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연달아 대화가 이어지진 못했다. 뒷산에 가면 팔이 길고 얼굴이 검은 원숭이들이 가득해, 레비가 내게 말해줬을 때 호숫가 뒤로 동산처럼 솟아있는 언덕들이 보였다. 저기에는 원숭이들이 있구나, 원숭이는 저기서 얼마나 또 오래 있었을까. 원숭이가 있고 새가 있고 사원이 있고 사원을 수리하는 번티가 있고, 그래서 여기는 오래된 마을이다. 사람들이 모여와 기도하는 마을. 신이 흘린 눈물이 고여 호수가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얼마 전 전역한 둘째에게 오랜만에 전복 스테이크를 구워주었다. 고소한 버터를 녹여 칼집을 넣은 도톰한 전복을 노릇노릇 구워 감자와 버섯을 곁들였는데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옛날처럼 전복이 비싼 것도 아니고 한 팩 더 사다가 내 것까지 구워먹는다고 해서 누가 뭐랄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전복을 숟가락으로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살뜰하게 도려내 아이에게 모두 구워주고 나는 전복의 내장과 곁에 너덜너덜 붙어있는 것들을 참기름에 찍어먹었다. 그러다 옛날에 갈치 때문에 슬퍼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나는 식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1. 사람들이 불가에 모였다불 앞에 모여 앉는다. 초원에서 사막으로 넘어가는 중간단계 쯤에 있는 푸쉬카르의 겨울밤은 적당히 쌀쌀해서, 밤이 되면 사람들은 길거리 이곳저곳에 불을 피워 쬐었다. 작은 간이 트럭에서 향초나 기념품을 팔고 있던 레비의 가게 주변에는 근처의 상인들이나 그들의 지인들이 모여 앉았다. 나는 어쩌다보니 작지만 유명한 마을 푸쉬카르에 머무는 동안 레비의 가게를 함께 지켜주게 되었고, 사실 별 다른 할 일이 있던 것도 없었으므로 그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잠깐이나마 마음 붙일 곳이 생겨 그런
[위클리서울=이선희] 1947년 음력 10월 7일 서대문구 창천동 20번지에서 태어나 살았다. 내 아버지는 양복을 만드는, 지금으로 치면 남성 패션 디자이너 겸 재봉사. 그런 아버지의 3남 1녀로 태어난 나는 세 살 무렵 천연두를 앓아 평생 얼굴에 흉 자국을 가져야 했다. 이것으로 일생을 비관하며 살았지만, 그래도 어릴 땐 비교적 잘 살았다. 그 시절에도 양복을 입고 학교에 다닌 나는 선생님들 사랑을 받았으니까.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담임 선생님들께 양복을 해주신 아버지 덕이었을 게다.우리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딴사람이 되었다. 때로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1.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새벽 기차를 타고 바라나시에 도착한 아침, 우중충한 날씨 속에 자전거나 세발오토바이로 사람을 옮기는 릭샤꾼들의 호객을 헤치며 바라나시의 구도심에 도착했다. 끊임없는 경적 소리로 꽉 찬 오디오와 어디에나 가득한 사람들, 이미 콜카타에서 겪었던 북인도의 풍경을 지나 도착한 올드타운은 역사에서 가장 오래 남은 도시라는 누군가의 말답게 미로 한 가운데 놓인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힌두교의 신성한 동물인 소들이 아무 방해도 없이 좁은 골목을 휘휘 걸어 다니고, 아무렇게나 퍼져있는 소나 개의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손에 들고 다니는 전화기를 처음 목격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사회 초년생 시절이었다. 말단 여직원으로 갓 입사해 사무실의 맨 끄트머리에 놓인 책상에서 온갖 회사의 잡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간간이 커피 심부름도 해가며 사이사이 전화 응대까지 제법 상냥하게 해냈다. 요즘 직장인들이 들으면 이 무슨 개가 풀 뜯어 먹다가 딸꾹질 하는 소리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커피를 끓이는 일은 물론이고 거래처에서 전화가 오면 두 번 이상 울리기 전에 “네, 어디어디입니다”하며 상대방이 통화하기를 원하는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10년도 훨씬 전에 얘기다.주택청약 통장을 팔려고 한 적이 있었다. 벼룩시장에 ‘청약통장을 삽니다’라는 글이 버젓이 올라와 있었고 그 글을 본 내가 거기다 전화를 걸 뻔 했으니까 말이다. 근데 내가 왜 그걸 팔려고 했을까.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아이 둘을 키우며 도시에 살기엔 턱 없이 부족한 돈을 벌어다 줬다. 때문에 결혼할 때 받은 반지도 팔아먹고 남편 예물로 해준 오메가 시계도 팔아먹고 애들 금반지까지 팔아먹었지만 돈이 늘 모자랐다. 아무리 아낀다 해도 기본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1. 가트 위에서 그들을 만나게 된 경위바라나시에서 내가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한 일은 갠지스 강변을 이어 놓은 계단 같은 제단, 가트를 걷는 것이었다. 수 백 미터 이어지는 가트를 통해 강변의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가 가트를 좋아했던 것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이다.관광객이 있는 곳에 호객꾼이 있다. 마사지 한 번 해보라는 사람, 잡다한 장신구와 마그네틱을 파는 사람, 부채와 피리 등등을 들고 다니며 파는 사람. 어수룩한 여행자들은 제 값보다 훨씬 비싸게 사기 십상이다. 실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나들이를 나섰다. 사실 나들이랄 것도 없다. 늘 수업시간에 맞춰 출퇴근하고 간간이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마트를 들르는 것 외에 딱히 외출이라고 해 본 것이 전무하다 시피 산 게 1년 여였기에 더더욱 나들이 같았는지도 모른다. 아침 뉴스시간에 흘려들었던 날씨를 다시 확인했다.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옷차림이 신경 쓰였다. 봄이 오는 3월이라고는 하지만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온몸을 움츠릴까 걱정도 되었다. 버스가 오는 시간도 확인하고 교통카드도 챙기고 마음이 분주하다. 고작 시장을 가려고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내가 아는 동생이 하나 있다. 옥봉이라고.그 아이는 예쁘고 시도 잘 썼다. 그런 옥봉이가 어느 날 노트 한 권을 남겨두고 자살을 했다. 거기엔 그 애가 그동안 쓴 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한 남자에 대한 사랑과 눈물이 고양이 털처럼 잔뜩 묻어 있는 그런 글들이었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다. 옥봉이 나에게 말해주었으니까.옥봉의 아버지가 사업이 망하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외지로 떠돌 때 만나게 된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도 가족 모두를 잃고 죽지 못해 살고 있다고 했다. 다리를 다친 옥봉의 아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1. 건물의 직선, 생활의 곡선콜카타에서 나는 그저 계속 걸어 다녔다. 어디가 정류장인지, 과연 정류장이 있기나 한 것인지 알 수 없던 형형색색의 만원 버스를 탈 용기 역시 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선 거리에서 인도의 풍경에 적응하고자 했다. 콜카타의 풍경은 사람들이 인도에 대해서 종종 말하곤 했던 것들과 닮아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인도의 첫인상은 여행의 시작점이 되곤 하는 수도 델리의 구시가지의 풍경이었을 텐데도 쇠락한 공업 도시 콜카타의 붐비는 풍경 역시 내게는 그리 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