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막만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눈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금세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힌다. 대사를 읊느라 안면 근육이 조금 움직인 탓에, 충혈 된 눈 밑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눈물이 뚝, 떨어진다. 브라운관에 비친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만 그녀가 좋아져 버리고 말았다. 얼굴도 예뻐, 연기도 잘해. 최고 아닌가! 여배우로서 미모와 연기력을 둘 다 갖추었다면 찬양받아 마땅하다 생각한다. 하긴, 내가 그녀가 연기하는 드라마를 전부 본 것이 아니라, 거실을 오가다 우연찮게 그녀의 눈물 연기만을 본 것이라 그녀의

식빵에 쥐가 들어있었다거나, 개봉하지도 않은 음료수 병 안에 담배꽁초가 들어있다거나, 아기들 먹는 분유에 유리조각이 있었다거나. 거짓말이지? 싶은 이런 일들이 심심찮게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을 볼 때마다, 절로 미간이 구겨진다. 그리고 문득, 이 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댓글 창을 열어보면 거의 몇 백, 몇 천개의 댓글이 바글바글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부분은 비위가 상한다, 더럽다, 이제 다신 저 상품 구매하지 못하겠다, 하는 것들이다. 코카콜라에서 담배꽁초가 나왔어요, 하는 글의 밑에는, 아 나

이것들을 1층까지 좀 옮겨줄래? 교수님이 저쪽 무리를 향해 말하신다. 그러나 마나 ‘이런 건 남자가 드는 거야’, 은근슬쩍 떠넘기면서 여자애들은 빈손으로 가뿐하게 강의실을 나선다. 남자애들은 일단 받아들기는 했으나, 영 찜찜한 표정으로, 저마다 투덜투덜이다. 힘은 나보다 더 센 것들이 양성평등 외치다가 이럴 때만 꼭 여자인척 한다고. 불평할 만도 한 것이, 여자애들도 나눠 들었다면 능히 들 수 있을 법한 무게인데, 그 많던 여자애들이 다 휭 나가버리고 나니까 남자애들 둘 셋이서 그 많은 양을 다 나르게 생긴 탓이다. 1층과 3층을

굉장히 오랜만인 친구 녀석을 만났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친구. 이 녀석과는 말이 꽤 잘 통해서, 둘이서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줄곧 땡땡이를 치곤했다. 분식집에서 떡볶이 한 접시를 두고 몇 시간이고 수다 떨기도 하고, 여름엔 선생님은 모르시는 비밀 아지트에 모여 소심한 비행을 하기도 하고, 뭐 그런 사이였다. 당시엔 거의 잠자는 시간만 빼곤 하루 종일토록 붙어 있는데다가, 대한민국 고교생이라면 거의 열에 아홉은 ‘대입’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기 때문에, 실상 둘이 수다 떠는 내용들도, 네 일, 내 일이 아닌

난 텔레비전을 사랑하는 부류는 아니다. “TV요? 보는 프로 거의 없는데?” 하면 많이들 하는 오해가, 내가 너무나 건실한 나머지 ‘텔레비전은 바보상자’라는 신념하에 의식적으로 멀리하는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런 황송한 오해를 해주신다면 뭐 굳이 시정하진 않지만, 나는 그 정도로 대단한 위인은 못 된다. 안타깝게도 내게도 역시 텔레비전은 재미있다. 그것도 지나치게 많이 재미있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붙잡고 뒹굴거릴 수도 있다. 생각 없이 앉아 있다 보면 몇 시간 정도는 정말로 금방인 것이 텔레비전인 것 같다. 내가 텔레비전에

나는 정말로 지쳐있었다. 버스는 포장된 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덜컹거렸고, 운전기사님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그 덜컹거림처럼 간헐적으로, 하지만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 때문에 지친 몸은 버스 좌석에 녹아 눌어붙은 것처럼 느껴지는데도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머리가 아팠다. 지친 귀로 기사님의 욕설이 간간히 스쳤다. 귀도 눈처럼 개폐가 자유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4시 28분, 버스 앞의 디지털시계가 빨갛게 빛을 발하고 있다. 아직 한참 남았다. 짜증이 퐁퐁 샘솟는 것을 느낀다. 전화기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 어쩌면

비가 내린다. 올해 장마철은 한 달이나 일찍 찾아 왔다고 한다. 성질도 급하지. 운동화들은 죄다 축축했다. 신발은 외출하는 족족 젖어 나간다. 날이 흐리니 잘 마르지도 않는다. 외출하기 싫은 날씨다. 하긴 실내라고해도 뭐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다. 창문만 열면 비가 들이치니 집 안엔 사람도 공기도 다 꼭꼭 갇혀있다. 바람에 창문이 덜컥거린다. 축축한 운동화와 빨래들이 찝찝한 냄새를 풍긴다. 바짝 마른 빨래의 햇빛냄새가 그립다는 생각을 한다. 외출할 일들은 가능한 한 다 비 그친 이후로 미루거나 취소했다. 집에 박혀 있는 것이 유쾌하

카페에서 하는 대화는 대개 가벼운 것들이다. 그 날도 친구와 함께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 저 여자 예쁘다, 하면 내가 어디 어디? 두리번거리고, 은근히 가리키는 눈빛 끝에 앉은 여인네를 결국 발견해내면 와 정말, 혹은 눈은 폼이냐 따위의 반응을 하면서 시시덕거리는. 그런 대화는 대개 왜 예쁜 여자는 많은데 잘생긴 남자는 드물까하는 푸념으로 흘러간다. 그럼 곰곰이 생각한다. 분명 미남과 미녀의 비율이 태어날 때부터 다른 건 아닐 거란 말이다. 그렇다면 단지 착각인가. 당장 카페 안에도 몇 명의 미녀들이 눈에 띄는데 반해, 그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봉해져 있는 편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겉봉을 살펴본다.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다. 보내려 했던 편지가 되었든, 혹은 누군가로부터 받은 편지가 되었든 개봉되어지지 않은 채 보관되고 있다는 것은 꽤 이상한 일임에 틀림없다. 뭐지 이건, 기억을 뒤적여 본다. 불거져 나오는 것이 없다. 별수 없이 뜯어 내용물을 확인 해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조심스럽게 입구를 뜯어낸다. 꽤 두께감이 있는 종이 한 장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딸려 나온다. 펼쳐보니, 언제 적은 건지도 까마득한 편지였다. 새롭게 밝은 쥐의 해,

남자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여자로만 이루어진 무리는 한명도 빠짐없이 모두 모이는 일이 쉽지 않아진다. 나야 스물 셋 먹은 지금까지 줄곧 학생이었던지라 ‘무리’라고 해봤자 학교 친구들이 전부이지만, 그럼에도 초등학교 친구, 중학교 친구, 고등학교 친구, 대학 친구… 다들 제각각으로 쪼개진다. 초등학교야 워낙 까마득하니 패스. 중고교 모두 여학교로 진학했던 터라 고향에 내려가면 죄다 여자애들 모임이다. 고향 친구들은 이 무리에도 속하고 저 무리에도 속하는 교집합이 꽤 넓은 편인데다가 걸러 걸러 다 아는 사이들이니 모일

종일 집에 있었다. 기상이 늦은 탓인지, 게으름이 스물스물 기어 나와 나도 모르는 새에 전신을 집어 삼켰다. 손 하나 꼼짝하기도 싫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서관이 구만리같이 느껴졌다. 창밖으로 느껴지는 햇살이 참 좋았다. 나는 이런 날에 머리조차 감지 아니하고 이렇듯 방구석에 앉아 있는 것에 거의 만족했다. 나가고 싶다거나, 이렇게 좋은 날 꾀죄죄하게 무엇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거실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텔레비전을 틀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리모컨을 잡는 순간, 시간은 빠른 속도로 달리기

그제는 오랜만에 시립도서관에 들렀다가 친한 친구, 아니 친했‘었던’ 친구와 우연히 재회하게 되었다. 그녀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쭉 같은 학교였고, 더군다나 고등학교 땐 3년 내도록 같은 반이었다. 그렇게 죽고 못 살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지만 누적된 시간만 해도 10년이 넘어가다 보니 서로를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함께인 것을 당연시 여길 정도로 꽤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냥 그런 것이었다. 달리 나와 친한 아이인가 하고 따로 고심한 적은 없었다. 어느새 그녀는 나와 도시락을 함께 먹는 친구 무리에 속해있었고, 또

‘모던’이라는 말에 ‘최신’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탓일까. 내겐 유독 모던이라는 단어가 갖는 과거적인 느낌이 극단적인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Modern’이라는 단어 자체도 ‘최근’이라는 재기발랄함을 버리고, 이젠 고유명사처럼 과거를 품게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당시엔 최고로 모던했을 ‘모던 타임즈’는, 제목이 부끄러울 정도로 과거의 이야기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20세기가 모던할 리 없잖은가. 한 달 걸러 새로운 스마트폰 모델이 발표되고 하루하루 새로운 시스템이 범람하는

날이 따뜻하니 기분이 노곤해진다. 방안으로 드리우는 햇빛을 보고 있자니 혀끝에 향긋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서, 집을 나섰다. 아직 오전임에도 햇빛이 대기 중에 충만하다. 겨울이 이미 다 갔구나. 따사로운 날이다. 길거릴 왕래하는 사람들의 옷차림만큼이나 발걸음이 가볍다. 걷는 것을 싫어하는 나지만, 오늘 같은 날엔 하루 온종일 걷는다고 해도 마냥 즐거울 것 같다. 앙상하던 가로수에도 연둣빛이 움트고 있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에 살랑대는 그 여린 새순들을 보고 있자니 눈이 다 황송하다. 그뿐인가, 걸음걸음을 옮길 때마다, 저마다 새침하

한심하다. 눈을 뜨니 밖이 밝다. 아니, 밝은 빛에 눈을 떴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그냥 가만히 누워 눈만 데록데록 굴린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양이 예사롭지 않다. 어쩌면 지금은 오전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알람을 끄고 다시 잤던가. 기억을 뒤져보니 어렴풋하게 뭔가 핸드폰을 만졌던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해 보고 싶지만, 상체를 일으킬 만큼의 기력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너무 한심해서. 대낮까지 잠이나 퍼 자고. 어젠 분명 차돌처럼 단단하게 다짐했었다. 네 시간만 자고 일어나야지. 사실

헌법을 공부하고 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한번 읽어본다는 느낌으로 공부 중이다. 거의 200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 아령대신 써도 손색이 없을 만큼 무겁지만, 그 무게보다 나를 더욱 압박하는 것은 역시 그 안에 빼곡한 글씨들. 어디선가 어렴풋 들어본 기억이 있는 것도 있고 아주 처음 보는 듯 새로운 것들도 있다. 내 지난날, 얼마나 성실치 못한 학생이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벼락치기로 점철된 대학생활. 분명 배운 것일 텐데도 낯설기만 하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에 속도가 좀처럼 붙질 않는다. 아, 수

교정 치료가 이제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힘들기만 하던 교정 치료가 이제는 견딜 만하다. 얼마 전에 교정치료를 끝낸 선배가 “있던 게 없어지니 뭔가 허전하다”고 했을 정도로, 힘든 교정 치료도 적응만 되면 그럭저럭 참고 살 만하다. 입안이 쓸려 난 상처들은 하루하루 더해지면 더해졌지 덜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무감각해진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실감한다. 상처를 혀로 쓰다듬어보면 분명 너덜한 촉감과 상처 특유의 쇠맛이 느껴지는데도, 전혀 아프거나 하지 않다. 치아가

서울대학교로 가려면 이쪽으로 가는 거 맞나요.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 계신 아주머니께서 물어 오신다. 서울대학교요? 잠시만요. 핸드폰을 꺼내 노선도를 검색한다. 아 네, 이리로 가시면 돼요. 고마워요 학생. 아주머니는 화살표를 따라 총총 사라지신다.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고마우실 것까지야. 에스컬레이터는 길고, 또 느리다. 몇몇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간다(위험하니 에스컬레이터에서는 걷지 맙시다^^;;). 나야 뭐 그리 바쁠 것도 없으니 답답할 것도 없다. 다만 멍청하게 서있는 이 잠깐의 시간이 심심할 뿐이

스마트한 세상이다. 손바닥 위에 넷북이며 스마트폰 척척 올려두고 언제 어디서든 월드와이드웹의 너른 바다로 다이빙이 가능하다. 카페, 지하철, 심지어는 길거리에서조차 인터넷으로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시대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닌 세상. 이러한 기술적 진보에 발맞추어 소셜 커뮤니티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페이스북 속에선 연예인, 유명작가, 온갖 명사들이 나에게 자신들의 일과를 말해주고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까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다정하게 “밥 먹었냐?” “잠은 잘 잤냐?” 안부 물어주시니 더 이상 ‘관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