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궁마을의 등꽃 백여 고중영 시인의 편지


오늘도 아침 산행을 했습니다.
7시쯤 출발해서 백석동천을 지나 백사실 약수터에 들어서는 순간 어두컴컴하던 산속이 갑자기 환해진다는 느낌을 받고 고개를 들다가 나는 호흡이 정지되는 것을 느끼면서 우뚝 서버렸지요.
높이 20미터가량의 활엽수림 꼭대기에서 수천 수만의 향기로운 등꽃무리가 은보라색 미소를 머금고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게 아닙니까.
오! 사랑이여.
가슴을 파고들어 마구 얼굴을 부벼대며 웅어리고 싶은 내 사랑이여.
그대는 얼마나 고운 혜안을 가졌길래 이 아침 내가 어김없이 찾아 올 것을 알고 밤새도록 은보라 치마 저고리를 그리 곱게 다려입고 어느 미사려구로도 다할 수없는 맑은 미소를 누구에게 빌려다가 조긋이 웃고 있음이뇨. 치렁한 꽃대를 늘어뜨린 매무새가 열일곱살 적 내 누님의 낭창한 허리같은데 열린듯 다문듯 입술은 반기는 듯 원망하는 듯 한가지로 나를 향했어라. 쳐다보다가 마른침 꿀꺽 삼키고 또 쳐다보다가 "하" 소리없는 경탄을 지르다가 한식경, 끝내 나무가지 하나 집어들고 땅바닥에 일필휘지하였나니
/등꽃은 신의 이름표로구나/
내가 2년째 기거하고 있는 부암동 151번지 하이츠빌라에서 상거 1키로미터 상궁마을 뒷산은 이상스레 등꽃이 지천입니다. 일생을 궁녀로 살다가 늙으면 퇴출되어 이 산속에 숨어살듯 살아낸 李朝시대 궁녀들의 쓸쓸한 노후를 위로하고자 하늘님이 내리신 마음燈 밝힘꽃은 아닐지.여깁니다만
어쨌던지 깔깔해진 입안을 백사실 약수 한모금으로 달래고 하산을 시작했거나와 계절의 여왕 5월의 부암동 1번지 산속은 거룩하다할만큼 조용하고 신비롭다할만큼 온화한 표정의 꽃들이 세상을 밝힙니다.
하얀 가슴을 열어보이는 배꽃을 비롯해 노란 꽃을 받쳐든 채 푸르게 웃는 황매화의 뻐청가지. 꽃진자리 마다 고추대 끝 시나리 같이 모성을 야적시킨 앵두열매. 양귀비의 정염을 닮으려고 붉게 더 붉게 화장한 철쭉꽃. 천기를 숨겨놓은듯 초록우산을 펼친 산머우 그늘에 몰래몰래 핀 좁쌀만한 바우나리꽃 등 이루 헤아릴 수 없고 말로는 다 전할 수없는 신비한 꽃들이 허공에 걸린 등꽃들을 앞세워 성대한 축제 한마당에 나와 조용한 걸음걸이로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산책을 할 때마다 여긴 왜 등꽃나무가 이리도 많을까? 하고 늘 궁금했었습니다. 상궁마을 뒤산 전체가 등꽃으로 뒤덮였으니 개체 수로 헤아린다면 수만 아니 수십만 그루의 등꽃나무가 될지언정 내눈에는 모두가 한그루로 보이메 더없이 소중하고 바라보기조차 아까운 등꽃나무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산 아래에 이르르니 낮은 구릉에도 등꽃이 무리로 피어있는데 그 중에 꽃 한송이가 돌틈에 낀 채 힘겨워하고 있길래 내 깜냥으로는 그꽃을 편하게 돌 위에 얹어주어야겠다고 줄기를 조심스레 잡고 꽃망울을 일으켜 세우는데 아뿔사 이일을 어쩌리오. 세속에 더럽혀진 내 손길을 거부라도 하듯 꽃대가 툭 부러지면서 꽃잎들이 우수수 덜어져 나갑니다 그려.
화들짝 놀란 나는 거짓말하다가 들킨 꼬맹이처럼 덩황하여 어쩔줄 몰라하다가 정신을 수습한 뒤 꽃잎과 꽃대를 가지런히 모아 낙엽으로 덮어주면서/임이여! 고이 잠드소서/ 고개를 숙여주고 돌아왔습니다만 그것으로 속죄가 다 되겠는지요. 오늘밤 잠자리에 들면 꿈길을 열어 상심했을 내 임을 찾아가 못견디게 쓸어안고 차마 목이 메일지라도 사랑의 세레나데를 오래 오래 함께 불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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